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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평구 선생

<노평구전집> 인생의 불행과 기독교 신앙

by 안티고네 2001. 6. 26.

나 자신 50도 못된 인생이지만 요사이 통렬하게 느끼는 것은 역시 인생이 문제라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염세 철학과 인생의 부조리와 모순을 역설하는 실존철학에 다소의 동정을 보내게 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나 같은 비사교적인 사람도, 좁은 신앙의 교제를 통해서나마, 다들 구체적인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것을 본다. 개개인의 내적, 정신적인 문제나 다분히 추상성을 띠는 인류 문제 등을 제외하고도, 모두 비근한 문제로 고민들을 하고 있다. 사업, 직업, 가정, 결혼, 건강 등의 문제이다.

사업은 성공했으나 가정이 엉망이 되었다는 갑(甲), 지위는 얻었으나 부부간에 금이 갔다는 을(乙), 돈은 벌었으나 한층 공허감을 느낀다는 병(丙), 이런 식이다. 최선의 결혼에 의외의 불만이 튀어나오는가 하면, 믿음의 결혼에 이혼 파탄이 일고, 자신만만하던 건강에 질병이 온다. 교수로 승진은 했으나 신앙을 잃는 경우도 있고, 도둑을 당하는 경우, 사기를 당하는 경우도 있다.

최근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당당한 의사의 자격에 이혼 후 재혼으로 행복한 가정을 이룬 과거의 믿음의 친구가, 이제는 술이 아니면 살 수 없다고 하며, 나에게까지 찾아와서 술주정으로 행패를 부리더니, 술이 깨고 나서는 내 앞에서 대성통곡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인생의 무상과 엄숙을 절감, 통감했다.

나는 인생이란 우리의 이상이나 희망이나 목적대로 쉽사리 척척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앞날의 불행을 전혀 모르고 사는 것이 우리 인생이다. 기껏해야 앞일을 모르는 것이 행복인가? 실로 무력한 인생이다. 이래서 사람들은 신앙조차 무력한 쓸데없는 것이라 해서 차버린다. 그러나 사실은 바로 여기에 잘못이 있는 것이다.

기독교신앙이란 우리 개개인의 이상, 희망, 요구 등을 하나하나 이루어주는 무당 판수의 푸닥거리나 굿 같은 것은 결코 아니다. 기독교신앙은 그 자체가 유일, 절대적인 이상이요, 희망이요, 목적인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의 인생 전부가 이를, 즉 신앙을 위해 있어야 하는 그런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생의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가 이의 유무로써 결정되는 그런 절대적인 것이다. 딴 길을 허락하지 않는, 키에르케고르의 이른바 ‘이것이냐 저것이냐(Entweder-Oder)’의 길인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 첫머리에서 한, “우리의 마음은 당신 안에서 휴식하기 전까지는 평안할 수 없습니다”는 말은 실로 이 기독교 신앙의 절대성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에서 인생의 불행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결국 물질적인, 외적인, 천박한 거짓 행복에서 사람을 해방시켜 진정한 행복과 신앙의 세계로 인도하기 위한 하나님의 선의의 조치인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믿음 안에서 인생의 모든 사실을 하나님의 최선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인생의 불행은, 사람 편에서 보자면 우리의 불신과 교만과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질책인 것도 알아야 할 것이다.


<성서연구> 제81호 (1959년 3, 4월)



"기독교 신앙에서 인생의 불행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결국 물질적인, 외적인, 천박한 거짓 행복에서 사람을 해방시켜 진정한 행복과 신앙의 세계로 인도하기 위한 하나님의 선의의 조치인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믿음 안에서 인생의 모든 사실을 하나님의 최선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