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이신 대학생 이보미 님과의 대화입니다
이보미 님의 글
보미에요..여기 들어오신 모든 분들 읽어주세요...
선생님 안녕하셨죠?
이렇게 오랫 만에 들어와서 넘 죄송해요.....^^
게다가 오랫 만에 들어와서 이런 막 되먹은 글을 올려서 넘 죄송합니다...
너무 건방지죠?
하지만 끓어오르는 울분을 참을 수 없어서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죄송합니다..좀 욕도 많고 길더라도 참고 읽어주세요..
제가 쓴 글은 아니고 한 역사 사이트에서 퍼온 글인데요..넘 슬픕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관심을 가져 주셨으면 좋겠어요..
여긴 한국사 사이트가 아니지만 사학자로써 이런 문제도 함께 고민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제가 너무 건방진가요?
미국인들은 우리 역사를 어떻게 배우며 이해하고 있을까.
여기 있는 한국사를 한 번 읽어보세요. 미국 교과서에서 그대로 옮겨온 글입니다
The Kingdom of Korea
Korea is another East Asian with a distinctive and rich culture. For much of its long history, Korea has
been dominated by stronger powers. Most often, China or Japan controlled Korean politically and
influenced its culture. But the Koreans have managed to keep their own identity.
한국의 왕국
한국은 또 하나의 독특하고 화려한 문화를 가진 동아시아 국가이다. 긴 역사동안 한국은 더 강한 힘을 가진 존재로부터 지배를 받아왔다. 종종, 중국과 일본은 한국을 정치적으로 지배했고 한국의 문화에 영향을 끼쳤 다. 하지만 한국은 그들 나름대로의 독자적 문화를 지켜나갔다.
1. The Early Years. The first recorded effort at political organization in Korea was made in 194 B.C. A military leader named Wiman set up a tate that came to be known as Wiman Choson. Choson lasted for approximately 80 years, until armies from China destroyed it. The northern part of Korea then became part of the Chinese Empire.
1. 초기. 가장 처음으로 한국에 정치적인 조직체가 만들어진 것은 B.C.194년이다. 군대의 지도자인 위만이 위만 조선 이라는 국가를 세운 것이 그것이다. 조선은 중국의 공격을 받아 멸망할 때까지 80여 년간 계속되었다. 그리고 나서 한국의 북쪽 영토는 중국의 영토가 되었다.
* - 헉, 너무하다. (古)조선의 역사가 80년이 되다니...
From about A.D.1 to 900, Korea was divided into three kingdoms. The Chinese culture strongly
influenced the kingdom in the northern part of the country. Buddhism, Confucianism, and the Chinese written language were brought to Korea during this period. Japanese culture had a greater effect on the two kingdoms in the south, which were closer to Japan.
대략 A.D1년에서 900년까지 한국은 세 개의 왕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중국의 문화는 북쪽에 있는 나라 (고구려)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불교, 유교, 그리고 중국 문자(한자)가 이 시기에 한국으로 들어왔다. 일본의 문화는 더욱 더 강한 영향을 일본에 가까운 남쪽의 두 나라(백제와 신라)에 주었다.
* - 음. 임나일본부설의 영향을 받은 것 같죠?
From the 10th through the 14th centuries, a dynasty of Buddhist rulers called the Koryo united all of Korea. (The name Korea comes from the word Koryo.) Although these kings ruled independently, they paid tribute to the Mongol Empire. During the Koryo period, in 1234, the Koreans invented movable metal type using Chinese symbols to print books.
10세기부터 14세기까지, 불교 왕조인 고려가 한국 전체를 통일했다. (코리아라는 이름은 고려라는 단어에 서 유래된 것이다.) 비록 이 왕국들은 자주적이었지만, 몽고 제국에 연공을 바쳐야 했다. 고려, 1234년에 한국인들은 중국의 문자를 찍어낼 수 있는 금속활자를 발명했다.
The Koryo period ended in A.D.1392. In that year, the Yi Dynasty established its rule over Korea. The Yi, who followed the teachings of Confucius, built their imperial capital at Seoul. This city served as the center of political rule for most of Korea's history.
고려의 시대는 A.D.1392년에 끝났다. 이 해에는 이씨 왕조가 한국에 들어섰다. 유교 왕조인 이씨 왕조는 그들의 수도를 서울에 건설했다. 이 도시는 대부분의 한국 역사에서 정치상의 중심지로 존재해 온 곳이다.
A civil service examination system was used to select government officials from a group of scholars trained in Confucian teachings. In this and in other ways, the Koreans continued to draw heavily on Chinese culture. But they did create their own alphabet in the 1440's.
과거시험은 정부의 관리를 뽑는 제도이며, 유생들 중에서 뽑았다. 이런 면에서나 다른 면에서나 한국은 계속해서 엄청난 중국 문화를 들여왔다. 하지만 그들은 1440년에 자신들만의 문자를 만들기도 했다.
China also gave Korea military aid. With this help, Koreans resisted Japanese forces that invaded their country from 1592 to 1598. During the war, a Korean hero, Admiral Yi Sunshin, built the world's first iron-sided ship. With it, he destroyed much of the Japanese fleet, which was made of wood.
중국은 또한 군사적인 면으로 한국을 도와주었다. 이러한 도움에 힘입어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침략해왔던 일본을 격퇴시킬 수 있었다. 이 전쟁 기간 동안, 한국의 명장인 이순신은 세계 최초의 철갑선을 만들었다. 그 배로 그는 많은 일본의 나무 함대를 전멸시켰다.
* - 이순신 장군은 이 교과서에서 꽤나 비중이 있군요. 많은 사람들이 이순신 장군을 알리려 노력한 덕분인 것 같네요. 하지만, 그 과정에서 거북선을 너무 강조한 것 같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승리한 원인은 뛰어난 전술 때문이었는데...
Explain: Early Korean history was shaped by the Koryo and the Yi.
설명하시오: 초기의 한국 역사는 고려와 이씨 왕조에 의해 이루어졌다.
2. The Manchu Influence. The war with the Japanese exhausted the Koreans. As a result, new invaders from Manchuria easily conquered the whole country in the 1630's. The Manchus then went on to seize control of China. In Korea, while the Yi rulers remained on the throne, they were subject to the Manchu government.
2. 만주(청; 이하 만주 혹은 중국으로 표기)의 영향. 일본과의 전쟁은 한국인들을 지치게 만들었다. 그런 결과로 인해, 1630년대에는 만주의 새로운 침략자들이 전 국토를 쉽게 정복했다. 그리고 만주족들은 중국의 정복에 나섰다. 한국에서는 이씨 왕조가 그대로 남아 만주 정부에 종속되었다.
Korea, following China's lead, isolated itself from the rest of the world. European sailors who became shipwrecked in Korea were usually held prisoner. In 1669, eight sailors escaped from Seoul after 13 years of captivity. When one of the sailors, Hendrick Hamel, returned to Holland, he wrote a book about his experience. This book gave the Western world its first description of Korea.
한국은 중국을 따르면서 그 밖의 세계로부터 자신을 고립시켰다. 난파되어 한국에 표류한 유럽 항해사들은 보통 감옥에 수감되었다. 1669년, 8명의 항해사들이 13년만에 서울로부터 탈출했다. 그 중의 한 명인 헨드릭 하멜은 네덜란드에 돌아가 그가 경험한 것들을 책으로 펴냈다. 이 책은 서구 세계에서는 처음으로 한국에 대해 기술한 것이다.
After 1860, Western nations and Japan tried to force the Koreans to open their ports to trade. The Koreans resisted all such attempts. At the same time, the rivalry between China and Japan over Korea grew. Both wanted control of rich resources in Korea, such as minerals and timber.
1860년 이후, 서양의 나라들과 일본은 한국의 문호 개방을 위해 압력을 가하려하였다. 한국인들은 그러한 모든 시도에 저항했다. 같은 시기에 중국과 일본은 한국을 사이에 두고 경쟁을 거듭하고 있었다. 양쪽 모두는 한국의 광물이나 목재 등등의 자원의 지배권을 원했다.
In 1876, the Korean government finally gave to Japanese pressure. A trade agreement was signed, opening up several Korean ports to trade. Soon, other nations, such as the United States, Great Britain, and Russia, signed treaties with Korea. Russia, a neighbor of Korea, was, like Japan, especially interested in Korea's resources.
1876년에, 한국의 정부는 결국 일본의 압력에 내주고 말았다. 무역협정이 맺어졌고 서너 개의 한국 항구 가 무역을 위해 개방되었다. 곧이어 미국, 영국, 그리고 러시아와 같은 다른 나라들이 한국과 조약을 맺었다. 일본과 같이 한국의 이웃 나라였던 러시아는 특별히 한국의 자원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The Manchu government in China resented the growing Japanese influence in Korea. The Manchus attempted to take firmer control of Yi affairs. This conflict between China and Japan let to a brief war in 1894 in which the Chinese were defeated. At the end of the war in 1895, China recognized
Korea's independence. Japan had ended the Manchu influence in Korea.
중국의 만주 정부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에 분개하였다. 만주는 이씨 왕조의 지배권을 더욱 견고히 하려했다. 이러한 중국과 일본의 충돌은 1984년에 전쟁으로 이어졌고, 이 전쟁은 중국의 패배로 종결되었다. 1895년 말, 중국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였다. 일본은 한국에 대한 만주의 영향을 끝낸 것이다.
Prove or Disprove: Korea was greatly influenced by competition between China and Japan.
입증 혹은 반증하시오: 한국은 중국과 일본의 경쟁으로부터 거대한 영향을 받았다.
3. Japanese Rule. After the defeat of China, the Japanese began to force a number of reforms on the Yi government. The Russian began to aid the Koreans against the Japanese. Russia wanted control of Korea. Japan wanted Russia out of Korea. The two powers went to war in 1904. To everyone's surprise, the japanese defeated the Russians on land and sea. In 1910, Japan annexed Korea and ended the Yi Dynasty. Korea became the largest possession in the Japanese Empire.
3. 일본의 통치. 중국의 패배의 이후 일본은 이씨 왕조의 개혁에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러시아 또한 일본에 맞서 한국인들을 원조하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한국의 지배권을 원했다. 일본은 러시아를 한국에서 몰아내길 원했다. 이 두 세력의 갈등은 1904년의 전쟁으로 폭발했다. 일본이 육지와 바다에서 모두 러시아를 격파했다는 사실은 모두를 놀라게 했다. 1910년, 일본은 한국을 합병하고 이씨 왕조를 멸망시켰다. 한국은 일본제국의 가장 큰 속령이 되었다.
Japanese rule was harsh. A governor-general directly responsible to the Japanese emperor administered Korea. Freedom of speech and the press and other rights were denied to the Koreans. Schools had to teach the Japanese culture and language and ignore the heritage of Korea. The Japanese used their new colony as a place to raise rice to feed the people of Japan. Japanese business were encouraged, while Koreans were discouraged from engaging in such business. The Japanese also established military bases in Korea to aid further conquests in Asia.
일본의 통치는 가혹했다. 일본 천황으로부터 임명된 총독은 직접 한국을 통치하였다. 발언과 언론의 자유, 그리고 다른 권리들은 한국인들에게는 허용되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일본의 문화와 언어를 가르쳐야 했고 한국의 유산은 무시당했다. 일본은 그들의 새로운 식민지로부터 쌀을 착취해가 자신들의 국민들을 먹였다. 일본의 산업은 장려되었고, 한국인들은 그와 같은 산업에 손도 댈 수 없었다. 일본은 또한 한국에 군사시설을 세우고 아시아 정복의 발판으로 삼았다.
In some ways, the Koreans benefited from Japanese rule. The communication and transportation systems were greatly improved. Modern business techniques used by the Japanese helped the economic development of Korea. The advanced educational system that the Japanese established trained many of Korea's leaders.
한편으로는 한국들에게 일본의 통치가 이득이 되었다. 교통통신과 운송 시설이 매우 향상되었다. 일본이 사용하던 근대 산업 기술은 한국의 경제 성장에 도움을 주었다. 일본이 세운 진보적인 교육 제도가 많은 한국의 지도자를 양성시켰다.
Korea did not become an independent nation again until 1945, after the defeat of the Japanese Empire in World War II. Even today, Korea continues to be influenced by stronger nations, especially China, Japan, and the United States.
한국은 세계 2차 대전이 끝나 일본제국이 멸망할 때인 1945년까지 독립국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지금까지도 한국은 중국, 일본, 그리고 미국과 같은 강대국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Give two examples of the harshness of Japanese rule.
일본 통치 동안의 가혹 행위 두 가지를 쓰시오.
List two ways in which Japanese rule helped Korea.
일본 통치가 한국에 도와준 것을 두 가지 적으시오.
후--------. 저 지금 한숨 밖에 안나옵니다. 이러니 미국인들이(다른 나라도 별반 다를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만...) 우리나라에 대해 호감을 가질까요? 동양의 대표적 문화라면 중국과 일본(실제로 대부분의 교과서는 아예 한국 역사를 다루지 않습니다. 하긴, 이런 역사를 가르치는 것보다는 나을 수도 있지요...)만이 나옵니다. 저도 외국에서 가르치고 있는 한국 역사가 왜곡이 심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정도 일 줄은 몰랐습니다... 우리나라가 중국하고 일본의 똘마니였다니......
* - 다행히 역사 선생님과 이야기가 잘 돼서 우리 class는 이 역사를 배우지 않기로 했습니다.
* - 다른 부분(중국이나 일본)에도 많은 오류가 있었습니다. 만리장성이 지금의 평양 정도까지 그려져
있고, 우리나라가 청나라의 영토로 되어있는 등 이쪽 부분에도 많은 수정이 필요하더군요.
* - 앞에서 보셨듯이 고대사 연구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여러분 분발합시다!
* - 이 자료가 우리나라의 역사 회복에 조금이나마 힘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 하나를 들면
제목이 거창함에 대해 일단 사과를 드립니다.
제가 뭐 마틴 루터 킹 목사처럼 흑인운동을 위해 연설하듯 "I Have a dream." 이라고 외치는 것 까지는 아닙니다만, 이렇듯 제가 사랑하는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들과 저의 뜻과 생각을 나누기 위해 이렇게 글을 띄웁니다.
제 글을 읽으시고 공감이 가시거나 조금이나마 교육적이었다고 생각되시는 분이 계시면 언제라도 퍼가셔서 더욱 많으신 분들이 읽을 수 있도록 조처 바랍니다.
저는 미국에서 생활한지 몇년정도 된 유학생입니다.
나이는,,, 허송생활을 좀 한 관계로 이십대 후반입니다만 아직도 학교에 몸담고 있습니다.
대학원 과정도 아닌 대학 과정을 말입니다. 그점에 대해선 저도 참 한심하게 생각하고 있는 바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저는 무엇을 여기서 말씀드리고 싶은 걸까요.
저는 과연 인종의 전시장이라고 불리는 미국에서, 그것도 가장 많은 인종이 들끓는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하고 있는 관계로 각 인종 간, 국가 간의 오묘하고도 겉으로 함부로 들쳐지지 않은 관계에 대해 심히 고찰을 하고 있는 중이올시다.
물론 이곳에서 저보다 훨씬 오래 생활하시면서 더욱 많은 경험을 거치신 분들이 당연히 계실줄로 아옵니다만, 표면적으로 드러나게 어떤 글로 올려진 것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사실에 이렇게 저라도 한마디 하게 되었음을 미리 사죄드리는 바입니다.
본론으로 빨리 들어가겠습니다.
저는 미국 대학에서 여러 강의를 듣습니다. 그 중엔 약간은 얍삽한 방편으로 제가 학과수업 및 시험에서 득을 볼 수 있는 과목들을 많이 듣는 편입니다. 예를 들면, 아시아 국가들의 관계라던가, 중세부터 근대까지의 동아시아 국제관계, 중세와 근대의 일본, 근대 중국문학 등등이 있지요.
짐작들 하셨겠지만, 저는 한국에서 자라고 대학 이년까지 공부하다가 군대를 다녀온 인간으로써 완전한 한국 토종입니다. 고로 아시아관계의 학과들은 다른 미국 학생들에 비해 상당한 이득을 보고 시작하는 것이지요. 물론 미국서 자란 아시아계 학생들보다도 말이죠.
그런데 문제는 말입니다.
이 미국 교수들이 가르치는 학과내용이 이제껏 제가 배웠던 내용과 교묘한 차이점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교묘한 차이점이라. 그렇습니다. 전체적인 내용은 한국에서 배운 역사나 정치, 사회등의 내용과 별반 다른 점이 없습니다만, 교묘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구구절절 그 교묘한 차이에 대하여 일일이 논한다면 이쯤에서 당장 마우스를 클릭하여 나가버리는 분들이 많으실 것 같아 생략을 하고 간단한 예로 대신하겠습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그냥 콧방구 한번 뀌고 무시하고 지나갈 정도의 내용이기도 하거니와 외국에서 직접적으로 외국인의 입에서 듣는것하고 저의 글을 읽을때하고는 감도의 차이도 있기 때문에 과감히 생략하게 되었읍니다.
간단한 예로, 고려시대 왜구가 창궐하여 한반도를 비롯, 중국 서부연안 지방에까지 출현하여 양국에 공포의 대상이 되었으며, 한국의 왕이 일본의 황제에게 칙사를 보내어 간청하기를 제발 왜구의 창궐을 억제해 주십사 하였다는 내용이 백인 교수의 입에서 나옵니다.
사실 제가 역사공부를 한지가 벌써 약 8년여 되가는 관계로 확실한 기억은 없읍니다만, 대략적인 기억으로는 대부분 맞는 내용이지 싶습니다. 하지만,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건 교묘한 말과 어감의 차이점으로 인해 모든 관계의 이미지 자체가 흐려지는 상황입니다.
왜구가 공포의 대상이었다. 대략 맞는 말이죠. 그런데 그 이후.
한국의 왕이 일본의 황제에게,,,, 운운 하는 부분은 말입니다. 역시 맞는 호칭이지만, 어감 상에서 볼 때, Korean King 이란 말과 Japanese Emperor에서 큰 어감 상 상하 관계의 이미지가 형성됩니다. 왕은 황제의 한 단계 아래란 뜻이죠.
왜구의 억제를 사절단을 보내 간청하다,,,,,란 문장도 마찬가지 예입니다.
왜구의 본거지였던 쓰시마섬을 정벌했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최무선이 송나라에서 화약을 들여와 화포를 제작 왜구 소탕에 성과를 거두었다는 내용도 없습니다. 백인 교수는 "어느 시점에서 갑자기 왜구가 줄어들기 시작했는데 이유는 모르겠다." 고 말을 마쳤습니다.
이쯤 되면 문제가 무엇이겠습니까. 간단합니다.
한마디로 별볼 일 없는 한국의 왕이 대 일본 황제에게 제발 일본 해적들의 자제를 부탁했다 정도가 되겠습니다. 왜구를 영어로는 WAKO 라고 표현하는데 교수도 누구도 뜻은 모르고 단지 일본해적을 칭하는 말로만 알고 있습니다. 일본의 개(새끼)들이 정답이죠.
그리고는 한마디 끝에 덧붙이더군요.
몇 년 전 한 한국 학생이 자기 수업시간에 한 말에 의하면 한국 국정교과서에서 왜구의 침략을 250회가 넘는다고 학생들에게 가르친다는 말이었습니다. (저도 기억이 대충 나더군요.)
그러더니 그럽디다. "여기 한국 학생있나?"
그래서 제가 손을 들었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저,,,,영어 잘 못합니다. 수업시간에 발표를 하려면 머릿속에서 생각을 정리해야만 하는 수준인지라 긴장이 되더군요.
"나는 한국의 정부가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 관계에 대해 학생들에게 과장된 역사를 가르친다고 생각하는데 ,,,, 군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라고 대뜸 묻더군요.
약 50여명 되는 학생들의 눈길이 긴장한 저에게 모였습니다.
한데,,, 그 교수의 질문이 머릿속에서 프로쎄쓰가 되자 저는 분노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해가 되시겠죠? 왜 제가 갑자기 온몸에 휘감겨 오는 분노를 느꼈는지.
한마디로 한국 정부가 역사를 왜곡한다는 겁니다. 아,,,,이런 ,,,,,
저는 얼굴이 붉어진 채로 더듬더듬 말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과장해 교육시키고 있지 않다. 이차대전의 예만 봐도 알듯이 전쟁피해국인 한국과 중국 그리고 동남아시아 여러 국가들의 확인된 역사가 과장된 기록이더냐. 역사는 사실이며 과장된 교육을 할 필요가 무엇인가....등등......
제 분노에 찬 그렇지만 조용조용 내뱉는 답변이 끝나자마자 그 백인 교수가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I still think Korean Government's exaggerating the history."
아아 !!!!!! 이게 왠 일입니까. 그 백인 교수의 한마디로 인해 저는 일개 일본 식민지국의 일원으로 치부되어 피해망상적인 발언을 해대는 열등감에 사로잡힌 한국인이 되어버렸습니다. 저를 응시하던 50여명의 백인, 흑인, 히스패닉, 그리고 각종 아시안계 미국인 학생들의 머릿속에도 그렇게 각인되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아시아학 박사학위가 빛나는 백인 교수의 지식과 권위를 한 일개 유학생의 졸렬한 언변보다는 훨씬 신뢰할테니까요. 그것도 일본 시다바리(쫄개)인 한국인인데 말이죠.
수업은 끝나고 남은 건 저의 분노와 수치감뿐이었습니다.
일본의 모든 것에 숭배의식을 가지고 있는, 그러한 편파적인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땄을 백인 교수에 대한 분노. 내 나라에 대한 역사도 확실히 꿰뚫지 못해 미국 수업시간에 제대로 내 나라를 변론하지 못한 제 자신에 대한 수치감.
정말이지 그로부터 약 이주일간은 밤이면 밤마다 억울함과 수치심으로 잠을 못 이뤘을 정도였습니다. 저는 과연 진정한 애국자일까요? 아니면 극우로 치부될 수도 있는 민족주의자일까요.
저도 잘 모르겠읍니다만,,, 한 가지 분명한건 저는 한국인의 전형이라는 것입니다. 그저 평범한, 어째보면 객관성을 지닌 중간자적 입장(Neutral Position)을 고수하려 노력하는 열린 가슴을 소유했다고도 자부하던 한사람의 인간입니다.
그러나,,, 과연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독자분들이 제 상황에 쳐했더라면 어땠을까요. 지금은 물론 피부로 느끼시지 못하므로, "이런 쫌 생 이 같은 작자야,,, 그러게 실력을 키우라니까,,,," 라며 핀잔을 주시는 분들도 계시리라 믿습니다.
하지만, 제가 분노하고 수치심을 느끼는 것이 과연 그 반 일본인 (Japanese Wannabe) 백인 교수의 수업 때문 만일까요. 아닙니다... 이것은 극히 단편적인 일례에 불과합니다. 그만큼 내나라 대한민국의 이미지는 실추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정부가 역사를 과장하여 가르치고 있다니요,,,, 이게 웬 마른하늘의 날벼락입니까. 혹자는 "아무래도 미국은 제 삼자이니까 한국이나 일본의 직접적인 역사공방 보다는 객관적인 사료와 견해를 가지고 있을 것이므로,,,한국정부가 과장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라고 하실 분도 계실지도 모르겠군요.
과연 그럴까요.
아닙니다. 그 교수는 아시아 정세와 관계, 역사의 모든 것을 일본서 공부했습니다. 중국에 몇 번 방문하고, 한국에 한번 세미나차 방문한 것이 일본 밖에서의 공부의 전부였습니다. 동남아 몇 개국을 관광했었다고도 하더군요.
이제 문제가 무엇인지 확실해 지십니까.
예,,, 당연합니다. 일본에서 일본인이 영어로 번역한 아시아역사를 공부한 사람인 것입니다. 당연히 일본 중심의 역사를 배우고 그걸로 박사학위를 딴 것입니다.
한 가지만 저의 사사로운 예상을 집어넣어 볼까요.
그 교수는 한국과 한국인을 싫어합니다. 왜냐구요. 자신이 공부하고 존경하고 사랑하는 대 일본에 항상 딴지를 걸고 시비를 거는 거의 유일한 나라이니까요.
하여간 저는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기말고사 전에 제출하는 10페이지짜리 에세이(리포트)에다가 주제 (동북아시아 중세문학) 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한국과 일본의 중, 근세 역사와 이해" 라는 제 나름대로의 리포트를 제출했습니다.
나름대로 남아있던 제 두뇌속의 지식을 총 동원하여 나름대로 객관적으로 기술했습니다. 한 가지 희망은 그 백인교수가 마지막 남은 백인 특유의 합리성과 객관성으로 제 리포트를 평가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저는 C- 라는 학점을 받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학점에 대해 전혀 분노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통쾌함을 맛보았습니다. C- 면 어떻습니까. 마지막 사명으로써 내 나라에 대한 조그마한 충성을 보였다고 생각했습니다.
비록 학점은 최하점을 받았지만은 (C- 면 거의 최하점입니다. D 나 F 는 한 클래스에 한두 명 있을까 말까.) 할말을 했다고 생각하니 학기 내내 괴롭히던 억울함이 어느 정도 가셔지더군요.
게다가 또 하나 다른 통쾌함이 다가왔습니다. 마지막 기말고사 문제에 예기치 않게 저의 리포트에 실려있는 내용을 발췌해 만든 문제가 두 문제 나와 있더군요. 과연 제가 제출한 리포트의 내용에 대해 다른 학생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 출제문제 형식을 벗어난 엑스트라의 두 문제,,,,,,
그 백인 교수는 자신의 Authority 와 knowledge가 도전받았다고 괘씸해 한 한편 과연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이 진실인지의 여부에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내 나라에 대한 저의 슬픔을 간략하게 정리할까 합니다.
첫째, 현 상황으로는 갑자기 고치기 힘든 문제입니다만,,, 한국학생들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고, 유학생들의 전공이 너무 한편으로 치우쳐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 경영이나 경제, 아니면 컴퓨터, 엔지니어링, 치과에만 편중돼 있다보니 순수학문계통엔 아예 전무한 상황입니다.
다른 나라 교수와 학생들이 대한민국을 자기네 맘대로 찢고 밟고 망가뜨려도 우린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유학생들의 전공이 심하게 편중돼있는 상황은 그렇다 치고, 재미동포의 자녀들은 좀 다릅니다. 사실 그 수업엔 한국말을 거의 못하는 동포학생들이 한 2-3 명 있었읍니다만, 그네들은 정말이지 아무런 사전 지식이 없는,,,,거의 백인 학생들과 같은 수준이라 안타깝습니다.
정작 영어에 능통하여 백인 교수들과 언쟁을 펼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한국 동포학생들은 영어능력에 비해 한국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이 전무한 상태니 어쩌겠습니까. 제일 슬픈 일은 그 동포학생들은 과연 백인 교수의 수업이 심히 편파적인지 아닌지 조차 모르고 그대로 학습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과연 그 동포학생들이 대한민국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을까요? 더욱이 그런 종류의 수업들을 상당수 들어가는 와중에 말입니다. 가질 수 없습니다. 그 학생들은 조국이 한없이 약하고 비열하다고만 믿을 것입니다.
둘째, 한 학기가 더 지나고 어쩌다 그 편파적인 백인 교수와 복도에서 마주친 적이 있습니다. 저를 알아보더군요. 신기하게도요. 하는 말이, 자신이 다음 학기에 대학원 과정인 아시아관계에 대한 리써치 세미나 수업을 하게 되었다면서 저에게 그 세미나 겸 수업에 참여를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유인즉슨, 자신을 비롯해 모든 교수들이 겪는 어려움이 무언고 하니, 일본과 중국에 관한 자료는 영어로 번역되어 연구할 수 있게끔 방대한 데이터가 있지만 한국에 대한 자료는 거의 구하기가 전무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역시 저로 하여금 수치심을 유발시키더군요. 하지만 이번만큼은 저도 할 말이 없더군요. 그게 현실이니까요. 도대체 한국에 있는 학자 분들은 무얼 하고 있는 겁니까. 제가 얼핏 들은 통계치에 의하면 일본 및 중국의 번역물은 홍수처럼 널려있는데 비해 한국의 번역물은 정말로 손으로 꼽을 정도라고 하는 그 수치스런 기사.
도대체 왜 이럽니까.
간단히 다시 말씀드립니다.
똑똑한 한국 학생들, 더욱더 많이 유학을 가야합니다. 유학생이 쓰는 비용이 막대하다고요,,, 구더기 무서워 장 담지마라는 어리석은 말입니다. 어떤 병신 같은 작자가 그따위 말이나 지껄이고 있으면서 금뱃지 달고 있습니까?
우물 안 개구리처럼 안 그래도 일본보다도 훨씬 적은 국토 반으로 나눠놓고 아웅다웅 하면 안 됩니다. 세계로 나와서 실정을 알아야 합니다. 국내에서 아무리 소리 질러 봐야 아무도 못 듣습니다.
그리고 학자 분들 최소한의 자료만이라도 제발 영어로 번역 좀 하세요. 쓸데없는 짓거리들 그만 하시고, 제발 좀 자료 좀 제공합시다. 외국 교수들이 공부를 하고 싶어도 읽을 책이 없다잖습니까.
뭐요? 걔들보고 한국말 배우라고 하라고요?? 이런 미친... 동해의 명칭이 이젠 거의 완전히 Japan Sea 로 바뀌었고 세계가 인정하지요? 이러다간 정말 독도도 뺏깁니다. 내말이 장난인거 같습니까?
저는 정말 슬픕니다.
조리 없는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To be continued,,,,,,,,,
제발 정신 좀 차리쇼.
정말 이런 일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너무 끔찍합니다.
박상익의 답 글
보미 님.
그 유학생의 울분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낯선 땅에서 조국의 역사에 대한 몰이해와 경멸을 당한 심정이 얼마나 참담하겠습니까?
그런데 역사란 것이 어쩔 수 없이 승자 또는 강자의 입장에서 서술되는 경향이 있더군요.
잘난 나라의 역사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서 그렇게 훌륭하게 되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기게 되고, 자연히 그렇게 훌륭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되지요. (이런걸 벤치 마킹이라고 하지요?) 그런 가운데 과거가 실제 이상으로 미화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기도 하지요.
일본을 보십시오.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 경제 대국 아닙니까? 게다가 전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인 적도 있습니다. 전쟁을 일으킨 것이 잘 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정도 군사 강국이라면 주변 국가에서 일본의 속마음을 진지하게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되지요. 실제로 우리가 독도 문제로 일본과 옥신각신하고 있지만, 군사전문가들에 의하면, 순전히 군사력만을 놓고 판단할 때, 일본 해군과 한국 해군이 맞붙으면 한국 해군은 백전백패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중국을 보십시오. 비록 19세기에 근대화에 실패한 역사적 경험을 갖고 있긴 하지만 인구가 15억에 달하고,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입니다. 땅덩어리는 얼마나 크며 지하자원은 또 얼마나 풍부합니까? (석유 매장량도 대단하죠?) 게다가 21세기 세계의 다크호스로 떠오르고 있는, 엄청난 잠재력을 보유한 국가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서양인들이 일본과 중국에 대해 경이로운 감정으로 접근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계를 경영할 파트너 내지는 경쟁자로서 그들에 대한 연구가 필수불가결하다는 인식이 있는 거죠.
합리성이 몸에 밴 그들이 현실적 (또는 잠재적) 강대 세력을 깊이 알아볼 생각을 왜 하지 않겠습니까?
중국의 4서 5경을 비롯한 고전 문헌들이 이미 19세기에 영어로 거의 완벽하게 번역이 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중국의 관료제에 관한 언급을 많이 했습니다만 그가 과연 자기 실력으로 한문을 읽고 그런 언급을 했을까요? 아닙니다. 이미 서양 세계에서 중국의 주요 문헌들이 서양어로 번역이 되어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막스 베버의 학문적 성취도 가능했던 거랍니다.
일본도 마찬가지랍니다. 하버드대학의 일본사 교수인 에드윈 라이샤워란 학자의 이름을 들어보셨는지요? 그는 미국인이지만 일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후 일본사 연구의 권위자가 되었고 한때 주일 미국 대사도 지낸 적이 있습니다. 일본이란 나라의 막강한 실력을 알고 있으니 그 나라의 실체를 연구하고자 하는 동기가 생기는 건 당연하지요.
미국 정부는 2차 세계대전 때 일본과 전쟁을 치르면서 루스 베네딕트라는 인류학자에게 일본인에 관한 연구를 의뢰했습니다. 적국인 일본인의 정체가 너무나 궁금했고, 적과 싸워 이기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를 알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물로 나온 것이 바로 『국화와 칼』입니다. 우리말로도 이미 번역되었죠.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을 아십니까? 일본을 무대로 한 것이죠? 그럼 『투란도트』도 아시겠군요. 물론 중국을 주제로 만들어진 오페라입니다.
그럼 한국을 주제로 서양인이 만든 오페라는? 당연히 없지요... (아, 『명성황후』요? 그건 우리가 자가발전한 거지요.)
그까짓 오페라 하나 없다고 서운해서 이런 말 하는 게 아닙니다. 그들의 관심에서 우리가 그만큼 멀리 떨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국제 사회에서 강대국들의 눈에 우리 자신이 어떻게 비쳐지고 있는지를 좀더 냉철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보미 님, 우리 이걸 한번 생각해 봅시다.
과연 한국 대학생들이 버마(미얀마) 역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인도네시아에 대해서는? 태국에 대해서는?
....
아마 아는 것이 전무(全無)하다는 표현이 적절할겁니다.
우리는 그 나라들을 별 볼 일 없는 나라로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바로 그 때문에 그 나라에 대해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는 것 아닐까요?
아까 인용하신 그 유학생은 한국 학자들이 영어로 번역을 많이 해서 서양 사람들에게 우리 역사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주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물론 당연히 그런 방법도 실행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스스로 국민적 역량을 키워서 그들로 하여금 우리 문화와 역사에 대해 알아볼 생각이 들게끔 만들어야 한다고 봅니다.
세계 무대에서 다른 나라들로부터 인정받고 주목받는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이 우선 실력을 갖춰야 합니다. 경제력만이 아니라 학문적 역량 및 사회 전반의 도덕성에 있어서도 최고 수준에 이르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저는 이런 의미에서 서양사학자로서 세계 인식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성취를 우리도 전폭적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우리 것으로 완벽하게 소화해 낼 때 우리에게도 소망이 있을 거라고 판단이 되는군요.
세계 인식 없이 세계 일류를 꿈꿀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이 땅의 젊은이들이 얼마나 진실한 노력을 많이 기울여야 할까요?
이 사회를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는 젊은이들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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