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쥔장 서평

8. 내면의 숭고한 열정을 따르다 <괴테와의 대화>

by 안티고네 2017. 5. 17.

내면의 숭고한 열정을 따르다


에커만 지음, 장희창 옮김 괴테와의 대화1,2(민음사, 2008)


일설에 의하면 서양 역사에는 두 명의 정신적 거인이 있다고 한다. 한 사람은 기독교 진영, 다른 한 사람은 비()기독교 진영인데, 전자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요, 후자는 괴테(1749~1832)라는 것이다. 괴테와 보통사람의 차이가 보통사람과 원숭이의 차이와 같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괴테 연구자의 과대평가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괴테가 독일 문학의 최고봉을 상징하는 거인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요한 페터 에커만(1792~1854)24세 때 괴테의 작품들을 읽기 시작하면서 경탄을 금치 못한다. 이 무렵 에커만은 괴테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괴테에 대한 그의 사랑과 존경심은 열정적이었다. 괴테를 직접 만나보고 싶다는 소망을 품은 그는 31세 되던 1823년에 74세의 괴테를 처음 만났고, 괴테가 임종하던 1832년까지 9년간 그 곁에 머물며 둘 사이의 대화를 일기로 남긴다.


괴테도 위대하지만 에커만의 열정도 대단하다. 에커만은 인간이란 내면에서 솟구쳐 오르는 충동이 지향하는 바를 따라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이 때문에 그는 다른 돈벌이 되는 학문을 모두 포기하고 괴테가 죽는 날까지 그 곁을 지키며 배움을 얻고자 했다. 에커만은 문학과 예술, 그리고 인간적으로 한층 성숙해지는 일이외에는 아무것도 관심이 없었다. 에커만의 재능과 열정을 알아본 괴테는 에커만을 곁에 머물게 하고 멘토(mentor) 역할을 자임한다. 에커만은 스승이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아도 그와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교양이 높아지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한다. 줄탁동시(啐啄同時)란 말이 떠오른다.


열정은 영어로 ‘enthusiasm’이다. 미국의 생태학자 르네 듀보는 그 말의 어원(en+theos)을 풀어 내재(內在)하는 신(a God within)”이라고 풀이한다(르네 듀보는 ?내재하는 신?이란 책을 쓰기도 했다). 열정이란 내 안에 이 임한 상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열정이란 인위적으로 만들어질 수 없다. 열정적인 삶이란 이유 모를 열정에 이끌리어 불가항력적으로 자신의 영혼을 불태우는 삶이다. 그것은 감당하기 힘든 고통과 불행을 수반하는 삶일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위대한 생애가 그런 것 아니었던가? 그런 삶이야말로 충만한 삶이 아닐까? 그런 열정 없이 오로지 돈벌이만을 기준으로 생애 사업(life work)을 결정짓는 젊은이들의 인생이 갑자기 불쌍해지려 한다.


괴테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지금 18세가 아니라는 것이 기쁘네. 내가 18세였을 때는 독일이란 나라도 겨우 18세밖에 안되어서 아직 무언가를 할 수 있었지. 하지만 지금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이 요구되고 있고, 어느 쪽을 보아도 길이 막혀 있는 형편일세. 나는 모든 게 갖추어진 이 시대에 젊지 않다는 것을 하늘에 감사하고 있어.”


다이내믹 코리아!’ 한국 사회는 문제투성이다. 아직 많은 부분에서 미비한 사회다. 그러나 괴테 식으로 생각한다면 이점도 오히려 긍정적으로 생각할 여지가 있는 것 아닐까? 그만큼 기회가 많다는 뜻도 된다. 현실을 개선하고 역사를 발전시킬 사명이 그들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선진국 젊은이들은 불행한 사람일 수도 있다. 부족함 없이 모든 것이 완비된 체제 안에서 개인이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은 극도로 제한된다. 그 결과 마약, 총기 등 퇴폐와 일탈에서 돌파구를 찾는 상황도 벌어지곤 한다.


결국 우리의 삶이란 열매나 결과보다는, 가치와 보람을 향해 목표의식을 갖고 투쟁해 나아가는 과정 자체가 더욱 중요한 것이 아닌가.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아직 해야 할 일이 지천으로 널려 있는 한국 사회야말로, 비록 고되기는 하지만 값진 성취감을 맛보기에는 더할 나위없는 기회의 땅이 아닌가. 그래서였을까? 괴테는 과정의 중요성에 관련하여 이렇게 말한다. “매너리즘에 빠진 사람은 늘 작업을 끝내기만 바라며 작업 자체에는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네. 그러나 진정으로 위대한 작가는 제작 과정에서 최상의 기쁨을 발견하지. 재능이 부족한 사람일수록 예술 그 자체에 만족하지 않고 작업을 하는 동안에도 그것을 끝내고 얻게 될 이익만을 염두에 두는 법이지. 하지만 그러한 세속적인 목적과 경향만으로는 위대한 것을 결코 이룰 수 없네.”


할 일 많은 한국 사회다. 아직 부족하고 갈 길이 멀다. 그러나 한걸음씩 역사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기쁨을 느끼는 열정적인 젊은이들을 찾아내 격려한다면 우리의 미래를 결코 어둡지 않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기성세대의 안목과 분별력이 무엇보다 절실하다. 그런 젊은이들을 찾아내어 적재적소에 배치할 위치에 서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