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쥔장 서평

22. 파란색은 어떻게 모든 이의 사랑을 받게 되었을까 <파랑의 역사>

by 안티고네 2018. 7. 9.

파란색은 어떻게 모든 이의 사랑을 받게 되었을까

미셸 파스투로 지음, 고봉만 옮김, <파랑의 역사>(민음사, 2017)

 

고대 로마인이 사랑한 색은 빨간색이었다. 빨강은 황제의 색이기도 했다. 반면 청색은 로마인에게 켈트족과 게르만족 같은 야만족의 색이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BC 100-44)는 이 족속들이 적에게 겁을 주기 위해 몸에 파란색을 칠하는 관습이 있다고 기록했다.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BC 43-AD 17)는 게르만족이 나이가 들면 흰머리를 짙은 색으로 물들이기 위해 대청으로 염색을 했다고 전한다. 그러므로 로마인에게 청색은 경계하고 멀리해야 할 색이었다. 청색 옷을 입는다는 것은 품위가 떨어지는 일이었다. 파란색은 흔히 죽음이나 지옥을 연상시켰다. 로마인은 켈트족과 게르만족의 파란색 눈마저도 추하게 여겼다.

 

서양에서 빨간색은 고대부터 높은 지위를 누렸다. 하지만 12세기 이후 파란색에 대한 태도는 근본적인 변화를 겪는다. 유럽에서 파란색의 가치 상승은 11세기에서 12세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예술 분야, 특히 성화들에서 나타났다. 특히 성모 마리아를 그린 성화에서 파란색을 사용한 것은, 12세기부터 파랑을 색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색으로 여기게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옷과 스테인드글라스에서 청색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도 12세기부터였다.

 

흔히 중세전성기(High Middle Ages)로 알려진 12, 13세기는 가톨릭교회에서 마리아 경배가 본격화된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 나타난 청색에 대한 새로운 호의적 관심은, 그 무렵부터 가톨릭교회의 확고한 관행으로 굳어지기 시작한 마리아 경배에서 비롯된 것이다. 12세기 말에서 13세기 초에는 프랑스의 루이 9, 잉글랜드의 헨리 3세와 같은 권력자들이 성화 속의 마리아를 모방하여 청색 의상을 입기 시작했는데, 이런 일은 반세기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청색은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앙심과 왕과 귀족의 권력을 동시에 상징하게 되면서 모든 색 중 최고의 색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제 파란 색은 더 이상 야만과 죽음의 색이 아니라 신성함과 고귀함을 뜻하는 색이 되었다. 유럽사에서 파란 색의 역사는 가치관과 감성의 미학적 반전을 보여주는 역사이기도 하다.

 

파란색은 18세기에 다시 한 번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다. 새롭게 형성된 색의 상징체계에서 파란색이 진보의 색, 빛의 색, 꿈과 자유의 색으로 인식되면서 위치가 확고해진 것이다. 여기에는 낭만주의, 미국혁명, 프랑스대혁명의 영향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먼저 문학이 파란색의 유행에 미친 영향을 유의해 볼 필요가 있다. 1774년 괴테가 발표한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주인공 베르테르는 파란색과 노란색 옷을 입었다. 이 소설의 대대적인 성공과 더불어 생성된 베르테르 붐은 전 유럽에 베르테르식 파란색 의상을 유행시켰다. 유럽의 많은 젊은이들이 사랑에 빠져 절망에 허덕이는 베르테르를 흉내 내어 파란색 연미복에 노란색 조끼를 맞춰 입었다. 물론 괴테는 1770년 전후 독일에서 청색이 유행하고 있었기에 주인공에게 청색 옷을 입힌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괴테의 소설이 이러한 유행을 부채질하여 전 유럽에 확산시키는데 크게 기여한 것은 분명하다.

 

독일 낭만주의의 파란색은 아프리카 풍 미국음악 장르인 블루스(the blues)’와도 연결된다. 우수에 찬 네 박자의 느린 리듬이 특징인 블루스는 1870년대를 전후해 탄생했다. 블루스는 블루 데블스(blue devils, 푸른 악마들)’를 줄인 말인데, 푸른 악마란 우울, 향수병 등을 나타낸다.

 

18세기 말에 낭만적이고 몽환적인 파란색만 등장한 것은 아니다. 국가와 군대를 상징하는 파란색도 탄생했다. 이런 의미를 지닌 새로운 파란색이 탄생한 곳은 프랑스였다. 프랑스는 이미 13세기부터 왕의 문장에 청색을 사용했다. 이 시기에 청색은 군주의 색이었다. 파란색이 왕이나 왕조가 아닌 국가 전체를 상징하는 색으로 새롭게 탄생한 것은 프랑스혁명 덕분이었다. 1564년에 창설된 프랑스 왕실근위대 병사들은 혁명 직전까지 청색 군복을 입었다. 17897, 이들은 민중과 합세하여 바스티유 함락에 동참했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청색 군복을 입은 채 파리 국민방위대에 편입했다. 이듬해인 1790년에는 지방 주요 도시에서 결성된 민병대들도 파리 국민방위대 병사들의 파란색 군복을 채택했고, 그해 6월 파란색은 국가를 상징하는 청색(bleu national)’으로 선포되었다. 이때부터 파란색은 삼색기와 함께 혁명사상에 동조하는 모든 이들의 상징색이 되었다.

 

20세기에 두 차례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파란색은 유럽과 미국에서 가장 즐겨 입는 옷 색깔이 되었다. 특히 1950년대 이후 중요한 역할을 한 옷이 있으니, 그것은 진(jean)이다. 인디고로 염색한 데님으로 만든 청바지다. 미국에 정착한 독일계 유대인 리바이 스트라우스(Levi Strauss, 1829-1902)는 라트비아 출신 유대인 재단사 제이콥 데이비스(Jacob Davis)와 손잡고 1872년 호주머니를 구리 리벳으로 고정시킨 블루진을 고안했다.

 

데님은 튼튼한 면직물이지만 염료를 완전히 흡수하기에는 너무 두꺼웠기 때문에 완벽한 염색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염색 공정에 나타난 이러한 불안정성이 오히려 진 바지를 성공으로 이끌었다. 바지를 입은 사람과 함께 색이 변화하고 낡아가는, 마치 살아있는 재료처럼 보인 것이다. 수십 년 후 염색 기법이 발달하여 인디고로 어떤 천이든 오래도록 변색하지 않도록 할 수 있게 되었으나, 진 바지 제조업체들은 일부러 물 빠진 듯한 색을 내기 위한 작업을 했다.

 

오늘날 파란색은 스톡홀름, 마르세유, 취리히 등 수많은 유럽 도시들의 문장에서 채택되고 있고,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와 유럽연합(EU)을 상징하는 깃발의 바탕색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서유럽에서 실시된 좋아하는 색에 대한 여론조사에서도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파란색을 선택했다. 프랑스에서는 청색 선호경향이 이웃 나라들보다 두드러져, 때로 60%에 이르기도 한다. 한때 야만인의 색이라고 천대 받던 파란색이 가장 사랑받는 색으로 탈바꿈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