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자"의 유래
월탄 박종화의 소설 <금삼의 피>는 연산군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이다. 이 소설 첫머리에는 왕비인
윤씨(연산군의 생모)와 후궁인 정씨(안양군의 생모)가 임금(성종)의 총애를 얻고자 막후에서 은밀하게 서로 경쟁하는 장면이 나온다. 두 사람이
본격적인 암투를 벌이게 된 계기는 정씨가 먼저 만든 셈이다.
정씨는 왕위계승자인 연산군을 음해하기 위해, 나무로 사람의 형상을 깎아
만들고 그 위에 옷을 입힌 다음, 눈과 귀와 코와 입을 그려 놓은 곳에다 뾰족한 바늘을 한 개씩 꼽아 놓았다. 그리고 중전을 음해하기 위해,
머리를 풀어 헤친 여인의 얼굴을 종이에 그려 넣고, 얼굴 그림 옆에 중전 윤씨의 생월 생일 생시를 궁체로 적어 차곡차곡 접은 다음, 그 위에
식칼을 얹어 작은 나무 상자에 넣었다.
그리고 나서는 아직 갓난 아이였던 연산군의 방 아궁이 부근에는 인형을 파묻고, 중전 윤씨의
방 굴뚝 밑에는 얼굴 그림을 파묻어 놓았다.
우여곡절 끝에 중전 윤씨가 나무 인형과 그림을 찾아냈다. 가만히 있을 윤씨가 아니었다.
은밀히 보복 조치가 취해졌다. 윤씨는 사람을 시켜, 조그만 밀실 벽에다 후궁 정씨와 그의 아들 안양군의 그림을 걸어놓고, 그 위에 생년월일을
적게 한 다음, 그림을 향해 활을 쐈다. 정씨의 얼굴과 가슴, 안양군의 눈과 허벅지 등에 화살이 꽂혔다. 모두 합해서 서른 여섯 개의 화살이
박혔다.
옆에서는 박수 무당이 목청을 돋우어 경을 읽고 북을 울리고 있었다. 정씨에게 직접 손을 대지 않고 정씨와 그의 아들
안양군을 병들어 죽게 만들자는 의식이었다. 이것을 우리말로는 "방자"라고 한다. 남이 못되기를, 또는 남에게 재앙이 내리기를 귀신에게 비는
짓이다.
이런 희한한 관습은 대체 언제부터 생겨난 것일까? 5백년 전 조선 시대에 처음 생겨난 것일까? 1천년 전 고려 시대에?
아니면 2천년 전 삼국 시대에? ―천만의 말씀! 까마득한 옛날, 기원전 2만년, 3만년 경부터 이런 일들은 행해지고
있었다.
지구상에 아직 문명이 등장하기도 전, 문자가 발명되기도 전인 후기 구석기 시대부터 이미 이런 의식은 실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크로마뇽인의 공감 주술
크로마뇽인(Cro-Magnon Man)은 후기
구석기 시대의 인류를 대표하는 종족이다. 이 종족의 이름은 남프랑스의 크로마뇽(Cro-Magnon) 동굴에서 유래되었다. 이 동굴에서 그들의
유물들이 다량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키가 크고 어깨가 넓었으며 직립보행을 했다. 남자들의 평균키는 약 183cm 가량이었다. 그들은
이마가 넓고 턱이 잘 발달되었으며, 현대인과 거의 같은 두개골 용적을 가지고 있었다.
크로마뇽인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흥미로운
점은, 그들이 식량 생산을 늘리기 위해 정교한 공감주술(共感呪術; sympathetic magic) 체계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공감주술이란
원하는 결과를 모방할 경우 그 결과가 현실로 나타나리라고 믿는 것이다. 조선 시대에 행해졌던 "방자"도 결국은 공감주술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크로마뇽인은 그들의 동굴 벽에다 순록의 사냥 장면 따위를 벽화로 그려 넣었다. 또 그들은 들소나 맘모스의 진흙 형상을 만들어
놓고는 그것들을 창으로 찔러 팔다리를 자르는 일도 했다.
그들은 그런 의식을 함으로써 그림에서 그려진 사냥감 동물들을 더 잘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그림이나 형상을 만들 때는 주술이나 축제가 함께 거행되었으며, 그러한 행사들은 그들의 사냥 활동이 진행되는 동안에
치러진 것으로 보인다.
왜 동굴 깊숙한 곳에 그림을 그렸을까?
크로마뇽인의 예술 중 가장 뛰어난
것은 동굴 벽화였다. 동굴 벽에는 그들의 재능이 실로 다채롭게 표현되었다. 그들은 특히 색채를 사용하는데 높은 안목을 보여주었다. 그들이 그린
그림은 매우 치밀하게 세부 묘사가 되어 있었고, 군중 장면을 묘사할 때에는 비례의 원리를 활용할 줄도 알았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자연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천재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동작을 표현하는 그들의 솜씨였다. 벽화에 묘사된 대부분의 동물들은
뛰어가거나, 도약하거나, 되새김질을 하거나, 궁지에 몰려 사냥꾼 앞에 마주 서있는 모습들이다.
그들은 움직이는 듯한 실감을 주기
위해 때로 기발한 기법을 사용하곤 했다. 동물의 다리나 머리가 움직인 흔적을 표시하기 위해, 마치 현대의 만화가들이 하듯이 윤곽선을 덧붙여 그려
넣는 방법이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아주 절묘하게 표현되어서 어색한 느낌을 전혀 주지 않는다.
동굴 회화는 원시 시대 인류의
정신 구조와 관련된 많은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준다. 크로마뇽인의 예술은 진정한 의미에서 미적 감각의 표현이었다. 크로마뇽인은 우아한
선과 대칭, 그리고 화려한 색채를 즐겼다. 몸에 그림을 그리고 문신을 새겼으며, 장신구를 착용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들이 창조한 예술 작품들의 일차적 목적이 결코 아름다움을 창조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현대의 우리와는 전혀 다른 동기에서 그와 같은 예술 작품을 창조했다.
크로마뇽인이 그린 그림 중 가장 작품성이
탁월한 것들은, 대개 동굴의 가장 어둡고, 가장 접근하기 힘든 벽이나 천장에서 발견된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니오(Niaux)에 있는
크로마뇽인의 그림들은 동굴 입구에서 무려 800미터 이상 깊숙이 들어가야 찾아볼 수 있다.
잠시 그 당시의 상황을 머릿속으로 상상해
보도록 하자. 당시 불을 밝힐 수 있는 유일한 연료는 동물의 지방질이었으므로, 그림을 그리거나 감상하기 위해서는 지글거리며 연기를 내는 횃불을
켜고, 어른거리는 흐릿한 불빛을 이용해야만 했을 것이다. 만일 그들의 목적이 현대의 예술가들처럼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것이었다면 그런 장소에
그림을 남겼을 리가 없다.
더욱이 남아 있는 증거로 판단하건대, 크로마뇽인은 일단 작품을 완성한 후에는 그들의 벽화에 대체로
무관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완성된 작품 위에 같은 형태의 또는 전혀 다른 형태의 그림이 겹쳐서 그려져 있는 경우가 수없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한가지 분명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그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완성된 작품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만드는
행위와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예술과 주술
그렇다면 크로마뇽인이 예술 작품을 창조한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그들의 예술 작품을 창조한 목적은, 분명 미적 감각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식량으로 쓸 동물의 공급을 늘리기 위한
것이었다. 예술가들은 심미가가 아니라 주술사였다. 그리고 그들의 예술은 사냥의 성공을 기원하기 위해 고안된 일종의 주술이었다. 크로마뇽인의
예술이 갖는 의의와 그들의 예술적 특성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크로마뇽인이 만든 위대한 벽화들의 주제가 왜 한결같이 사냥감인
동물들이었는지, 그리고 왜 이들 벽화에 식물과 무생물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지, 그 이유를 바로 여기에서 알 수 있다. 그것은 또한 크로마뇽인이
왜 완성된 그림에는 소홀한 채, 그것을 만드는 과정에만 주로 관심을 가졌는가 하는 이유를 알게 해준다.
그리고 작품이 동굴에서
접근하기 힘든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은 예술가들에게 종교적 동기가 있었음을 말해 준다. 당시에는 예술이 신성한 장소에서 행해지는
비밀스러운 행위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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