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쥔장 서평

4. 지혜로운 노년을 위하여 <노년에 관하여>

by 안티고네 2017. 5. 9.


지혜로운 노년을 위하여

 

키케로 지음, 오흥식 옮김, <노년에 관하여>(궁리, 2002)


노인은 있어도 원로(元老)’는 찾아보기 힘든 시절, 잘 늙어가는 일이 중요해졌다. 로마 철학자 키케로(106~43 BC)에게서 한수 배운다.


키케로가 이 책에서 말하는 주제는 늙음죽음이다. 먼저 늙음에 대해서다. 기원전 6세기 이탈리아에 밀론이라는 괴력의 레슬링 선수가 있었다. 올림픽 경기에서 여섯 차례나 우승했다. 요즘으로 치면 천하장사 6연패(連覇)한 씨름선수 쯤 될 것이다. 그는 젊은 날 살아있는 황소를 어깨에 둘러메고 경기장에 들어설 정도로 힘이 대단했다고 한다. 그런 그가 늙은 뒤 젊은 선수들이 연습하는 것을 보고 부러워하며 , 내 근육들이 이제는 죽었구나!”하고 탄식했다고 한다. 늙고 힘없는 육신에 대한 절망을 토로한 것이다.


키케로는 육신이 약해졌다고 한탄하는 밀론을 비웃는다. 키케로에 의하면 밀론은 근육이 죽었다기보다는 밀론 자신이 죽은 것이다. 밀론은 정신이 아닌 근력으로 명성을 얻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체력이 아니라 지혜라는 것이 키케로의 생각이다.


노년에 들어 쉽사리 속고 건망증이 심해지며 조심성을 잃는 노인들이 있다. 키케로는 이런 결점이 늙어서 생기는 결점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지혜로운 인간과 우매한 인간이 나뉘는 것은 나이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어서, 젊은이 중에도 예의바르고 자제력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례하고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이 있다. 키케로에 의하면, 분별 있는 젊은 시절을 보낸 이에게는 지혜로운 노년이 오고, 욕망에 사로잡힌 젊음을 보낸 이에게는 흐리멍덩한 노년이 오게 된다. 반듯한 자제력은 젊은 날부터 키워야 한다는 말이다.


키케로의 글은 죽음으로 접어 들어간다. ‘늙음을 논한 다음 죽음을 말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그는 만약 죽음이 영혼을 아주 없애버린다면(절멸) 죽음은 무시되어야 하고, 만약 죽음이 영혼을 영생으로 이끌어간다면(불멸) 오히려 죽음은 열망되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언뜻 보기에 죽음 이후에 대해 두 가지 가능성을 다 열어두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음 구절들을 읽노라면 영혼불멸에 기울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영혼은 하늘에 속한 것으로서 매우 높은 집으로부터 내려와서 마치 신성이나 영원성과는 관련이 없는 장소인 지상에 처박힌 것과 같네. ……마치 집으로부터가 아니라 여인숙으로부터 떠나는 것처럼, 그와 같이 나는 삶으로부터 떠난다네. 자연이 우리에게 영원히 거주하는 곳이 아닌, 잠시 머무를 거처를 주셨기 때문이지. ! 영광스러운 날이여! 나는 그때가 되면 영혼들의 저 신성한 집합체 속으로 갈 것이며, 이 시끄럽고 더러운 이승으로부터 빠져나갈 것이라네.”


이렇듯 두 가지 가능성을 열어두다가 불멸로 귀결되는 장면은 플라톤의 <변명>에서도 나온다. <변명>에서 소크라테스는 죽음이 절멸의 상태이거나 저 세상으로의 영혼의 이동이라고 말한다. 키케로도 이 책에서 자신이 소크라테스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만일 죽음이 아무 의식도 없이 꿈조차 꾸지 않는 깊은 잠이라면 그것은 큰 소득이다. 제아무리 호사스러운 전제군주의 삶이라 할지라도 깊은 잠에 빠져든 밤보다 더 즐겁고 달콤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편, 만일 죽음이 다른 곳으로의 여행이라면, 그곳에 모든 선인(先人)들이 있어 의롭고 위대한 인물들과 서로 교제할 수 있다면, 그것은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소크라테스는 만일 죽음이 그런 것이라면 열 번이라도 기꺼이 죽겠다고 말한다.


키케로는 지상에서의 삶을 덕스럽게 살았다면 죽는 날은 두려움의 날이 아니라, 정화된 영혼이 하늘로 되돌아갈 수 있는 영광의 날이라고 말한다. 이 지상의 삶을 덕스럽게 살아낸 자에게는 삶이 고통이요, 죽음의 날이 영광의 날이라는 것이다. 반듯한 노년을 살다가 영광스러운 죽음의 날을 맞이하자는 게 키케로의 충고다. 젊어서부터 항심(恒心)을 지키며 반듯하게 살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