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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읽기

[노성두교수]한국 재외공관의 부끄러운 과거

by 안티고네 2005. 4. 8.

아버지를 들쳐 업고 달렸다. 대학병원에 도착하니 이미 숨이 멎은 상태.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응급 의사가 곧바로 처치에 들어갔다. 피를 말리는 순간이 지나고, 이제는 환자가 안정적인 상태라는 말을 듣고 비로소 가슴을 쓸어내렸다.

늙으신 아버지가 독일을 방문하신 것은 순전히 내 탓이 컸다. 서양미술사를 공부한답시고 유학 십년이 가깝도록 엉덩이 붙이고 앉아서 얼굴 한 번 비치지 않자, 답답한 심정에 직접 비행기 타고 찾아오신 것이었다. 며칠 시내 구경을 하고 쾰른 대성당도 보면서 건강하게 관광을 다녔는데, 갑자기 아침녘에 아버지가 심한 복통을 호소하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정신을 잃으셨다. 병원에서 급성 담낭염과 무슨 합병증이 겹쳤다는 진단이었다. 입원 후에는 무려 40년 전에 완치되었던 척추 결핵까지 재발병하는 바람에 입원이 장기화되었다. 아들내미 얼굴 보러 왔다가 하루아침에 말도 안 통하는 독일 땅에서 장기 입원환자가 되셨으니, 무척 답답하셨을 것이다. 고령에다 대수술을 여러 차례 받으시면서 아버지의 체중은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두 달 가까이 쾰른 대학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고 있는데 하루는 웬 아주머니가 얼굴을 내밀었다. 보험증이 없는 환자로 등록되어 있는데, 치료비를 감당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고개를 저었더니, 아무 걱정 말라고 위로하면서 환자 본인은 65세가 넘었고, 보호자는 수입이 전혀 없는 유학생 신분이니 독일 적십자사에서 제공하는 공짜 보험증 발급대상이라는 설명이었다. 무료 보험증을 제시하면 대학 병원뿐 아니라 독일의 모든 의료기관에서 전액 무료로 치료받을 수 있다고 했다. 심지어 환자 이송용 특수 택시비용까지 영수증 처리할 수 있었다. 세상에 이런 제도가 다 있구나 싶어서 기쁘면서 놀랐다. 하늘에서 튼튼한 동앗줄이 하나 내려왔구나 싶었다. 인상 좋은 그 아주머니는 알고 보니 대학병원 같은 대형 의료 시설에 파견되어 일하는 의료 복지사였다.

서류에 이것저것 기입하고 있는데, 아주머니가 한 마디 덧붙였다. 우리 경우에는 환자가 외국인이기 때문에 첨부할 서류가 하나 더 있는데, 대사관에 좀 다녀와야 한다고 했다. 독일 주재 한국대사관은 본에 있다. 쾰른과 지척거리인데다 전철로도 연결되어 있어서 한 나절이면 갔다 올 수 있었다.

대사관에서 받아야 할 서류는 이런 것이었다. 현재 병원에 입원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가 무료 의보 대상자이므로 독일 적십자에서 치료비를 전액 부담하려고 한다. 그런데 자국민 보호에 일차적인 책임이 있는 주독 한국대사관에서 “우리나라 사람이 독일 여행 와서 병이 들었는데, 치료비를 왜 당신네들이 내느냐? 우리가 부담하겠다.” 하고 뒤늦게 문제 삼으면 곤란하기 때문에 한국대사관에서 차후 그런 문제를 제기할 의향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대사관에 가는 발걸음이 어쩐지 망설여졌다. 그래서 한국대사관에서 우리 아버지 치료비를 부담하는 일은 결코 없을 텐데, 정말 그런 서류가 꼭 필요한지 복지사 아주머니에게 진지한 표정으로 물어보았다. 필요하다는 대답이었다. 모잠비크나 잠비아 사람이 독일에서 여행을 하다가 입원을 했을 때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며, 일종의 요식 서류일 뿐이니 걱정 말고 얼른 다녀오란다.

나는 개운한 기분으로 쾰른에서 본으로 달려갔다. 우리는 책임 못 지니, 당신네들이 대신 책임지기 바란다는 서류는 아무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대사관에서 돈 드는 일도 아니고 도장만 찍으면 되니까 무척 간단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입원 탓에 만약 보험처리가 안 될 경우 병원비와 수술비와 검사비가 모두 2000만원(당시 4만 마르크) 가량이나 되었다.

그런데 미리 전화로 약속한 영사는 간 곳 없고 썰렁한 표정의 대사관 말단 직원이 나와서는 대뜸 그런 도장 못 찍어준다고 했다. 결국 그해 가을과 겨울에 나는 본 소재 한국 대사관을 여남은 차례나 오락가락하면서 허탕을 쳐야 했다. 대사관에서는 그런 도장을 찍어준 선례가 없고, 더군다나 자국국민을 보호하지 못한다는 것을 서류로 남기는 것이 나라 망신이기 때문에 절대 해줄 수가 없다는 해명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물어보았다. “나라 망신 안 되게 자국국민 도와주면 되지 않겠어요?” 그랬더니 자네가 한국에서 돈 마련해서 갖다내고 병원비를 처리하면 의료 복지사에게 우리 대사관에서 다 알아서 해결했노라고 이야기를 해줄 수는 있단다. 시종 고압적인 영사의 이마를 한 대 갈겨주고 싶었지만, 유학생활 종치는 일이 생길까봐 혼자 울분을 삭히면서 나왔다.

쾰른 대학병원 복지사 아주머니는 내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대사관에서 그런 확인서 발급하는 것이 왜 나라망신이 되는지 납득할 수 없다는 눈치였다. 체면을 다락같이 여기면서도 책임은 한 터럭만큼도 질 수 없다는 재외공관의 이중적인 가치 기준을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었다.

무료 보험증을 발급받지 못하면 퇴원도 불가능했다. 결국 우리는 꾀를 내기로 했다. 전화를 걸기로 한 것이다. 복지사 아주머니가 본 대사관의 영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나라 영사는 알다시피 독일어가 그리 능숙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쪽에서 웬 아줌마가 사나운 말투로 마구 쏘아대자, 그쪽에서 당황하기 시작했다. 의료 복지사가 단도직입적으로 “한국 대사관에서 돈 낼 거냐?” 하고 묻는 질문에 대해 그쪽에서 더듬거리며 “우리는 돈 못 낸다.”는 대답을 했다. 복지사 아주머니는 나에게 눈을 찡긋해보였다. 드디어 숙제를 해결한 것이다.

우리는 영사와의 전화 내용을 녹취한 테이프를 서류에 붙여서 제출했다. 그리고 2000만원을 쾰른이 소재한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정부로부터 지원을 받게 되었다. 여행 오셔서 병치레만 하다가 체중이 반쪽이 되어서 초췌하게 귀국하시는 아버지를 배웅하러 나갔는데, 아주머니도 공항에 나왔다. 한국대사관의 ‘나 몰라라’ 태도와 좋은 비교가 되었다.

80년대 후반에 겪은 일이 지금도 생생하다. 나는 이런 일이 십수 년 전, 독재정권시대에나 있는 일인 줄 알았다. 그런데 요즘 동남아나 모스크바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면 지금도 사정이 그리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얼마 전, 노 대통령이 신림동 쪽방의 빈민 가정을 방문해서 앞으로는 정부에서 ‘찾아가는 복지’를 약속했다고 한다. 지금 우리나라 살림살이가 독일의 80년대보다 크게 뒤처지지는 않은 것으로 안다. 가령 동남아에서 온 외국인이 숨이 넘어가는 위급한 상태로 무슨 대학병원 응급실에 실려 갔다고 치자. 응급처치는커녕 접수조차 거부당할 가능성이 클 것이다. 설령 입원치료를 받는다 쳐도, 병원 원무과에 무료 의보증을 제공하는 ‘찾아가는 복지사’가 존재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한 마디로 부끄럽다. 부끄럽지만 털어놓아야 할 이야기들이다. 반성과 고백은 쓴 약과 같지만,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는 기적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런 바램은 나만의 것이 아닐 것이다. 우리 재외공관에서도 이런 부끄러운 이야기들을 많이 털어놓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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