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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읽기

[독자와의 대화] 민족 문화와 외래 문화

by 안티고네 2001. 5. 12.
독자 nieel님이 질문을 해오셨습니다. 제 칼럼의 방향에 얼마간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이 있다고 판단되어, nieel 님의 질문과 저의 답변을 나란히 올리겠습니다.



nieel 님의 글.


"서양역사를 왜 읽어야 하는가"라는 제목의 칼럼 38호, 39호에서 서양역사에 관해 쓰실 책의 머리말을 올리신 것을 보았습니다. 두 회에 걸친 칼럼의 글에서 나타난 외래문화의 전래/수용/이식에 대한...(어떤 어휘를 쓰느냐도 중요하겠군요) ...박상익 님의 견해에 대해 제 생각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글이 칼럼의 주제와 얼마나 관련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박상익 님이 올리신 글에 대한 제 반응을 올리는 것을 박상익 님이 오히려 기다리실 것이라고...저 혼자.. 생각하고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민주주의는 외래문화인가, 한민족의 역사에는 민주주의적인 요소들이 있습니다. 단군신화에서 제기하는 '홍익인간'의 정신이 그러합니다. 국내외의 대통령 후보들은 21세기 선진국, 동북아의 중심국가 내지 강대국 반열 등 한결같이 power game의 승리를 주된 비젼으로 제시합니다. '弘益人間'에는 대결과 승패의 도식에서 벗어난 비젼이 담겨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그 비젼이 民本의 정신과 연결됨을 인정하는 것 역시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며 일어난 만적의 난 등 한국사의 구석구석에 포진하고 있는 민란들이 또한 그러합니다. 만적의 난은 벌써 고려시대에 신분제의 허구를 지적하고 이를 타파할 것을 주장했습니다.다른 민란 역시 통치행정체제의 모순을 조정/극복하려는 백성들의 적극적 무력행사였습니다. 가끔 쿠데타의 논리로 악용되었지만 맹자의 '易姓革命'은 세습군주체제가 백성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전복되어야 함을 뜻합니다. 맹자의 논리는 시기상으로 로크의 사회계약설보다 밀레니엄 이상 빠른 것이었습니다.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을 통해 신하가 왕에게 쓴 소리를 할 수 있는 言路를 열어두려 했었던 것이 또한 민주주의적 요소로 꼽힙니다. 民이 권력의 주인이 되는 것은 民의 의견이 소통되고 집행되는 정치체제를 결과합니다. 다시 말하면 민주주의는 여론이 자유롭게 형성되고 권력의 집행에 반영되는 것을 뜻합니다. 정책 결정과 집행에 있어서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가 사실상 전제왕권을 견제하고 정치이념인 유교적 법치주의를 확장하였던 조선시대 정치제도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우리나라 정치체제보다 훨씬 민주적인 면모를 보입니다. 우리의 정치적 전통이 전제주의라고 외양만 보지 맙시다. 정치권력의 정점인 왕위의 계승자(세자)를 책봉하는 문제까지 정치관료들과 왕, 왕실이 갈등과 대화를 통해서 풀었던 여론정치의 면모를 고려한다면, 우리 역사에서의 王은 서구의 중세시대, 절대주의 시대의 王과 다름을 인정해줍시다.

대학은 외래문화인가. 제가 정확히 아는 부분은 아니지만..(물론 다른 부분도 잘 아는 것은 아닙니다)..한국사에는 화랑도, 태학, 국자감, 성균관 등 여러 시대 여러 이름의 고등교육체계가 있었습니다. 오히려 르네상스시대 대학제도는 부유한 귀족자녀들만이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실질적으로 제한된 고등교육체계이었습니다. 고려, 조선시대에 고등교육체계 뿐만 아니라 서당 등 지방 교육기관이 잘 발달되어 있는 점을 통제의 사회화의 측면으로만 보기에는 좀 무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역사적인 측면에서 교육제도에 관해 서구와 우리를 비교한다면, 그 어느 심판도 쉽게 서구의 손을 들어줄 수 없는 것입니다.

박상익 님의 전공이 서양사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박상익 님이 서양사에 대해 갖고 있는 따듯하고 치밀한 시각을 예전에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이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축했던 각종 시스템에 대해서도, 국사에 대해서도 베풀어주시기 바랍니다. 제 짧은 시각으로는 서양역사를 배우는 것은 남의 것을 통해서 우리의 문화를 바로 보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긴 글 읽으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박상익 님의 interaction을 기다리겠습니다.


박상익의 답변.

묵은 칼럼을 일일이 들추시느라고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기독교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우리의 삶과 문화 전반에 관련된 일반적인 주제를 논의의 대상으로 삼아주신 것은, 저의 본래의 칼럼 개설 취지와도 잘 부합하는 듯하여 반갑고 감사합니다. 사실 제 칼럼은 본래 한 사람의 평신도로서 전공 학문이라는 <세속적 직업> 속에서 <신앙적 관점>을 관철시키자는 데 주안점이 있기 때문에, "오로지" 기독교, "오로지" 신앙만을 말하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때문에 칼럼을 운영하면서도, 차라리 <종교> 부문이 아닌 <인문/과학>으로 분류시킬 걸 그랬다 싶은 생각도 들곤 했던 참이었습니다. (종교 칼럼으로 분류가 되니까, 독자들의 요구도 그렇고 해서 자연히 운신의 폭이 좁아지더군요.) 저는 장차 nieel 님이 언급하신 방향으로 방향 전환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사상이 동양에도 일찍이 존재했다는 데 대해서는 김대중 대통령도 언급을 했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드리고자 했던 것은 하나의 <실천적인 정치 체제>로서, 그리고 <현실 이데올로기>로서 정착된 민주주의를 말한 것이지, 단순히 사상가, 철학자들의 머리 속에 존재했던 <사상으로서의 민주주의>, <관념으로서의 민주주의>를 말한 것은 아닙니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여성과 노예 계급이 배제되었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제한된 집단 내에서 거의 완벽에 가까우리만큼 직접 민주주의가 제대로 <실행>되었다는 점에서 고대사에서 참으로 기적적인 일로 생각합니다. (고대사를 읽으면 읽을수록 어떻게 그런 시대에 그런 역사가 가능할 수 있었을까 경탄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제도가 오래 간 것은 아니더군요. 기원전 5세기, 길게 봐야 불과 1세기를 넘지 못하는 기간 동안, 마치 암흑 속의 작은 섬광처럼 반짝했다가 그 후 2천 년 넘도록 칠흑같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습니다.

존 로크를 말씀하셨지요. 17세기 철학자로서 자유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이 자유주의란 것이 그저 막연한 자유를 말한 것이 아니고, 특정한 <역사적 맥락>이 있었습니다. 즉 그것은 부르주아 계급의 자유를 주장한 것이었습니다. 절대주의와 중상주의 하에서 간섭과 제재를 받고 있던 부르주아 계급에게 운신의 폭을 넓혀주어야 한다는 의미의 자유주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유주의에는 인구의 절대 다수를 점하는 평민(마르크스주의 용어로는 프롤레타리아)들이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자유주의의 <효시>이니 만큼 로크에게는 한계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즉 카톨릭 신도들에게는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프로테스탄트적인 편견(?)내지 독선이 있었던 것입니다. 요컨대 로크도 아직 다원종교사회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서유럽 사회에서는 그 후 19세기에 접어들어서 비로소 자유주의가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민주주의는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서유럽에서조차 대단히 부정적인 이미지를 풍기는 불온 이념이었습니다(80년대 우리나라의 주사파 정도 되겠죠?). democracy는 mob-rule(폭도들에 의한 지배)과 동의어로 간주되곤 했으니까요. 그러다가 19세기 중반 이후부터 민주주의란 말이 긍정적인 의미를 얻게 됩니다. 이 무렵부터 시작된 영국의 선거법 개정운동(1832년의 제1차 선거법 개정)은 1927년에 이르러 20세 이상의 성인 남녀에게 투표권을 부여함으로써 비로소 민주주의적인 정치 제도의 완성을 보게 됩니다(제5차 선거법 개정). 저는 이런 역사적 현실로서 구체화된 민주주의가 우리에게 있었는가 하는 점을 지적한 것입니다. 해방 후 우리가 갖게 된 민주 헌법은 아시다시피 일본 법률을 이식한 것이고, 일본 법률은 다시 독일 등에서 수입한 것이었지요. 우리의 전통 속에서 자생적으로 자라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 역사에서의 王은 서구의 중세시대, 절대주의 시대의 王과 다름을 인정해줍시다.>

서구, 정확히 말하면 서유럽에서, 중세의 왕이란 그야말로 이름 뿐의 존재였습니다. 물론 샤를마뉴 같은 황제 칭호를 얻은 인물도 있었지만, 샤를마뉴의 지배권도 그가 죽고 난 후 루이 경건왕 때까지는 이어졌지만, 루이 경건왕의 사후 세 아들에게 영토가 분할 상속되고, 형제간의 골육상쟁, 그리고 바이킹족, 마자르인, 이슬람 교도등의 외적 침입으로 이내 끝장나고 맙니다(9-10세기의 일이죠). 그 과정에서 봉건제가 정착됩니다만 이 봉건제 아래에서는 아시는 것처럼 왕권이 유명무실했습니다.

그 후 근대 초기에 국민적 군주국가가 등장하면서 특히 프랑스를 중심으로 절대왕정이 발달을 하지만, 우리는 이 "절대"란 말을 너무 "절대시"하면(?) 역사적 개념을 크게 오해하게 됩니다. 서유럽의 절대주의란 중세 봉건제에 비해 "상대적으로"(웃기죠?) 왕권이 강화되었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일 따름입니다. 17세기에 프랑스에서 루이 14세에 의해 절대주의가 절정에 달하긴 합니다만, 그것도 18세기에 들어 프랑스 혁명으로 끝장나고 맙니다. (영국은 16세기 튜더 왕조의 헨리 8세에 의해 절대주의가 시작되지만 17세기의 청교도 혁명과 명예혁명을 거치면서 일찌감치 의회주의가 확고하게 자리를 잡습니다.) 절대 군주, 그들은 결코 대단한 권력을 행사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나마 오래가지도 못했습니다.

여기에 비하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전제주의는 정말 전제주의답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정말 서양의 왕들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막강한 권력을 누렸다고 봅니다. 우리 역사에서 혁명이래 봤자 nieel님이 말씀하신 역성혁명이 고작 아니었습니까? 사상적으로야 어찌되었건, "역사적으로" 우리는 민주주의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었지요. 예수님도 말씀했습니다만, 말로만 이래라 하는 것과, 그것을 실천적인 결과로 나타나게 하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대학은 외래문화인가. 제가 정확히 아는 부분은 아니지만..(물론 다른 부분도 잘 아는 것은 아닙니다)..한국사에는 화랑도, 태학, 국자감, 성균관 등 여러 시대 여러 이름의 고등교육체계가 있었습니다.>

맞습니다. 언젠가 성균관대 장을병 총장이 TV 인터뷰에서 성균관 대학교가 조선 시대 성균관의 전통을 이었다고 하면서 한국 최고(最古)의 대학임을 자랑하더군요. 몸담고 있던 대학에 대한 애교심, 그 충정,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묻고 싶더군요. 과연 조선 시대 성균관과 지금의 성균관 대학교 사이에 "역사적 연속성"이 있느냐고 말입니다. 지금의 성균관대는 일제 때 명륜전문학교가 해방 후 변신한 것 아닌지요? 장소만 성균관 자리를 이어받았을 뿐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서양에도 고등교육기관은 아주 까마득한 옛날부터 있었습니다. 플라톤의 아카데미 학당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2500년 전의 일이죠. 그러나 서양 사람들은 그걸 대학이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제 칼럼에도 썼지만, 대학이란 12세기 유럽에서 처음 등장한 것으로, 당시 대학에는 이미 학사, 석사, 박사 등의 학위제도가 있었고 커리큘럼도 있었습니다. 하나의 효율적인 지적 탐구 및 교육 제도가 이 때 등장해서 오늘날까지 역사적 연속성을 가지고 내려오고 있습니다. (옥스퍼드 대학에선 200년 된 건물이 아주 새 건물 축에 든다고 하죠?) 그리고 일본, 중국, 한국의 대학은 모두 서양에서 발달된 대학 제도를 수입해서 정착시키고 있습니다.(마치 우리나라 헌법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13세기 파리 대학의 학생수가 해마다 7천 명을 헤아렸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우리나라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신입생 입학 정원이 1970년대 초만 해도 각각 1천명 미만이었습니다. (전교생은 4천명 미만이겠죠?) 13세기 프랑스의 인구를 고려할 때 중세 유럽 대학의 지적 파워가 얼마나 막강했는지를 실감하려면 역사학적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그 전통이 이어져서 수많은 노벨상 수상자들이 서구 대학에서 나오는 것이겠지요. 할 말이 너무 많아서 무슨 말을 어디에서 더 풀어나가야 할지 모르겠군요.


<박상익 님이 서양사에 대해 갖고 있는 따듯하고 치밀한 시각을 예전에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이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축했던 각종 시스템에 대해서도, 국사에 대해서도 베풀어주시기 바랍니다. 제 짧은 시각으로는 서양역사를 배우는 것은 남의 것을 통해서 우리의 문화를 바로 보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연합니다. 제가 서양사를 배워서 사대주의자 되려고 이 공부를 시작했겠습니까? 저는 언제나 마음속으로 한국사 전공자들과 대결 자세가 되어 있습니다. 그대들이 하는 공부와 내가 하는 공부 중 어느 것이 더 한국 사회의 발전에 기여를 하는가 두고보라고 말입니다. 저는 자신이 있습니다(!) 박정희 때부터 국사 교육 강화 정책으로 온갖 특혜를 누려가며 공부한 한국사 전공자들, 제가 볼 때, 그들은 21세기 한국의 미래에 이렇다 할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고, 또 유감스럽지만 앞으로도 당분간 그러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서양 역사를 긍정적으로 서술하니까 한국을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는 것 잘 압니다. 자국사, 물론 잘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자국사 교육은 언제나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좋게 말하면 민족주의, 나쁘게 말하면 국수주의에 빠져, 자민족의 우수성만을 뻥튀기 하면서 진실을 왜곡할 위험이 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민족주의가 과연 21세기 우리 민족에게 바람직한 것인가? 한양대 임지현 교수(서양사)가 쓴 <민족주의는 반역이다>를 보셨는지요? 민족주의가 우리의 미래를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것이 생각 있는 역사학자들의 일반적인 시각입니다.

역사도 하나의 학문이요, 과학입니다. 가능한 한 역사적 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말하고 글로 써야 할 것입니다. 자존망대에 빠져 우리가 세계사를 움직인 중심 국가인 것처럼 상상하다가는 황소 앞의 개구리처럼 큰일 날 수가 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사학자들이 이런 걸 조장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IMF 사태로 이미 혼난 적이 있지 않습니까?

결론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서양 역사 별 것 아닙니다. 그들이 세계 역사의 주역으로 떠오른 것이 그렇게 까마득한 옛날부터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빨라야 13세기경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들 사이에서도 주도권은 계속 변해왔습니다. 18세기에는 프랑스, 19세기에는 영국, 20세기에는 미국,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21세기에도 그 주도권이 서양에 독점되리란 보장은 없습니다.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나라도 세계사에 큰 몫을 할 날이 오겠지요. 그러자면 서양 문명이든 무슨 문명이든, 남의 문명의 좋은 점들을 우리의 장점과 결합시켜서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저는 그것이 아주 상식적이고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 서양 문명 자체가 외래 문화의 적극적인 소화를 통해 이룩된 것입니다. 게르만 족(그들이 오늘날 서양 문명의 중심이죠)이 그리스 문명, 로마 문명, 이슬람 문명 등을 창의적으로 받아들이고 발전시킨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불필요한 서양 콤플렉스 때문에 그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그리하여 우리의 미래를 도모할 수 있는, 아까운 기회를 놓칠, 아무런 이유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김대중 대통령 말대로 우리나라의 지금 상황이 19세기 말과 흡사합니다. 우리는 그때 분명히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절대로 실패해선 안됩니다.)

국수주의적인 관점에서 보면 기독교도 서양 종교, 외국 종교 아닙니까?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서양 종교로 보지 않고, 인류의 종교, 보편적 종교, 진리의 종교로 보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김교신 선생 같은 분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 <성서 위에 조선을>이란 모토를 내걸었던 것이고요. 이런 의미에서, 우리 역사의 발전과 진보를 위해서, 이용 가능한 모든 재원을 풀 가동하자는 것이 서양사 전공자로서 저의 기본 입장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nieel 이 무슨 뜻이죠? Curiosity kills a cat. 궁금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