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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읽기

『뉴턴에서 조지 오웰까지―서양근현대사 깊이읽기』

by 안티고네 2004. 8. 8.

2004년 9월 초에 출간될 『뉴턴에서 조지 오웰까지―서양근현대사 깊이읽기』의 '옮긴이의 글' 입니다. 분량은 약 800쪽이 될 것 같습니다. 좀 많죠? 하지만 재미 있어요. ^^ 

 

 

옮긴이의 글

 

이 책은 윌리엄 L. 랭어(William L. Langer)가 편집한 Perspectives in Western Civilization(2 vols.)의 2권을 옮긴 것이다. 이 책에는 모두 17개에 달하는 주제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는데, 각 장의 집필자는 하나같이 해당 분야의 최고 수준 연구자들이다. C. V. 웨지우드(C. V. Wedgwod), 플럼(J. H. Plumb), 피터 게이(Peter Gay), 헤럴드 니컬슨(Harold Nicolson), 앨런 네빈스(Allen Nevins), 버로우(J. W. Burrow) 등, 서양사 공부를 조금이라도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이름을 들어봤음직한 당대 최고 수준의 역사가들이 이 책의 필진으로 포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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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미덕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이 책에는 그 동안 우리나라에 거의 또는 전혀 소개되지 않았던 서양 역사의 중요 대목들이 상당수 소개되어 있다. 예를 들면 앨런 네빈스의 <워런 헤이스팅스의 탄핵재판>은 서양헌정사상 최초의 탄핵재판을 다루고 있다. 역사적 조건은 사뭇 다르지만 2004년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궜던 대통령 탄핵사태와 견주어 자못 흥미를 자아내는 주제가 아닐 수 없다. 인도 총독 헤이스팅스를 겨냥하여 휘몰아치던 탄핵 ‘열풍’이 일순간 탄핵 ‘역풍’으로 반전되어가는 사태의 추이는 마치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플럼의 <18세기 유럽의 그랜드 투어>는 오늘날 널리 성행하고 있는 관광여행의 효시가 된 유럽 귀족들의 호화판 여행 풍속도를 펼쳐 보이고 있다. 그러나 여행이야기라고 해서 얄팍한 흥미위주의 읽을거리로 지레짐작해서는 안 된다. 로마 제국의 지배를 통한 ‘고대의 영광’을 누리지 못한 영국인.독일인.러시아인.스칸디나비아인 등은 문화적 열등감(!) 때문에 ‘위대한 과거’를 지닌 프랑스와 이탈리아로 몰려갔고, 그 결과 서유럽.북유럽.동유럽에서는 남유럽 문화에 대한 열광적인 붐이 조성된다. 그랜드 투어는 단순한 여행문화에 그치지 않고, ‘계몽주의’를 전 유럽에 확산시키는 역할과 더불어 프랑스혁명의 배경으로도 기능하게 되었다.


롤트(L. T. C. Rolt)의 <서양근대사 최고의 엔지니어 브루넬>은 토목.기계.조선.철도 공학 부문에서 역사상 전무후무의 업적을 달성한 한 천재적 엔지니어의 파란만장한 삶의 역정을 보여준다. ‘최고 수준의 완성도를 이룩하는 엔지니어’가 되고자 했던 브루넬은 진정한 의미의 ‘장인(匠人)정신’이 무엇인지를 온 몸으로 말해준다. 상업적으로는 실패했으나 공학적으로는 놀라운 승리를 거둔 브루넬의 생애는 성공을 갈망하는 이 시대 젊은이들이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모델이 아닐까? 한 인물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관 뚜껑에 못이 박힌 후에 이루어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책의 두 번째 미덕은 기왕에 국내 학계에 알려진 주제일지라도 기존의 시각과 다른 관점에서 참신한 해석을 내놓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월터 카프(Walter Karp)의 <미래와 과거를 내다본 야누스의 과학자 뉴턴>은 뉴턴의 생애와 과학적 업적이 갖는 역사적 의의를 예리한 안목으로 통찰하고 있다. 역자는 이 장을 번역하기 위해 국내에서 최근 출간된 뉴턴에 관련된 단행본을 몇 권 구해 읽었지만, 한 장(章)에 불과한 이 글이 단행본 여러 권을 합친 것보다 훨씬 더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뉴턴의 유일신 종교가 만유인력 발견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대목을 읽으면서 필자의 탁견에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해럴드 니컬슨의 <로만주의의 반란>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정의내리기 쉽지 않은 로만주의의 핵심 국면을 대단히 요령 있게 설명하고 있다. 콜리지와 워즈워스를 최고의 로만주의 시인으로 지목한 니컬슨은 로만주의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을 ‘개인주의’라고 규정짓는다. 삶과 예술에서의 인간개성의 해방이야말로 로만주의자들이 물려준 가장 소중한 유산이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개성’의 가치가 소멸되지 않는 한 로만주의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웨지우드의 <네덜란드 공화국의 황금시대>는 17세기―하멜이 제주도에 표류하던 바로 그 무렵―네덜란드의 번영을 탁월한 필치로 서술하고 있다. 좁은 면적에 좋은 조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유럽 귀퉁이의 이 나라가 어떻게 그토록 막대한 부를 거머쥐고, 그토록 다양한 분야에서 찬란한 문명을 창조할 수 있었는지를 일목요연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강소국(强小國)이 21세기 대한민국이 추구할 목표라는 데 동의한다면 반드시 읽어둘 가치가 있는 글이라 하겠다.

 

지금까지 이 글을 읽은 독자라면 짐작했겠지만, 이 책의 세 번째 미덕은 역사읽기의 감흥(感興)을 맛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다. 생각건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이미 다양한 종류의 역사 개설서들을 접한 경험을 갖고 있을 것이다. 중.고등학교의 각종 세계사 교과서를 비롯하여, 시중에 나와 있는 다양한 서양사 개설서가 여기에 속한다. 그러나 학창 시절 접하게 되는 이러한 개설서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방대한 역사 지식을 제한된 분량 속에 담아야 하는 관계로, 어쩔 수 없이 수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극도로 압축시켜 단순화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결과 역사는 끝없이 추상화되어, 마침내 수많은 고유명사들이 지루하게 등장하는 무미건조한 문자의 나열로 전락하고 만다. 인간의 과거를 다룬다고 하는 역사에서 사람 냄새라곤 도무지 맡을 수 없는 역설적인 상황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 결과 수많은 독자들이 넌덜머리를 내며 역사로부터 영영 눈길을 돌려버리고 만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것이 우리 주변에서 흔히 목격하는 현실의 한 단면이다.


 

여기 독자들 앞에 소개하는 이 책은 수박 겉핥기에 머무르고 있는 기존의 상당수 개설서들과는 분명한 차별성을 보여준다. 근대 초기에서 현대에 이르는 서양 역사의 중요한 국면들을 전문 학자들이 심도 있게 파고들어, 독자들로 하여금, 뿌연 회색의 이론이 아닌,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역사읽기의 참 맛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종래의 역사읽기 방식에 도저히 만족할 수 없는 독자들은 개설서를 잠시 접어두고 이 책을 먼저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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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는 이 책을 독자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역자 한 사람만의 능력으로는 포괄할 수 없는 수많은 다양한 주제들을 우리말로 완벽하게 옮겨 낸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특히 과학․기술 분야 등 역자의 전공에서 벗어난 주제들은 번역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역자는 난해한 대목에 부딪힐 때마다, 그 부분을 번역하기에 앞서 해당 분야의 이용 가능한 자료를 모조리 입수하여 섭렵하는 등, 제대로 된 번역물을 독자들에게 선보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역자가 보기에 대중성이 떨어진다고 판단되는 부분은 과감히 삭제했고 또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는 원문에 없는 내용을 임의로 추가하기도 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부분적으로 ‘편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울러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옮긴이 주’를 가능한 한 자세하게 붙이고 원서에 없는 그림 자료들을 추가하여 주 자체만으로도 읽을거리가 되도록 했다.

 

역사 지식 대중화에 대한 남다른 열정으로 한 길을 걸어가는 푸른역사 박혜숙 대표님과 이 책의 편집에 각별한 정성을 기울여 준 이근영 과장님께 감사를 드린다.

 

                                      2004년 8월

 

                                     옮긴이  박상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