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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읽기

백원 짜리 동전의 가장자리가 오톨도톨한 이유는?(1): 경제 현실과 신학 이론.

by 안티고네 2000. 4. 26.


중세 유럽의 화폐로는 대개 금화와 은화가 사용되었다. 예컨대 10만원 짜리 금화라면 그것을 녹여서 금으로 팔아도 10만원의 가치가 되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이 화폐를 유통하는 과정에서 사용자들이 주화 모서리를 조금씩 깎아내곤 했다는 점이다.

금가루를 깎아낸 10만원 짜리 금화로 태연하게 상품 대금을 지급하거나 채무를 상환하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 화폐는 액면 가치보다 실제 가치가 적어진다.

이런 폐단을 없애기 위해 고안된 방법이 주화의 가장자리를 오톨도톨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놓으면 모서리를 깎아낼 경우 금방 표시가 나게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100원 짜리와 500원 짜리 동전 가장자리에 나 있는 줄무늬는 중세 유럽의 화폐 주조 관행에서 비롯된 것이다.

(중세 유럽의 제도가 오늘날의 우리와 직결되어 있다는 것이 재미있지 않은가? 이런 점에서 세계는 이미 하나이다.)


그러나 때로 국왕들은 전쟁 등으로 말미암아 재정적 위기에 봉착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런 위기를 극복하는 가장 흔한 방법은 자국 내의 금화와 은화를 회수하여 이를 녹이는 것이었다. 이렇게 회수된 금과 은은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러나 금화와 은화가 전쟁 비용으로 증발된 후에도 일정한 화폐의 유통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전쟁이 났다고 해서 국내에서의 경제 활동이 중단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 금화 및 은화와 동일한 액면가를 갖는 납 주화가 발행되었다.

납 주화는 비록 본래적(inherent) 가치는 적었지만 부여된(imposed) 가치는 상당했다. 국왕은 재정 위기가 타개되기만 하면 납 주화를 동일한 액면가의 금화나 은화로 교환해 주겠노라고 약속했다.

그러므로 납 주화의 가치는, 후일 액면가와 동일한 가치의 금이나 은으로 상환해 주기로 한 "국왕의 약속"에 달린 것이다.

금화의 가치는 금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납 주화의 가치는 그 주화를 "마치 금인 것처럼" 취급하겠다고 하는 국왕의 계약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다.

(물론 그와 같은 상황은 오늘날의 경제에서도 존재한다. 예컨대 지폐는 본래적 가치로서는 하잘 것 없는 것이다. 그것의 가치는 은행권을 액면가 대로 지불해주겠다고 하는 정부의 "약속"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상이 중세 유럽 화폐 경제의 한 모습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중세 경제의 상황을 중세 말기 일부 스콜라 신학자들이 자신들의 신학적 입장을 지지하기 위한 근거로서 원용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먼저 서기 5세기초의 펠라기우스 논쟁(Pelagian controversy)에 관해 설명해야 할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 사이에 벌어진 이 논쟁은 한 개인이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에 들어가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 것이다. 죄인이 어떻게 의로운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 이런 문제가 집중적으로 다루어졌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볼 때 인간은 자신의 상황 속에 갇힌 바 되어서 스스로를 구제할 수 없었다. 자신의 수단과 능력에만 맡겨둘 경우 인간은 도저히 하나님과의 관계에 들어갈 수 없었다.

어떤 인간도 죄의 질곡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을 현대적인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인간이 스스로 죄로부터 벗어나려 하는 것은 마약 중독자가 헤로인이나 코카인 중독에서 벗어나려는 것과도 같다. (그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다.) 상황은 결코 안으로부터는 바뀔 수 없다.

그러므로 만일 변화가 일어나려면 그것은 인간 상황의 바깥으로부터 와야만 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딜레마에 개입해 들어왔다. 물론 하나님은 굳이 그렇게 하실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인간의 상황 속으로 들어오신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은혜를 너무나 강조했기 때문에 종종 "은혜의 박사(doctor gratiae)"라고 불리곤 한다. 은혜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물로서, 하나님은 이를 통해 자발적으로 인간을 옥죄는 죄의 질곡을 분쇄하신 것이다.

속죄는 오직 하나님의 은사로서만 가능하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스스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누군가에 의해 바깥으로부터 행해져야 한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는 구원의 원천이 인간의 외부에, 즉 하나님에게만 있음을 강조한다. 구원의 과정을 시작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펠라기우스는 이 문제를 달리 생각했다. 그는 구원의 원천이 인간의 내부에 있다고 가르쳤다. 개개인은 스스로를 구원할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구원이란 선행을 통해 얻어질 수 있는 것으로, 그 선행은 신을 인간에 대한 의무에 속박되도록 만든다. 펠라기우스는 은혜의 개념을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요컨대, 펠라기우스는 "공로에 의한 구원"을 말한 반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은혜에 의한 구원"을 가르친 것이다. (계속)



루오 <그리스도교적 야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