4월은 김교신 선생의 달이다. 이 무기력하고 어지럽고 더러운 세태에서 금년은 더욱 선생을
생각함이 간절하다. 부질없는 생각인 듯 하나, 선생이 그렇게 사랑하고 아끼던 민족이 이 모양 이 꼴이다. 선생이 계셨더라면 과연 난마(亂麻)에
쾌도(快刀)격으로 이 땅에 무슨 결정적인 말씀내지 행동이 있었을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선생 같이 뜨거운 마음과
높은 신앙적 이상, 그리고 학문적 진리애(眞理愛)와 도덕적 정의감으로 민족과 나라를 걱정하고 사랑하고 또 이를 위해 애쓴 분을 달리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서조선 사건 때 일본 경찰들은 선생과 선생의 잡지에 대해 민족의 5백년 후를 계획하는,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 이상의 악질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언젠가 류달영 선생 댁에서 선생이 일제 말기 ‘성서조선 사건’으로 옥에 갇혔다가 석방된 후 류 선생에게 보낸 한
장의 엽서를 본 일이 있다. 그 내용은 잊었지만, 몇 줄 안 되는 그 엽서에서 접한 선생의 뜨거운 우국(憂國)의 지성(至誠), 민족에 대한 깊은
우려, 드높은 희망, 그리고 강철 같은 의지, 이런 것들에 대한 인상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는 아직도 내 심중에서 잊혀지지 않는 생생한 애국의
영감이다.
선생이 돌아가신 후 흥남에서 장례식이 있은 후 여러분이 질소회사 사택 선생 거실에 모여 앉았을 때의 일이다. 선생과 어릴
때부터 죽마고우였다는 함흥의 한 모 선생이 벽에 걸린 한국 지도를 쳐다보며, “김 선생은 별난 사람이야. 생애 내가 만날 때마다 이 지도를
쳐다보고 있었으니, 필시 삼천리 방방곡곡에 무슨 큰 계획이 있었을 터인데, 이를 이루지 못하고 갔으니 애석하기 짝이 없다”고 했다. 과연
과묵하셨던 선생이 생애 정력을 다하신 청년 교육과 박물, 지리 등 전공을 통해 민족에 대해 심중 깊이 계획하고 간직하신 바를 펼치지 못하고
돌아가셨으니 인간적으로는 한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선생의 심중을 더듬을 때, 나의 생각은 다시 선생의 정릉
서재에 미쳤다. 선생의 서재는 언젠가 <성서조선> 권두문에서도 발표되었지만, 선생 자신이 북한산 맑은 개울의 깨끗한 돌을 주워 모아
선생의 가옥 곁에 세운 것이다. 방음과 채광에 유의하여, 개울 건너로 앞에 약사사(藥師寺) 노송(老松)들을 바라보는 아담한 남향 별채였다. 선생
생존시에는 이 방에 어린 자녀들은 물론 어른들도 얼씬 못했다고 한다. 동네 할머니가 이 방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선생 자녀들이 할머니 매 맞으려
그러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해방 후 나는 선생의 책을 정리하느라고 몇 번 선생 없는 이 서재에 드나든 적이 있다. 방 삼면에 세
부분으로 나누어 잡지까지 포함하면 천 권은 훨씬 넘을 책이 책장에 질서정연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네 벽 중간 중간에는 정몽주, 링컨 등의
초상화와 두 폭 족자가 걸려 있었고, 예의 대형 한국지도는 흥남에 옮겨간 관계로 보이지 않았다.
책은 세 면으로 구분되었는데, 한
면에는 옥스퍼드 판 그리스어 고전 총서와 유명한 스트라크 빌렐베크의 신약주해 등 학문적인 고급 주해서, 그리고 바우어 그리스어 대사전,
게제니우스의 히브리어 대사전, 홀덴베르크의 히브리어 문전(文典) 등이 있었다.
다음 한 면에는 칼뱅의 신구약 주해 전질과 구판
마이어 주해 영역 전질, 그리고 벵겔과 고데의 주해, 그리고 국제비평주해, 케임브리지 바이블 등의 영어 주해서가 있었다.
다음 한
면에 제일 넓게 자리 잡은 것은 우치무라(內村) 등 무교회 계열 전집류와 잡지, 그리고 다산 정약용 전집 등 한국학 관련 각 분야의 서적,
박물학 전공인 선생의 전문 연구서, 그리고 더 타임즈 지도 여러 해 분이 쌓여 있었다.
나는 선생의 서재를 회상하면서 만일 선생이
계셨더라면 해방 후 본격적인 교육 사업에 뛰어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고, 또 실제적이고 정력적이고 정의감이 강했던 선생이시니 혹시
현실적인 면에라도 나서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나는 결국 선생은 역시 민족의 이 부패와 혼란 가운데서, 선생의 책장에 수집되어 있던
바우어, 게제니우스 등을 총동원하여, 더욱 본격적으로 진리의 탐구, 성서 연구에 침잠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사실 해방
전, 10년 만에 양정고보 교편생활을 한때 집어던졌을 때에도, 선생은 내게 신구약성서 특히 예언서 등의 본격적인 연구에 들어가고 싶다는 뜻을
피력하신 일이 있었다. 그리고 흥남에서의 격무 가운데서도 낮에는 직장에서 그리스어 성서를, 밤에는 핸드북 총서 히브리어 문전을 손에서 떼지 않은
것으로 안다.
이렇게 생각하니, 과연 선생은 모든 면에서 월등한 능력을 갖고도 매사 신앙의 좁은 길을 걸은 것이 사실이다. 내가
아는 한 활인동과 종로 부활사 강당에서 선생 주관으로 모인 일요집회도 회원은 늘 10여명 정도였다. 한때 정릉에서는 매주일 손정균 씨(전 중앙대
의대 교수, 당시 양정고보 학생) 개인 상대의 성서 강의도 상당 기간 계속되었다. 선생은 청강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3년을 들을 각오가 있느냐고
다짐을 받았다. 158호를 발간한 <성서조선>도 독자 수는 300을 넘지 못했다.
그러나 선생의 성서 강의는 성서진리의
광맥, 본질을 파고드는 놀라운 것이었다. 선생이 계셨더라면 지금도 역시 민족의 신앙 확립을 위한 길을 확고하게 걸으셨을 것으로 생각한다. 선생은
<성서조선> 창간사에서도 ‘성서’와 ‘조선’을 말씀하셨던 것이다.
<성서연구> 제81호 (1959년 3,
4월)
"언젠가 류달영 선생 댁에서 선생이 일제 말기 ‘성서조선 사건’에서 석방된 후 류 선생에게
보낸 한 장의 엽서를 본 일이 있다. 그 내용은 잊었지만, 몇 줄 안 되는 그 엽서에서 접한 선생의 뜨거운 우국(憂國)의 지성(至誠), 민족에
대한 깊은 우려, 드높은 희망, 그리고 강철 같은 의지, 이런 것들에 대한 인상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는 아직도 내 심중에서 잊혀지지 않는
생생한 애국의 영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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