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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 장치에 관심을 갖게 된 유럽인<<<
중세말기에 유럽인이 발명한 것 가운데 오늘날에도 우리의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만큼 널리 사용되는 발명품이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기계식 시계이다. 기계식 시계는 1300년경에 발명되어 그 후 널리 사용되었다. 시계가 처음 나왔을 때는 값이 너무 비싸서 일반인이 구입하기에는 힘들었다.
그러나 유럽의 각 도시들은 경쟁적으로 그 도시의 대표적인 공공 건물들에 정교한 시계를 가설했다. 이 시계들은 시간을 알려주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해·달·행성의 궤도를 보여주기도 했으며, 교묘한 기계 장치로 때를 알려주었다.
이 새로운 발명품은 궁극적으로 두 가지 중대한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첫째로 유럽인들은 이제 온갖 종류의 복잡한 기계 장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사실 이러한 기계에 대한 관심은 이미 중세 전성기에 물레방아와 풍차 등이 발명·보급됨으로써 확산된 바 있었다. 중세 전성기에 일어난 농업 기술 혁신의 한 부분인 물레방아와 풍차는, 제재(製材), 직조(織造), 착유(窄油), 맥주 양조, 철공(鐵工), 펄프 제조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어 유럽인들로 하여금 기계 장치에 대한 관심을 갖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계는 1650년경 이후 값이 저렴해지면서 사실상 유럽의 모든 가정에 비치되다시피 했던 까닭에 방아보다도 훨씬 흔한 물건이 되었다. 그리고 가정마다 비치된 시계는 신기한 기계 장치의 표본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독자들은 어린 시절 집안에 있는 기계식 시계를 뜯어보다가 망가뜨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당연히 부모님의 꾸중이 뒤따르게 되지만, 이런 경험들은 기계 구조에 대한 이해를 드높이는 계기가 되곤 한다. 18세기에 계몽사상이 유포되면서 이른바 기계론적 세계관이 확산되었을 때 유럽인들은 물리적 우주를 기계식 시계에 견주어 이해하기도 했다.
<<<일상생활을 합리적으로 만든 시계<<<
둘째로 더욱 중요한 것은 시계가 유럽인의 일생 생활을 합리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중세 말기에 시계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시간은 신축적인 것이었다.
사람들은 하루 중의 때가 언제쯤인지에 대해 막연한 개념만을 가지고 있어서, 대개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는 생활을 했다. 특히 농촌에 사는 사람들은 계절의 순환에 따라 각자의 업무에 종사하는 시간의 길이가 달랐다. 시간을 측정하는 경우라 해도, 각 계절마다 낮의 길이가 길고 짧음에 따라 길이가 다르게 특정되었다.
그러나 14세기에 접어들면서 시계는 밤낮의 구분 없이 엄격하게 규칙적인 시간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그 결과 시계는 전에 없이 정확하게 사람들의 작업 활동을 규제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정시"에 작업을 시작하고 끝내야 했으며, 많은 사람들은 "시간이 돈"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시간 엄수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사회와 경제의 효율성을 높이기는 했지만 동시에 새로운 긴장을 초래하기도 했다. 영국의 동화 작가인 루이스 캐럴(Lewis Carroll)이 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를 읽어본 독자들은 이 책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하얀 토끼를 기억할 것이다.
조끼를 입고 회중시계를 들고 다니는 이 토끼는 연방 "큰일났군, 아무래도 약속 시간에 늦겠어," "아이참, 늦어서 어쩌지?" 하면서 조바심을 친다. 하얀 토끼는 시간 약속에 집착하는 서유럽인의 특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시계 공업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상실한 스위스 <<<
시계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가기로 하자. 197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소매치기들이 가장 탐냈던 품목은 손목 시계와 만년필이었다. 이 또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한 소재이다. 오늘날 손목 시계나 만년필에 눈독을 들이는 소매치기는 더 이상 없는 것으로 보인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이제 시계는 더 이상 귀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년필은 이미 볼펜에 자리를 내 준지 오래되었다. 시계의 대중화와 관련하여 한 가지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있다.
시계 공업 하면 스위스를 떠올리던 때가 있었다. 사실 1968년에 스위스는 전세계 손목 시계 시장에서 65%의 매출과 80∼90%의 이익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후 스위스의 시장 점유율과 순이익은 모두 20%로 떨어지고 말았다.
1968년 당시만 해도 일본은 손목 시계 시장에서 시장 점유율이 전무했지만 지금은 정상의 자리에 올라 있는 것이다. 도대체 왜, 그리고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가? 그것은 모두 태엽식 시계보다 1,000배나 정밀한 전자 시계 때문이다.
놀라운 것은 이 획기적인 발명품인 전자 시계가 스위스 사람에 의해 발명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정작 그 발명자가 1968년에 그 새로운 시계를 소개했을 때 스위스의 주요 시계 제조 회사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시계 산업을 주무르던 기업인들은 그 아이디어를 그다지 인상깊게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특허권으로 그 아이디어를 보호하는 것마저 귀찮게 여겼다.
그러나 이 새로운 발명품에 대단한 관심을 보이는 두 회사가 있었다. 일본의 세이코(Seiko) 사와 미국의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exas Instrument) 사였다. 그 후 수만 명의 스위스 시계 기술자들이 해고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스위스의 시계 공업은 앞으로 스위스 경제에 대해 과거와 같은 커다란 기여를 하지는 못할 것이다.
전자 시계는 태엽, 베어링 등의 부품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오직 건전지의 힘과 전자 작용으로 작동하는 시계이다. 그렇다면 왜 스위스인들은 그와 같은 획기적인 현대적 시계를 먼저 발명하고서도 시계 공업에서 선두를 빼앗기게 되었는가?
그들은 방수가 되고 자동으로 태엽이 감기는 시계를 선보였다. 태엽식 손목 시계 분야에서 가장 앞서 있었던 그들이었지만, 과거에 성공한 것이 미래에도 성공할 것이라고 잘못 판단하고 있었으며, 그 판단은 분명 잘못된 것이었다. 물론 롤렉스(Rolex)와 같은 최고급 시계는 고가품으로서 항상 존속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세계 시계 시장을 주도하는 것은 아미트론(Armitron)이나 타이멕스(Timex) 같은 중간급 시계이다.
시계 공업이란 측면을 통해 20세기말이 얼마나 격변하는 시대였는가를 보았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갈 21세기는 그보다도 변화의 속도가 훨씬 빨라질 것이다. 역사란 근본적으로 "변화"에 관계하는 학문이다. 점점 변화의 속도가 빨라져가고 있는 세계 속에서, 역사학이란 진정 공부할 가치가 있는 학문이 아닐까?
<<<인쇄술의 발명<<<
활판 인쇄술의 발명 역시 획기적인 것이었다. 인쇄술이 발명된 중요한 계기는, 1200년에서 1400년 사이에 유럽의 책 만드는 재료가 양피지(羊皮紙)에서 종이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희귀한 가축의 가죽으로 만드는 양피지는 대단히 값이 비쌌다.
가축 한 마리에서 품질 좋은 양피지를 넉 장밖에 얻을 수 없었으므로, <성경> 한 권을 만들기 위해서는 무려 200마리 내지 300마리의 양이나 송아지를 도살해야만 했던 것이다!
펄프로부터 얻어지는 종이는 가격을 실로 극적으로 하락시켰다. 중세말기의 기록에 의하면 종이는 양피지의 6분의 1 가격에 팔렸다. 그러므로 읽고 쓰는 법을 배우는 데 드는 비용이 저렴하게 되었다. 문자 해독률이 점차 높아지면서 더욱 저렴한 서적을 요구하는 시장 규모가 커지게 되었고, 1450년경의 활판 인쇄술 발명은 이러한 수요에 충분히 부응했다. 노동력을 크게 절감시켜 준 이 발명은 불과 20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인쇄된 책의 가격을 필사된 책의 5분의 1로 하락시켰다.
책을 쉽게 구해볼 수 있게 되자 문자 해독률은 더욱 높아지게 되었고, 이제 책 문화는 유럽인의 생활 방식에서 일상적인 형태가 되었다. 1500년경 이후 유럽인은 모든 종류의 책들―종교 팜플렛뿐만 아니라 교본, 가벼운 읽을 거리, 그리고 18세기에는 신문―을 구입해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인쇄술은 사상의 신속·정확한 확산을 보장해 주었다. 더욱이 혁명적 사상은 일단 그것이 수백 권의 책으로 출간되기만 하면 더 이상 쉽사리 근절될 수 없었다.
그 결과 16세기의 가장 위대한 종교 개혁자인 루터(Luther)는 팜플렛을 인쇄함으로써 즉각 전 독일에서 추종 세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인쇄술이 없었더라면 루터는 후스처럼 죽임을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책의 보급은 또한 문화적 민족주의의 발전을 자극했다. 인쇄술 발명 이전에는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 내부에 지역 방언이 극심하여, 같은 언어를 말하는 국민들 사이에서도 의사 소통이 잘 안 될 정도였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정부의 중앙 집권화는 방해받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국왕의 신하가 지방의 주민들과 전혀 의사 소통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쇄술이 발명된 후에 유럽 각국은 나름대로 표준어를 발전시키기 시작했으니, 표준어는 책에 의해서 균일하게 유포되었던 것이다.
"표준 영어(King's English)"는 런던에서 인쇄되어 요크셔(Yorkshire) 또는 웨일즈(Wales)로 보급되었다. 그 결과 커뮤니케이션이 향상되었으며, 정부 기능의 수행이 좀더 효율적으로 될 수 있었다.
<<<기계 장치에 관심을 갖게 된 유럽인<<<
중세말기에 유럽인이 발명한 것 가운데 오늘날에도 우리의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만큼 널리 사용되는 발명품이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기계식 시계이다. 기계식 시계는 1300년경에 발명되어 그 후 널리 사용되었다. 시계가 처음 나왔을 때는 값이 너무 비싸서 일반인이 구입하기에는 힘들었다.
그러나 유럽의 각 도시들은 경쟁적으로 그 도시의 대표적인 공공 건물들에 정교한 시계를 가설했다. 이 시계들은 시간을 알려주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해·달·행성의 궤도를 보여주기도 했으며, 교묘한 기계 장치로 때를 알려주었다.
이 새로운 발명품은 궁극적으로 두 가지 중대한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첫째로 유럽인들은 이제 온갖 종류의 복잡한 기계 장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사실 이러한 기계에 대한 관심은 이미 중세 전성기에 물레방아와 풍차 등이 발명·보급됨으로써 확산된 바 있었다. 중세 전성기에 일어난 농업 기술 혁신의 한 부분인 물레방아와 풍차는, 제재(製材), 직조(織造), 착유(窄油), 맥주 양조, 철공(鐵工), 펄프 제조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어 유럽인들로 하여금 기계 장치에 대한 관심을 갖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계는 1650년경 이후 값이 저렴해지면서 사실상 유럽의 모든 가정에 비치되다시피 했던 까닭에 방아보다도 훨씬 흔한 물건이 되었다. 그리고 가정마다 비치된 시계는 신기한 기계 장치의 표본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독자들은 어린 시절 집안에 있는 기계식 시계를 뜯어보다가 망가뜨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당연히 부모님의 꾸중이 뒤따르게 되지만, 이런 경험들은 기계 구조에 대한 이해를 드높이는 계기가 되곤 한다. 18세기에 계몽사상이 유포되면서 이른바 기계론적 세계관이 확산되었을 때 유럽인들은 물리적 우주를 기계식 시계에 견주어 이해하기도 했다.
<<<일상생활을 합리적으로 만든 시계<<<
둘째로 더욱 중요한 것은 시계가 유럽인의 일생 생활을 합리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중세 말기에 시계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시간은 신축적인 것이었다.
사람들은 하루 중의 때가 언제쯤인지에 대해 막연한 개념만을 가지고 있어서, 대개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는 생활을 했다. 특히 농촌에 사는 사람들은 계절의 순환에 따라 각자의 업무에 종사하는 시간의 길이가 달랐다. 시간을 측정하는 경우라 해도, 각 계절마다 낮의 길이가 길고 짧음에 따라 길이가 다르게 특정되었다.
그러나 14세기에 접어들면서 시계는 밤낮의 구분 없이 엄격하게 규칙적인 시간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그 결과 시계는 전에 없이 정확하게 사람들의 작업 활동을 규제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정시"에 작업을 시작하고 끝내야 했으며, 많은 사람들은 "시간이 돈"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시간 엄수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사회와 경제의 효율성을 높이기는 했지만 동시에 새로운 긴장을 초래하기도 했다. 영국의 동화 작가인 루이스 캐럴(Lewis Carroll)이 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를 읽어본 독자들은 이 책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하얀 토끼를 기억할 것이다.
조끼를 입고 회중시계를 들고 다니는 이 토끼는 연방 "큰일났군, 아무래도 약속 시간에 늦겠어," "아이참, 늦어서 어쩌지?" 하면서 조바심을 친다. 하얀 토끼는 시간 약속에 집착하는 서유럽인의 특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시계 공업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상실한 스위스 <<<
시계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가기로 하자. 197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소매치기들이 가장 탐냈던 품목은 손목 시계와 만년필이었다. 이 또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한 소재이다. 오늘날 손목 시계나 만년필에 눈독을 들이는 소매치기는 더 이상 없는 것으로 보인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이제 시계는 더 이상 귀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년필은 이미 볼펜에 자리를 내 준지 오래되었다. 시계의 대중화와 관련하여 한 가지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있다.
시계 공업 하면 스위스를 떠올리던 때가 있었다. 사실 1968년에 스위스는 전세계 손목 시계 시장에서 65%의 매출과 80∼90%의 이익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후 스위스의 시장 점유율과 순이익은 모두 20%로 떨어지고 말았다.
1968년 당시만 해도 일본은 손목 시계 시장에서 시장 점유율이 전무했지만 지금은 정상의 자리에 올라 있는 것이다. 도대체 왜, 그리고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가? 그것은 모두 태엽식 시계보다 1,000배나 정밀한 전자 시계 때문이다.
놀라운 것은 이 획기적인 발명품인 전자 시계가 스위스 사람에 의해 발명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정작 그 발명자가 1968년에 그 새로운 시계를 소개했을 때 스위스의 주요 시계 제조 회사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시계 산업을 주무르던 기업인들은 그 아이디어를 그다지 인상깊게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특허권으로 그 아이디어를 보호하는 것마저 귀찮게 여겼다.
그러나 이 새로운 발명품에 대단한 관심을 보이는 두 회사가 있었다. 일본의 세이코(Seiko) 사와 미국의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exas Instrument) 사였다. 그 후 수만 명의 스위스 시계 기술자들이 해고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스위스의 시계 공업은 앞으로 스위스 경제에 대해 과거와 같은 커다란 기여를 하지는 못할 것이다.
전자 시계는 태엽, 베어링 등의 부품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오직 건전지의 힘과 전자 작용으로 작동하는 시계이다. 그렇다면 왜 스위스인들은 그와 같은 획기적인 현대적 시계를 먼저 발명하고서도 시계 공업에서 선두를 빼앗기게 되었는가?
그들은 방수가 되고 자동으로 태엽이 감기는 시계를 선보였다. 태엽식 손목 시계 분야에서 가장 앞서 있었던 그들이었지만, 과거에 성공한 것이 미래에도 성공할 것이라고 잘못 판단하고 있었으며, 그 판단은 분명 잘못된 것이었다. 물론 롤렉스(Rolex)와 같은 최고급 시계는 고가품으로서 항상 존속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세계 시계 시장을 주도하는 것은 아미트론(Armitron)이나 타이멕스(Timex) 같은 중간급 시계이다.
시계 공업이란 측면을 통해 20세기말이 얼마나 격변하는 시대였는가를 보았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갈 21세기는 그보다도 변화의 속도가 훨씬 빨라질 것이다. 역사란 근본적으로 "변화"에 관계하는 학문이다. 점점 변화의 속도가 빨라져가고 있는 세계 속에서, 역사학이란 진정 공부할 가치가 있는 학문이 아닐까?
<<<인쇄술의 발명<<<
활판 인쇄술의 발명 역시 획기적인 것이었다. 인쇄술이 발명된 중요한 계기는, 1200년에서 1400년 사이에 유럽의 책 만드는 재료가 양피지(羊皮紙)에서 종이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희귀한 가축의 가죽으로 만드는 양피지는 대단히 값이 비쌌다.
가축 한 마리에서 품질 좋은 양피지를 넉 장밖에 얻을 수 없었으므로, <성경> 한 권을 만들기 위해서는 무려 200마리 내지 300마리의 양이나 송아지를 도살해야만 했던 것이다!
펄프로부터 얻어지는 종이는 가격을 실로 극적으로 하락시켰다. 중세말기의 기록에 의하면 종이는 양피지의 6분의 1 가격에 팔렸다. 그러므로 읽고 쓰는 법을 배우는 데 드는 비용이 저렴하게 되었다. 문자 해독률이 점차 높아지면서 더욱 저렴한 서적을 요구하는 시장 규모가 커지게 되었고, 1450년경의 활판 인쇄술 발명은 이러한 수요에 충분히 부응했다. 노동력을 크게 절감시켜 준 이 발명은 불과 20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인쇄된 책의 가격을 필사된 책의 5분의 1로 하락시켰다.
책을 쉽게 구해볼 수 있게 되자 문자 해독률은 더욱 높아지게 되었고, 이제 책 문화는 유럽인의 생활 방식에서 일상적인 형태가 되었다. 1500년경 이후 유럽인은 모든 종류의 책들―종교 팜플렛뿐만 아니라 교본, 가벼운 읽을 거리, 그리고 18세기에는 신문―을 구입해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인쇄술은 사상의 신속·정확한 확산을 보장해 주었다. 더욱이 혁명적 사상은 일단 그것이 수백 권의 책으로 출간되기만 하면 더 이상 쉽사리 근절될 수 없었다.
그 결과 16세기의 가장 위대한 종교 개혁자인 루터(Luther)는 팜플렛을 인쇄함으로써 즉각 전 독일에서 추종 세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인쇄술이 없었더라면 루터는 후스처럼 죽임을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책의 보급은 또한 문화적 민족주의의 발전을 자극했다. 인쇄술 발명 이전에는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 내부에 지역 방언이 극심하여, 같은 언어를 말하는 국민들 사이에서도 의사 소통이 잘 안 될 정도였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정부의 중앙 집권화는 방해받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국왕의 신하가 지방의 주민들과 전혀 의사 소통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쇄술이 발명된 후에 유럽 각국은 나름대로 표준어를 발전시키기 시작했으니, 표준어는 책에 의해서 균일하게 유포되었던 것이다.
"표준 영어(King's English)"는 런던에서 인쇄되어 요크셔(Yorkshire) 또는 웨일즈(Wales)로 보급되었다. 그 결과 커뮤니케이션이 향상되었으며, 정부 기능의 수행이 좀더 효율적으로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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