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원의 풍속화에 나타난 주색잡기의 세계
강명관 지음 <조선풍속사3: 조선 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 나오다>(푸른역사, 2010)
한 원로 역사학자가 들려주신 대학 시절 이야기 한 토막. 1960년대 초 같은 과 친구가 ‘조선시대 축첩제도’로 논문을 쓰겠다고 지도교수에게 말했다가 욕만 잔뜩 얻어먹었다는 것. 당시의 학계 풍토로 보아 충분히 수긍이 된다. 근엄하고 진지한 주제만이 역사학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분위기였으니까.
하긴 정치사, 경제사 등 정통적(?) 분야에서의 실증적 연구마저 제대로 안 된 60년대 초 상황에서 양반들 첩질 행태를 연구하겠다고 했으니, 지도교수의 입장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부끄럽지만 한국사의 경우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일본의 한국사 연구수준보다도 못했다.
그러나 작금의 연구 동향을 기준으로 보면 축첩 제도를 연구하겠다던 그 학생이야말로 혜안을 지닌 선각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21세기 초에 출간된 역사책들의 제목에는 ‘가벼움’이 넘친다. <감자 이야기>, <눈물의 역사>, <죽음의 역사>, <유방의 역사>, <이브의 역사>, <신들의 열매 초콜릿>, <광기의 역사>, <중세의 쾌락> 등등. 모두 서양 학자들의 저술을 번역한 것들이다. 근엄함이나 거대담론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이런 다양한 소재 발굴을 통해 오늘날 서양 사회에서 역사학이 독자들의 폭넓은 사랑을 받게 된 것 또한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조선 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 나오다>는 엄숙과 진지함을 풀어헤치고 역사학 대중화를 시도한 책이다. 풍속화가 신윤복의 그림을 통해, 우리가 까맣게 잊고 있던 조선 시대 선인들의 사생활을 엿보게 해준다.
조선 시대 기방(妓房) 풍속을 보기로 하자. 색주가의 포주는 대개 포도청(오늘날의 경찰청) 포교의 끄나풀이었으며 이들은 수입의 일부를 포교들에게 상납했다고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부 부패 경찰이 유흥가의 뒤를 봐주곤 했다는 기사가 종종 보도되곤 했다. 우리 시대와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하지만 유흥가에서 포교들보다 더 큰 권세를 휘두르는 이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별감, 특히 대전별감(大殿別監)이었다. 별감은 그야말로 조선 후기 유흥가의 주역이었다. 놀고, 먹고, 마시는 자리에 빠지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유흥가 생태가 본래 그렇듯이 이들도 폭력을 휘두르는 습성이 있었다. 조선 후기 실록을 보면 이들은 깡패와 다를 바가 없었다.
별감이 벌인 사건들을 보면 대개가 유흥가 패싸움, 난투극이다. 금주령을 어기고(영조 때 금주령이 내려져 음주를 법으로 금했다는 것은 이 책에서 처음 알았다) 술을 마시다가 체포되는가 하면, 술주정을 부리다 체포되자 포교의 집을 찾아가 박살을 냈다. 조선 시대 별감은 포도대장도 겁내지 않을 정도로 ‘끗발’이 좋았던 것이다.
이쯤 되면 별감이 도대체 어떤 집단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별감이란 대전(大殿, 왕의 거처), 왕비전, 세자궁 등 세 곳을 호위하는 무사들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청와대 경호실 쯤 된다. 문득 10·26 사태로 최후를 맞은 차지철 경호실장이 떠오른다. (그야말로 별감의 우두머리 아닌가?)
별감들의 의상은 매우 화려했다. 특히 대전별감은 사치스런 복색으로 유명했다. 서울 시내 남성 의상의 유행을 주도한 이들이 대전별감이었다고 한다. 신윤복 그림에 나오는 별감 의상을 보면, 겉옷인 붉은색 철릭 안에 푸른색의 화려한 옷자락이 비어져 나와 있다. 호사스럽기 짝이 없는 비단옷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통념과는 달리 조선 시대 양반(문반)은 기방에 출입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기방 출입을 하면 양반 사회 내부에서 악평이 나기 때문에 출세에 지장이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사극에 나오듯이 백발의 정승, 판서가 기방에서 술을 마시고 정치적 음모를 꾸미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이것은 현대의 요정이나 룸살롱 같은 것을 조선 시대에 투영하여 만들어낸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니, 이 책은 사극을 비판적 안목으로 볼 수 있게 해주는 미덕도 갖고 있는 셈이다.
전반적으로 이 책이 다루는 세계는, 혜원이 그린 풍속화의 세계가 그러하듯, 주색잡기(酒色雜技)의 세계이다. 엄숙주의자는 얼굴을 돌리고 싶어 할 장면도 꽤 되지만, 그것이 지금이나 그 때나 사람 사는 세상의 실상인 것을 어찌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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