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쥔장 서평

21. 이념을 뛰어넘은 우정 <김교신전집>

by 안티고네 2018. 6. 6.

이념을 뛰어넘은 우정

 

한국 기독교의 암흑시대로 불리는 1930년대에는 신·구교를 막론하고 대부분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신앙과 민족에 등을 돌렸다. 무교회주의자 김교신(金敎臣, 1901~1945)은 이 엄혹한 시절 주기철 목사 등과 더불어 끝까지 신앙의 지조를 지킨 몇 안 되는 기독교 지도자 중 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1945425, 그토록 기다리던 광복을 넉 달 앞두고 흥남에서 44세의 아까운 나이에 병사하고 말았다.

김교신의 장례식에서 우인(友人) 대표로 분향한 인물은 한림(韓林, 1900~?)이었다. 김교신과 한림은 도쿄 유학 시절부터 막역한 사이였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절친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한림도 당연히 기독교 신자이겠거니 생각할지 모르지만, 뜻밖에 그는 공산주의자이자 독립운동가였다.

김교신이 도쿄고등사범학교(요즘 한국으로 치면 서울대 사범대)에 다니면서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 문하에서 성서를 공부하던 무렵, 한림은 와세다 대학에 다녔다. 한림은 1928년 조선공산당 일본총국 책임비서를 맡던 중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193010월 경성지법에서 징역 46월의 중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뒤, 19339월에 만기 출옥했다. 일제가 주목한 거물급 공산주의자였다. 철저한 마르크스주의자인 그는 이른바 ML(마르크스-레닌 당) 사건의 주모자로서 형기를 마친 후 석방된 것이다.

<김교신 전집> 5권 <일기>에는 김교신이 19339월 초순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소하는 한림을 마중 나가는 장면이 나온다. 김교신은 형무소에서 나오는 한림의 태도가 너무나 당당하고 희망에 부풀어 있어 감탄을 금치 못한다. 김교신의 눈에는 유물론자 한림의 당당한 모습한국 기독교인들의 왜소한 모습이 너무나 대조적으로 비쳤다.

그는 이날 <일기>한림 군을 백두산의 거목(巨木)이라면, 오늘의 기독신자 대다수는 고층건물의 옥상 분재(盆栽)에 불과하다고 썼다. 신념에 목숨을 건 사회주의자 한림의 당당한 기개에 견주어, 일제에 무릎 꿇은 1930년대의 한국 기독교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당시 김교신은 일제의 극심한 검열과 탄압으로 발행하던 월간잡지 <성서조선>이 여러 차례 폐간의 위기에 몰리는 등 심한 고초를 겪고 있었다. 1934912일자 일기에는 한림이 보낸 편지가 실려 있는데, 한림이 김교신의 한결같은 신앙에 경탄하는 장면이 나온다.

 ()은 지난 7월은 꽤 다난다망(多難多忙, 어려움이 많고 매우 바쁨)했던 모양이구나. ?성서조선?의 속간(續刊, 간행이 중단되었던 신문이나 잡지 따위가 다시 계속하여 간행됨) 허가는 잘 됐네. 늦은 대로 축하하네. ?성서조선?의 속간에 축의를 표하는 일에 군은 약간 의외일지 몰라. ‘무신론자인 내가 종교 잡지의 속간을 기뻐하다니라고. 물론 이런 면으로 보면 이는 모순이다. 그러나 내가 축하하는 이유는 딴 데 있다. 설명할 것도 없이, 군의 생애의 사업으로 전 생명을 투입하는 군의 의지 또는 정신을 생각하고서 하는 축하다. 아 군이여, 철저! 종시일관(終始一貫)! 확호부동(確乎不動)!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 오늘 같은 비상시에 있어서. 발분하기 바란다.”

 김교신이 온힘을 다하여 발행하던 월간 신앙잡지 <성서조선>이 폐간을 면하고 계속 간행할 수 있게 된 것을 축하하는 편지였다. 한림은 김교신의 철저하고 시종일관한 삶에 대한 경의를 표한다. 편지를 받아 읽은 김교신의 두 뺨에는 감격의 눈물이 흘러내린다. 밖으로는 폐간을 위협하는 일제 당국의 탄압이 극심해지고, 안으로는 무교회주의자란 이유로 기독교회로부터의 조롱과 핍박이 있던 시기에, 엉뚱하게도 유물론자의 격려를 받게 된 것이다. 김교신은 한림으로부터 큰 위로를 받고 일기에 이런 감회를 남겼다.

 모든 기독신자가 무시하고 동인들까지 조롱할지라도 대표적 유물론자 한 사람의 지지가 있으면 족하다. 소위 과격주의자한 사람에게 읽히고 그 비판을 받기 위하여 <성서조선>지는 발간하여야 하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이한 것은 하나님의 의지이다. 무신론자와 함께 주를 찬송하니 비통한 찬송이다.”

 그로부터 6년의 세월이 흘렀다. <성서조선>이 또다시 폐간의 위기에 몰렸던 19406, 김교신은 한림의 집에 초청받아 격려의 말을 듣는다. 김교신의 일기를 들춰본다.

 “1940619(). 저녁에 한림 형 댁에 부름을 받아 여러 시간 유쾌한 대화를 나누다. 형은 본래 ML(마르크스-레닌)당 사건의 거두(巨頭)지만, 나의 근래의 심경을 가장 깊이 통찰하여 머뭇거릴 때가 아니라며 책망하다시피 독촉함을 받았다. 주의와 사상을 위하여 목숨을 던져본 경험을 가진 사람인지라, 그 심지가 비열하지 않음이 존경스럽고 사랑할 만하다(可敬可愛). 기독교 신자가 안 한다면 자기가 뒷일을 돌봐 줄 터이니 전진하라고. 신앙의 세계와는 별천지로 의기(意氣)의 세계가 따로 있음을 발견하다.”

 기독교 신자들이 김교신을 돕지 않는다면 내가 돌봐주겠으니 끝까지 신앙의 길을 가라고 유물론자가 격려했다는 말이다. 이념은 달라도 조국을 향한 단심(丹心, 정성스러운 마음)을 피차 인정하기에 이런 뜨거운 우정이 가능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우정은 한국 현대사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념을 뛰어넘어 두 거인을 끈끈한 동지애로 맺어준 장()의기의 세계였다. 조국이라는 공적 영역에서 만난 두 거인의 장한 기개가 좌우의 이념을 뛰어넘는 민족 통합을 이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