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근대사 깊이 읽기 (평점:
박상익 역 <뉴턴에서 조지 오웰까지> (푸른역사, 2004)
, 댓글:4, 추천:3)
갈대(
) 2005-04-05 11:33
이 책은 같은 출판사(푸른역사)에서 출간된 ‘호메로스에서 돈키호테까지’와 짝을 이루는 책이다. 원제는 ‘Perspectives In Western Civilization’이고, 미국의 역사가 윌리엄 L.랭어가 ‘호라이즌(Horizon)'지에서 엄선한 글들을 엮어서 책으로 펴낸 것이다(이 책에는 윌리엄 L.랭어가 쓴 글은 실려 있지 않다). 실린 글들은 필자도 모두 다르고 내용도 연관성이 없으며, 같은 책에 엮인 유일한 이유는 글의 배경이 되는 시점이 17세기에서 20세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국내에서는 최초라고 할 만한 독특한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원래 윌리엄 랭어가 엮은 책에 역자가 덧붙인 ‘본문 깊이 읽기’가 각 장의 말미에 실려 있다. 독특하다고 한 이유는 이런 구성 자체 때문이 아니라 ‘본문 깊이 읽기’의 분량 때문으로, 원래 책보다 덧붙인 부분의 분량이 더 많다. 주객이 전도되었다고도 할 수 있으며, 8백여 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은 이런 구성에서 기인한다.
파격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이러한 구성은 양날의 검과 같다. 독자들에게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면 좋겠지만,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쓸데없이 분량을 늘림으로써 가격을 올리고 원서를 훼손했다는 비난을 면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본문 깊이 읽기’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해당 장에 등장하거나 관련된 인물(절반 이상), 지명, 사물, 사건, 사상, 개념 등 그야말로 다양함을 지나쳐 잡다하기까지 하다. ‘본문 깊이 읽기’ 항목이 70개로 가장 많은 ‘사라예보의 총성으로 폭력의 시대가 열리다’ 장의 경우 본문은 19쪽인 반면 ‘본문 깊이 읽기’는 610쪽부터 654쪽까지로 무려 44쪽에 이른다. 따라서 이 책에 대한 평가는 원저와 더불어 ‘본문 깊이 읽기’가 얼마나 내용적으로 충실한 지, 그리고 독자들에게 얼마나 유용한 지 그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한 판단은 독자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나로서는 이러한 시도와 역자 및 편집자의 노고를 높이 평가하고 싶다. 필자가 아무런 설명 없이 가볍게 언급하고 지나가는 대목은 독자 역시 그것에 관해 모르더라도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열혈 독자라면 인터넷과 도서관을 뒤져서 관련 정보를 찾아낼 수야 있겠지만, 그렇게 하려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뿐더러 원하는 정보를 찾는다는 보장도 없고, 또 낯선 언어의 장벽에 가로막힐 가능성도 높다. 이 책의 역자는 우선 일차적으로 어떤 정보가 유용한 것인지 선별하고, 그렇게 선별한 정보를 찾고 정리하는 수고로운 작업을 대신 해준 것이다. ‘본문 깊이 읽기’는 문자 그대로 본문을 넘어서는 깊이 있는 읽기를 가능케 해주었으며 다른 책을 볼 때도 참고자료로서 도움이 될 듯하다.
이제(드디어!) 본문에 관해 얘기해 보자면, 무지한 나로서는 확인할 길은 없으나 책 서두에 실린 ‘옮긴이의 글’이 사실이라면 “이 책의 집필자들은 하나같이 해당 분야의 최고 수준 연구자들”이라고 한다. 모두 17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최고 수준’이라는 찬사가 빈 말이 아님을 입증하듯 필자들은 빼어난 글맵시로 짧은 분량 안에 풍부한 서술을 녹여낸다. 각 장의 주제는 익숙한 것에서부터 처음 접하는 생경한 것까지 다양하다. 물론 익숙하다고 해서 그 장의 내적 밀도가 다른 장에 비해서 떨어진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예를 들어 뉴턴, 찰스 다윈, 마르크스에 관한 장은 그다지 새로울 것은 없지만 주제에 맞게 핵심을 잘 요약하고 있다. 그렇지만 역시 이미 알고 있었던 것보다는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즐거움이 더 크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특히 흥미롭고 신선했던 장은 ‘18세기 유럽의 그랜드 투어’, ‘워런 헤이스팅스의 탄핵 재판’, ‘서양 근대사 최고의 엔지니어 브루넬’ 이렇게 세 장이었다.
‘18세기 유럽의 그랜드 투어’는 18세기에 유럽에서 널리 유행했던 귀족들의 호화판 여행을 흥미진진하게 풀어낸다. 북유럽과 동유럽의 귀족들은 로마문화에 대한 뿌리 깊은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었고, 18세기 들어 경제력이 풍족해지자 자제들을 이탈리아와 프랑스로 수년간 호화판 유학을 보내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그 결과 유럽의 귀족들은 문화적 공통분모를 가질 수 있었고, 아울러 계몽주의가 널리 퍼지게 되었으며, 이러한 배경은 프랑스 혁명의 배경으로 기능했다. ‘워런 헤이스팅스의 탄핵 재판’은 영국의 전 인도 총독이었던 워런 헤이스팅스가 인도에서 비인도적 통치를 했다는 이유로 받았던 재판의 드라마틱한 과정을 상세하게 묘사한다. 헤이스팅스는 결국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이 재판은 제국주의에 가해진 최초의 공격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깊다. ‘서양 근대사 최고의 엔지니어 브루넬’은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성격이었던 영국의 천재 엔지니어 브루넬의 일대기이다. 브루넬은 여러 분야에 능통했지만 특히 철도와 조선의 발전에 한 획, 아니 두 획을 그었던 19세기 최고의 엔지니어였다. 브루넬은 당시의 가장 빨랐던 철도보다 거의 두 배의 속력을 낼 수 있는 철도를 설계했으며 그가 감독하에 놓였던 철도는 지금도 쓰이고 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세 번 연달아 세계에서 가장 큰 배를 만들어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특히 마지막 배였던 ‘그레이트이스턴 호’는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을 잇는 해저 케이블 부설에 이용되었다(츠바이크의 ‘광기와 우연의 역사’에 해저 케이블 연결의 우여곡절이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고가의 가격이 부담스럽겠지만 이 책은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장정 상태도 여타 양장본보다 튼튼하거니와 무엇보다 책의 알맹이와 번역이 좋기 때문이다. 그리고 방대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오타나 편집상의 오류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본문 깊이 읽기’는 또 한 권의 책이라고 해도 될 만큼 옮긴이가 많은 정성을 쏟았다. 번역가로서가 아닌 필자로서의 박상익씨의 다음 저서도 기대가 된다.
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7787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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