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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읽기

[000 님]<어느 무교회주의자의 구약성서 읽기>

by 안티고네 2001. 7. 16.



제가 쓴 책 <어느 무교회주의자의 구약성서 읽기>(도서출판 부키)에 대해 독자 000 님이 쓰신 독후감입니다.

 



[독후감] 박상익 <어느 무교회주의자의 구약성서 읽기>


박상익 교수님의 책이다.

상업적인 면에서 본다면 제목을 달리 짓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예를 들면 "역사학자의 구약성서 읽기"라는가, "역사와 함께 본 구약성서"라든가 이렇게 지으면 주 소비층으로 예상되는 기독교인들이나 역사에 관심있는 비기독인들의 관심을 끌 수 있었을 것 같은데 말이다.

사실 내용을 보아도 그다지 위 제목들이 틀린 것은 아니다. 또 무교회주의라는 일반인들에게 생소한 말로 기독인들의 관심을 잃은 것 같다.

그렇지만 위의 생각은 쓸데 없는 것이다. 책의 면면의 역사학적 인문학적 해설 위에는 무교회주의의 근본 정신이 흐르고 있고, 노평구 선생에게 헌정된 책의 제목으로 그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학자가 쓰는, 더군다나 온갖 신학에서 자유로운 평신도 무교회주의자가 쓰는 책은 성경을 새로운 시각에서 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 한 예로 성경의 모든 면을 의심없는 사실로 받아들이는 시각에서 벗어나 역사적 신빙성을 검증하고 그런 가운데서도 의미를 찾는 방법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물론 이런 면이 나에게 익숙치 않게 받아들여진 부분도 있다. 예를 들면 요나서의 역사적 신빙성에 관한 부분에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세한 역사적 배경을 통해 선지자들의 성격과 지위까지 추측한 것을 보면 그 방법에 흥미를 느낀다.

이 책의 내용을 일일히 상기하여 적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요즘 내 관심을 끄는 무교회주의에 대해서 생각하는데로 적어보자. 매개의 변증법은 무교회주의를 이해하는데 한 역할을 담당할 만한 법칙이다.

이는 매개의 관계에서 매개자의 존재가 매개물의 본질보다 선행하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예를 들면 돈이 처음엔 두 물자의 시간적 공간적 차이를 극복해 매개해 주는 역할을 했지만, 그래서 실물경제가 중심이 되었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두 물자보다 돈이 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금융경제 사회가 되었다. 두 매개물보다 매개자가 우월해지는 현상을 그 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다른 예도 생활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데, 언어도 그 좋은 예가 될 것 같다. 나와 같은 이과생들에게는 수학도 그 중 하나이다. 자연과학의 언어로서 수학은 자연 법칙과 현상을 매개한다. 그러나 이 매개자는 점점 우월해져서 현상의 본질보다 결국 편미분방정식의 풀이법이 더 중요한 문제가 되버린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예수님)과 사람을 매개하는 존재로서 교회(성도들의 모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로서의 교회를 말한다)가 결국 사람인 하나님보다 우월해지고 역시 둘의 매개자인 성직자가 이 둘보다 우월해진다. 이는 모든 매개의 변증법의 예와 같이 효율성에 근거한다.

무교회주의는 이에 대한 반발이라고 볼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신앞에선 단독자로서 하나님을 대하고 왕같은 제사장으로 교제하는 것이 그 주된 방향이다.

흔히 이름에서 오해하는 교회의 비판 세력이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 것이 아니라 교회 믿는다고 생각하므로) 반기독교적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무교회주의에 대한 잘못된 시각이다.

오히려 내가 알기로는 그들은 기존 교회보다 더욱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합리적으로 대안을 제시하며 초대교회에 더욱 가깝고, 더욱 복음적이다. 실로 무교회주의는 교회보다 교회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