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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읽기

수도원제도와 노동신성개념의 등장(2)

by 안티고네 2001. 5. 12.

성 바실리우스의 공동 수도생활

수도 생활은 동로마에서 처음 등장했다. 동로마에서는 콘스탄티누스의 개종 이후 약 백년 동안 수도 생활이 열병처럼 번졌다. 이집트와 시리아의 은둔 수도사들은 지극히 비인간적이고 고통스러운 극단적 고행을 경쟁적으로 추구했다.

어떤 사람은 소처럼 풀을 뜯어먹으며 살았고, 또 어떤 이들은 작은 우리 속에 스스로 갇혀 살았으며, 또 다른 사람들은 목에 무거운 물건을 매단 채 생활하기도 했다. 키리아쿠스(Cyriacus)라는 한 수도사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때까지 두루미처럼 한 발로 여러 시간 동안 서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금욕적 수도사들 가운데 가장 극단적인 사람은 성 시메온 스틸리테스(St. Simeon Stylites, c.390-459)였다. 그는 37년간이나 높은 돌기둥 위에 살면서 1,244번이나 계속해서 발에 머리를 찧는 따위의 자학적인 고행을 실천했는데, 한편 그가 고행을 하는 동안 돌기둥 아래에는 군중들이 몰려와 "그의 몸에서 떨어지는 구더기들"에게 경배를 바쳤다. (스틸리테스가 살았던 돌기둥의 높이는 약 18미터였다. 그는 이 기둥 위에서 설교를 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개종시켰다고 한다.)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광적인 금욕주의는 점차 소멸되어 갔다. 이제 수도자들은 공동 생활을 통해, 그리고 고행을 완화함으로써 수도 생활을 좀더 지속적으로 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동방에서 공동 수도 생활을 창도하는 데 가장 성공을 거둔 인물은 성 바실리우스(St. Basilius, 330?-379)였다. 그는 수도 생활을 극단적인 은둔적 금욕주의자로서 시작했지만, 그 후 공동체적이고 온건한 생활 방식을 선호하게 되었다. 바실리우스는 수도사들을 위해 쓴 자신의 저술 가운데서 자신의 이러한 노선에 관해 언급했는데, 이 저술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동방 수도 생활의 지침서가 되고 있다.

바실리우스는 극단적인 고행을 부추기기보다는 수도사들이 유익한 노동을 실천하면서 스스로를 단련할 것을 권면했다. 그의 가르침은 현대적인 기준에서 보면 여전히 매우 엄격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그는 장기간의 금식이나 육체적인 자학만은 금지했다. 그 대신 그는 청빈과 겸손의 의무를 이행할 것과, 침묵 속에서 종교적 명상을 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 성 바실리우스의 수도 생활 이념이 승리를 거두면서 동방 수도 생활은 더욱 조직화되고 완화되었다.

그러나 바실리우스파 수도사들은 가능한 한 "세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살려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외부 사회를 교화시키는 데에는 서유럽의 수도사들이 한 것만큼 영향을 결코 미칠 수도 없었고, 또 실제로도 미치지 못했다.

서유럽의 수도 생활: 베네딕트 계율

초기에 서유럽에서의 수도 생활은 동방에서처럼 신속하게 확산되지는 않았다. 서유럽에서는 금욕주의의 호소력이 동방에서보다 훨씬 미약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서기 6세기에 성 베네딕트(St. Benedict, 480?-547?)가 유명한 라틴 수도 계율을 작성함으로써 비로소 변화되었다. 그가 작성한 계율은 궁극적으로 서유럽의 거의 모든 수도사들의 지침이 되었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베네딕트 계율은 상당 부분 기존의 라틴 문헌에서 따온 것임이 밝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네딕트 계율은 매우 간명하고 신축적이며 온건한 특징을 갖고 있다.

베네딕트 계율은 성 바실리우스가 제시한 것과 비슷한 의무를 부과했다. 이를테면 청빈, 복종, 노동, 종교적 헌신을 강조한 점이 그것이다. 그러나 베네딕트 계율은 바실리우스의 그것보다는 온건했다. 수도사들은 검소한 식사와 의복을 충분히 공급받았으며, 잠도 충분히 잘 수 있었다. 심지어는 약간의 포도주를 마시는 것도 허용되었다. 비록 육류는 환자에게만 허용되었지만 말이다.

수도원장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따라서 수도원장은 복종하지 않는 수도사에게 채찍질을 가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베네딕트는 수도원장으로 하여금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애정의 대상이 되도록" 애써야 한다고 권면했으며,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먼저 수도사들에게 자문을 구하라고 명령했다. 왜냐하면 "주께서는 젊은 수도사에게 가장 좋은 것을 계시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해서 베네딕트 수도원은 징벌을 내리는 학교가 아니라, 심오한 종교적 결실의 중심이 되었다.

노동 신성 개념의 등장

여기서 잠시 이 수도원이 서양 문명의 발전에 끼친 세 가지 공헌에 관해서 주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첫째, 베네딕트 교단 수도사들은 일찍부터 선교 사업에 종사했다. 잉글랜드와 독일의 개종에는 그들의 선교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들의 활동은 신앙을 보급하는 데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서유럽의 문화적 동질감을 창출하는 데도 공헌했다.

둘째, 베네딕트 수도사들의 노동 신성 개념을 들 수 있다. 고대 철학자들과 귀족들의 최고 이상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조용히 명상에 잠길 수 있는 충분한 여가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성 베네딕트는 수도사들이 항상 바삐 일할 것을 원했다. 그는 "게으름이야말로 영혼의 적"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수도사들이 일정 시간 동안 육체 노동에 종사하도록 규칙을 정했는데, 만일 고대의 사상가들이 이러한 규칙에 접했더라면 그들 대부분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초기의 베네딕트 수도사들은 그들 스스로 열심히 노동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노동의 존귀성에 관한 이념을 확산시켜 나갔다.

베네딕트 수도원의 후원에 힘입어 이 이념은 서유럽 문화의 가장 현저한 특징 중의 하나가 되었다. 우리는 베네딕트 수도사들이 기꺼운 마음으로 소젖을 짜고, 타작을 하고, 쟁기질을 하고, 망치질을 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의 수도원에 번영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훌륭한 본보기가 되었다.

베네딕트 수도원들은 특히 농업면에서, 또 후기에는 영지(領地) 경영면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그 결과 베네딕트 수도원은 서유럽의 경제 수준을 높이는 데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서유럽 여러 나라의 등장에 재정적인 기여를 하기도 했다.

고전 문화의 보존

베네딕트 수도원의 세 번째 기여는 고전 문화를 보존했다는 점이다. 학문이 세속 세계에서 거의 잊혀지고 있던 시기에 베네딕트 수도원들이 문화적인 섬의 구실을 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성 베네딕트 자신은 결코 고전 문화의 찬미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수도사들이 문학이나 철학이 아닌 그리스도만을 섬길 것을 원했다. 그러나 그는 수도사들이 기도서 정도는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결국 수도원 내에서 약간의 교육이 행해질 필요가 있음을 의미했다. 왜냐하면 수도원 밖에서는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길이 거의 없었던 데다, 갓 태어난 사내아이들이 수도원에 맡겨져 수도사로 양육되는 일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교육이 행해지자 최소한의 필기 도구와 서적들이 있어야만 했다. 그런데 이것은 베네딕트 수도사들이 "왜 항상 일정한 교육 수준을 유지했는가"에 대한 설명은 되지만, 그들 중 일부가 "왜 고전 문화를 보존하는 데 헌신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설명은 되지 못한다.

후자, 즉 고전 문화 보존의 추진력을 제공한 인물은 바로 카시오도루스(Cassiodorus, 477?-570?)였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을 받은 카시오도루스는,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기본적인 고전 교육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이로 인해 수도사들의 고전 연구가 정당화되었다. 더욱이 카시오도루스는 고전을 필사한다는 것 자체가 "육체 노동(manual labor)" 영어 그대로 손으로 하는 노동 이며, 그것이 들판에서 하는 고된 일보다 수도사들에게 더욱 적합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베네딕트 수도사들이 이러한 카시오도루스의 사상에 공감하게 되면서, 베네딕트 수도원들은 수백 년간에 걸쳐 고전 교육 및 필사의 유일한 중심지가 되었다.

중세 초기에 베네딕트 수도사들이 필사와 보존 작업을 해 주지 않았더라면, 카툴루스(Catullus)와 오비디우스(Ovidius)의 외설적인 시를 포함한 고전 라틴 문헌들은 오늘날 한 편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