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쥔장 서평

3. 구로사와 아키라의 위대한 스승 <자서전 비슷한 것>

by 안티고네 2017. 5. 6.

구로사와 아키라의 위대한 스승

 

구로사와 아키라 지음, 김경남 옮김, 자서전 비슷한 것(모비딕, 2014)


구로사와 아키라(1910-1998)라쇼몽으로 1951년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24회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영화상을 수상해 일본 영화를 처음으로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만든 20세기 일본 영화계 최고의 거장이다.


소학교 시절 구로사와는 늦된 아이였다. 친구들에게 울보라고 놀림을 받았다. 하지만 곁에 훌륭한 선생님이 있었다. 담임인 다치가와 세이지 선생님은 지능 발달이 더딘 구로사와를 감싸서 자신감을 갖게 해준 고마운 분이었다. 미술 시간이었다. 다치가와 선생님은 학생들이 그린 그림을 한 장 한 장 칠판에 붙인 다음 자유롭게 감상을 말하라고 했다.


구로사와가 그린 그림 차례가 오자 아이들이 낄낄거리며 웃어 댔다. 하지만 선생님은 무서운 얼굴로 아이들을 둘러본 다음 구로사와의 그림을 칭찬해주셨다. 구로사와는 학교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 뒤로 미술 시간이 있는 날이면 그 시간이 기다려져서 서둘러 등교했다. 그림 그리는 게 좋아졌다. 그림 실력이 쑥쑥 늘었다. 동시에 다른 과목의 성적도 급속히 오르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학급 반장까지 되었다.


같은 반에는 구로사와 못지않게 울보인 친구가 하나 있었다. 우에쿠사 게이노스케라는 친구였다. 그 친구의 존재는 마치 거울을 보듯이 구로사와로 하여금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해주었다. 말하자면 구로사와는 자기와 비슷한 그 아이를 보고, 나는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우에쿠사는 걸핏하면 넘어져서 울었다. 진흙탕에 넘어져 깨끗한 옷이 엉망진창이 된 채 울고 있는 우에쿠사를 구로사와가 집까지 데려다 준적도 있다. 두 울보는 서로에게 친근감을 느꼈고 언제나 둘이 함께 놀았다.


다치카와 선생님은 둘을 따뜻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하루는 반장인 구로사와를 교무실로 불러, 부반장을 두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구로사와는 자기가 반장으로 부족해서 그런가 하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선생님은 그런 구로사와를 보며 물었다. “너 같으면 누굴 추천하겠니?” 구로사와는 공부 잘하는 동급생 이름을 댔다. 그러자 선생님은 이상한 말씀을 했다. “나는 좀 모자란 녀석을 부반장 시키고 싶은데?” 구로사와는 깜짝 놀라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선생님은 빙글빙글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우에쿠사를 부반장 시키면 어떨까?” 구로사와는 그 순간 선생님의 따뜻한 사랑을 아프도록 느낄 수 있었다.


세월이 흘렀다. 우에쿠사가 시나리오를 쓰고 구로사와가 감독을 맡은 영화 <멋진 일요일>1948년 개봉되었다. 두 친구의 나이 38세 때였다. <멋진 일요일>이 개봉되고 며칠 뒤, 구로사와는 엽서를 받았다. “영화 <멋진 일요일>이 끝나고 영화관 안이 밝아졌다. 관객들이 일어났다. 그런데 일어나지 않고 울고 있는 한 노인이 있었다.”


엽서를 읽던 구로사와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울고 있던 노인은 다치카와 선생님, 구로사와와 우에쿠사를 그토록 귀여워하고 격려해주셨던 바로 그분이었다. 엽서에는 계속해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오프닝 타이틀에서 시나리오 우에쿠사 게이노스케, 감독 구로사와 아키라라는 글자를 읽었을 때부터 스크린이 흐려 잘 보이지 않았다.”


구로사와는 당장 우에쿠사에게 연락해 다치카와 선생님을 모시고 식사를 대접하기로 했다. 25년만의 만남이었다. 가슴 아프게도 선생님은 무척 작아지셨고, 치아도 약해서 고기도 잘 씹지 못하시는 것 같았다. 구로사와가 뭔가 부드러운 걸 가져오겠다며 일어서자, 다치카와 선생님이 말리셨다. “두 사람 얼굴 보는 것만으로 충분해.”


구로사와와 우에쿠사는 선생님 말씀대로 공손히 앉았다. 선생님은 그런 두 친구를 바라보며 , 하고 신음하는 듯한 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끄덕이셨다. 구로사와는 선생님을 바라보는 내내 눈물이 앞을 가려 선생님의 얼굴을 잘 볼 수 없었다. 스승에 대한 뜨거운 사의 눈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