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무교회주의자의 구약성서 읽기>(도서출판 부키, 2000)에 실린 글입니다. |
비옥한
초생달
페르시아만에서 티그리스 강, 유프라테스 강 유역을 거쳐 시나이 반도에 이르는 초생달 모양의
지역은 근동 지방에서 가장 기름진 땅으로, 흔히 “비옥한 초생달(Fertile Crescent)”이라고 불린다. 이 초생달 서쪽에는 지중해가
맞닿아 있고, 북쪽과 동쪽에는 아마누스 산맥, 타우루스 산맥, 아라랏 산맥, 자그로스 산맥 등 높고 험준하여 사람이 통행하기 어려운 산맥들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초생달의 오목한 부분의 남쪽으로는 광대한 시리아 사막과 아라비아 사막이 뻗어있으며, 이 사막은 시나이 반도에까지 뻗어
있다. 오늘날 이 “비옥한 초생달” 지역은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이스라엘 등의 영토로 점유되고 있다.
이 지역이
비옥한 이유는, 첫째 평야 지대라는 점, 둘째 풍부한 물을 공급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메소포타미아(“강 사이의 땅”이란 뜻)
지역이 가장 기름진데, 그것은 평야가 광대하고 거대한 두개의 강(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이 젖줄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한편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은
“비옥한 초생달”의 서쪽, 지중해 동부 해안의 좁은 띠 모양을 이루고 있으며, 메소포타미아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덜 비옥한 편이다. 그리고 두
지역 가운데서도 특히 팔레스타인이 더 작고 빈약하다. 강들은 작아서 배가 통과할 수 없고, 강바닥(河床)이 깊어서 고대에는 관개용수로 활용할 수
없었다. 지대는 평탄하지 못하고, 구릉이 많아 평야가 좁았다. 그리고 비는 한 계절에만 집중적으로 내리는 데다, 남쪽으로 갈수록 강우량이
줄어들었다.
팔레스타인은 이렇듯 “비옥한 초생달”의 한 끝에 위치한, 작고 보잘것없는 지역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중대한
지정학적 의의를 가지고 있었다. 즉 인류 4대 문명 발상지에 속하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를 이어주는 위치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는 다 같이 거대한 하천을 근거로 한 문명으로서, 기원전 3200년경에 이미 문명의 토대를 다졌다. 일찍부터 문명을 꽃피운 두 지역은,
크고 긴 강이 광대한 평야를 기름지게 했다는 점에서 비슷한 지리적 조건을 갖추었다. 강은 교통의 편의를 제공함으로써, 그리고 농토에 물을 공급해
줌으로써 두 문명을 대내적으로 결속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러나 대하(大河) 유역의 무성한 갈대의 밀림을 개척하고,
소택지의 물을 뽑고, 수로나 저수지를 만들고 제방을 쌓는 일은 공동체 전체의 협동을 필요로 하는 거대한 사업이요, 도전이었다. 이러한 도전에
성공적으로 응전하려면 견고한 국가 조직과 강력한 통제가 필요했다. 또한 일단 치수사업이 완성된 후에는 그토록 막대한 노력을 기울여 확보한 땅을
지키기 위해 군대도 필요했다. 그 결과 두 지역에는 각기 조직력과 결속력을 지닌 최초의 강력한 국가들이 등장했고, 나아가 외부 세계에 대해서도
지배권을 확대하곤 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주변의 사막이나 고원의 여러 민족들에게 개방되어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민족의 이주와
정복, 그리고 이에 따른 지배자의 교체가 있었다. 즉, 수메르, 악카드, 미탄니, 히타이트, 아람,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등 여러
민족과 국가들이 연이어 등장했다. 반면, 이집트는 비교적 폐쇄적인 지세로 말미암아 정치적인 일관성을 보여, 고(古)왕국, 중(中)왕국,
신(新)왕국 등, 단일 종족에 의한 여러 왕조의 교체만이 있었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두 거대 문명 사이의 왕래는 불가피하게 팔레스타인을
거쳐야만 했고, 그 결과 팔레스타인은 “육교(陸橋, land bridge)”로서의 운명을 짊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수많은 원정대가 이 지역을
휩쓸었고, 급기야 팔레스타인은 여러 차례에 걸쳐 강대국들의 지배를 당하게 되었다.
국경 지대에서 성장한 미가
예언자 미가의
출신지인 “모레셋”(1: 1)은 팔레스타인의 셰펠라(Shephelah) 지방에 위치한 소읍이었다. 셰펠라는 동쪽으로 유다의 내륙 산지와,
서쪽으로 필리스티아(블레셋)의 해안 평야 사이에 위치한 낮은 구릉지대였다. 모레셋은 남왕국 유다와 필리스티아의 경계에 위치했을 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이집트 방면으로 향하는 전초 지역을 이루고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모레셋은 이중적으로 변경지역이었다. 남쪽(이집트)이나
서쪽(필리스티아)으로부터 팔레스타인 지방에 대한 군사원정이 있을 경우 모레셋은 첫 번째 공격 목표 가운데 들었던
것이다.
국경지대에서 성장한 미가는 자연히 국제 관계에 대한 깊은 관심과 침략에 대한 큰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해안지방이나 국경지대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심리였다. 그는 국경에서 멀리 떨어진 수도 예루살렘에서 안연히 거하던 정치
지배자들이 알지 못했던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야훼는 모세에게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출애굽기」 3: 5)이라고 말했지만,
결국 사람이 신의 섭리와 사명을 깨닫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구체적인 상황과 현실 속에서인
것이다.
이사야와 미가
흔히 기원전 8세기 후반은 히브리 예언의 황금시대라고 불린다.
이 시대에는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미가 등 네 명의 위대한 예언자들이 활동했다. 각 예언자들의 사회적 지위는 저마다 달랐다. 아모스는 유다
산악지대의 목자였고, 호세아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부농(富農)이었으며, 이사야는 수도 예루살렘의 귀족이었다. 그리고 미가는 소읍의 일개 직공에
불과했다. 이를테면 그는 프롤레타리아 계급 또는 민중 계급에 속한 인물이었다. 미가가 시골의 가난한 농민들에 대해 한없는 동정을 쏟았던 이유도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미가의 활동 시기는 “유다의 왕 요담(756-741), 아하스(741-725),
히스기야(725-697)시대”로 되어있다(1: 1). 「미가」 편집자가 옳다면, 미가의 활동은 사마리아 멸망(721) 훨씬 전부터 시작하여 수십
년간 지속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예언 활동을 했던 이사야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으며, 실제로 빈번히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점은 그의 예언 활동으로 예루살렘 왕궁의 히스기야왕이 야훼를 두려워한 나머지 야훼에게 간구함으로써 재앙을 모면한 사실이 기록된 것으로
미루어 쉽사리 확인할 수 있다(「예레미야」 26: 16-19). 동시대에 예루살렘에서 활동한 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서로 만났다는
증거는 찾아볼 수 없다. 추측컨대 두 사람은 판이하게 다른 사회적 지위로 말미암아, 서로 교유함이 없이 각기 독자적으로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두 예언자의 신분상의 격차는 예언 사상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스토아 철학은 그 보편적 성격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미천한 노예 신분의 에픽테토스(Epictetus)와 로마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가 다같이 스토아
철학자였다는 사실은 신분 질서가 엄격했던 고대 세계의 상황을 미루어 볼 때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에픽테토스는 이렇게 말한다.
“세계의 연극 속에서 당신이 가난한 자의 배역을 맡는 것이
신의 즐거움이라면 당신은 그 역을 잘 해내야 한다. 절름발이나 지배자 또는 소시민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주어진 역을 잘해내는 것이
당신의 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의 말대로 인간의 삶에 있어서 진정 중요한 것은 “무슨 배역을 맡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역을 “얼마나 잘 해내느냐”에 달려 있다. 토머스 칼라일의 말대로 “명성이나 지위는 한낱 등불”이어서 사람을 비추어 줄뿐, 더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 모든 인간이 추구해야 할 일은, “고상하고 진실한 일을 하고, 신의 하늘 아래서 그 자신이 신이 만드신
인간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일”이다.
그러나 현실을 돌아보면 “일”보다는 “배역”을 악착스럽게 추구하고, 또 그 “배역”에 의해서
사람을 평가하는 서글픈 풍조가 압도한다. 프랑스의 모럴리스트 아벨 보나르(Abel Bonnard)는 <우정론>에서 재기에 찬 인간
관찰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즉 이해 관계에 얽힌 불순한 우정에 있어서, 사람들은 조각 작품 자체보다는 조각이 올려져있는 받침대의 높이만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나르의 말대로, 참된 벗은 “감추어진 요소”에 의해 가까워지고 거짓된 벗은 “겉에 드러나 보이는 요소”에 의해
가까워지는 법이다. 미가와 이샤야는 비록 신분의 차이로 멀리 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것에 대한 공통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실로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비록 배역은 달랐지만 그들은 같은 목표를 추구했던 것이다.
미가와 이사야가 예언 활동을 하게 된 첫
번째 동기는 정치 문제, 국제 문제였다. 당시 아시리아는 군사 활동에 착수, 악명 높은 전제적 지배로써 서쪽 지방을 위협했다. 아시리아의
궁극적인 정복 목표는 이집트였다. 그 결과 다마스커스를 수도로 한 시리아는 기원전 732년에, 그리고 사마리아를 수도로 한 이스라엘은 721년에
각각 멸망했다. 유다는 아시리아의 공격에 그대로 노출되어 대단히 불안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바야흐로 유다는 아시리아와 이집트 사이에 놓인
빈약한 완충지대에 불과했던 것이다. 실제로 아시리아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이래, 팔레스타인과 이집트에 대한 대규모 원정만 해도 무려
13차례에 달했으며,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아시리아의 침략 야욕은 한층 가열될 것이 분명했다. 미가는 유다의 국민 생활에 일대 각성이 일어나지
않는 한 조만간 멸망할 수밖에 없다고 느꼈다.
다가올 심판
「미가」 1장은 사마리아의 재앙(1: 2-9)과 유다의 재앙(1: 10-16)에 관한 예언이다. 미가가 사마리아와 유다의 멸망을 선포할 즈음, 이사야 역시 수도 예루살렘에서 아시리아의 세력 팽창을 언급했다. 이사야는 비록 아시리아가 예루살렘까지 도달할지라도 결코 야훼의 도성에 아무런 해를 끼칠 수 없으며, 만일 감히 예루살렘을 공격한다면 멸망을 면치 못하리라고 확신했다(「이사야서」 10: 28-34).
그러나 미가는 그와 같은 희망을 가질 수 없었다. 그는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말리라고
확신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예루살렘의 멸망을 반갑게 여겼던 것은 결코 아니다. 모레셋 시골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온 나라를 도탄에
빠뜨린 예루살렘의 지배 계급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찼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수도 예루살렘에 임박한 멸망을 심히 애통하게 여겼다. 예루살렘을 “내
백성의 성문”(1: 9)이라고 부른데서 미가의 예루살렘에 대한 간절한 심정을 엿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가의 심정은 다른
어느 곳보다도 자신의 고향 시골 마을에 쏠려 있었다. 이사야는 아시리아의 유다 침략이 북쪽의 미그론, 믹마스, 놉 등을 거쳐서 행해지는 모습을
그린 데 반해(「이사야서」 10: 28-32), 미가는 자신의 고향인 셰펠라에 닥칠 아시리아의 침략을 예감했다. 「미가」 1: 10-16에서
열거되는 가드, 사빌, 사아난, 벧에셀, 마롯, 라기스, 모레셋 가드, 악십, 마레사, 아둘람 등은 모두 미가의 고향 이웃 마을들이다.
대단치도 않은 이 시골 마을들은 미가에게 예루살렘 이상으로 중대한 의미를 가졌다. 그는 마치 자기 집 지붕에 올라가 저 멀리 바라다 보이는 이웃 마을들을 향해 절규하는 것만 같다. 그는 수도 예루살렘과 유다 전체를 동일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시골의 소박한 민중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유다를 대표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멸망보다는 시골 마을들에 닥칠 재앙이 그에게는 더욱 비통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민중의 예언자
예루살렘 주민보다 시골 사람들에게 더 큰 애정을 보였던 미가는, 유다에 임박한 파멸의 근본 원인인
백성들의 죄악을 정죄할 때, 어디까지나 고향 마을 사람들의 입장에 서 있었다. 이사야가 주로 도시와 궁정의 타락과 음모를 풍자 비판한데 비해,
미가는 주로 농민을 학대한 지주들의 탐욕과 불의를 꾸짖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사야는 도시에 대해서만, 그리고 미가는 농촌에 대해서만 각각
관심을 쏟았다는 말은 아니다. 미가는 이사야가 그랬듯이 수도 예루살렘의 정치적 부패, 타락에
대해서도 질책을 퍼부었다. 또한 이사야는 미가와 마찬가지로 시골 사람들의 경제적 위기를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더 차지할 곳이 없을 때까지,
집에 집을 더하고, 밭에 밭을 늘려 나가, 땅 한가운데서 홀로 살려고 하였으니, 너희에게 재앙이 닥친다”(「이사야」 5:
8).
그러나 미가가 진정으로 관심을 쏟은 것은 고향 마을 사람들이 당한 부당한 학대와 어려운 처지였다. 그는 실로 이
문제에 너무나 몰두한 나머지, 아모스와 호세아가 가장 중대한 죄악이라고 생각했던 지배계급의 사치와 우상숭배 등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정치적 항쟁이나 혁명은 농촌보다는 오히려 도시에서 발생하기 마련이다. 박정희 정권 말기의
부마(釜馬)항쟁, 전두환 정권 초기의 광주민주항쟁 등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일어난 정치운동이었다. 그 밖에 4․19혁명 역시 도시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발발한 것이었다.
이것은 유럽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흔히 유럽사에서 1848년은 혁명의 해라고 불린다.
영국의 런던과 러시아의 페테르스부르크 두 도시를 제외한, 유럽의 모든 대도시에서 이 해에 일제히 혁명이 돌발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도 정치혁명은
모두 도시를 중심으로 해서 일어났다. 그러나 사회적 분규와 봉기는 오히려 농촌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다. 구한말의 동학혁명, 일제시대 만주에서
일어난 만보산(萬寶山) 사건 등은 모두 농촌에서 시작한 것이었다.
이렇듯 사회적 모순에서 비롯된 각종 사태가 주로 농촌에 집중되는
것은, 사회적 비리와 불의가 도시보다는 농촌에서 더욱 철저하고도 극단적으로 자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도시는 농촌에 비해 사회의
계층과 구성이 다양하고 복합적이다. 더욱이 도시민은 농촌 지역에 비해 교육 수준이 높은데다, 비판적 견해를 가진 중간 계급이 있어 이들에 의해
여론이 형성된다. 그리고 다양한 이익 집단들이 제각기 경쟁적으로 이익을 추구하며 서로를 견제하기 때문에 한 두 사람의 실력자에 의해 도시민
전체가 지배당하는 일은 나타나기 어렵다.
그러나 농촌의 경우는 다르다. 농촌 사회는 단순하고 획일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전통적으로 그 구성원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무지한 농민들이다. 그러므로 농촌 사회에서는 몇몇 유력자들이 마음만 먹으면 광대한 지역을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소유할 수 있었고, 또 힘없고 가난한 농민들을 마음대로 지배할 수 있었다. 가난한 농민들 틈에 섞여 살던 미가는 이웃의
농민들이 당한 어려움과 고초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을 괴롭혔던 세력가들에 대해 누구보다도 더 큰 분노를
느꼈다.
금권가들의 농민
수탈
기원전 8세기의 남왕국 유다는 정치적․경제적으로 크게 번영하고 있었다. 웃시야왕(787-756)
치세이래 활발한 상업 활동으로 인해 재부가 크게 증대하여 유다는 엄청난 번영기를 맞이했던 것이다. 이 경우 어느 사회에서든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은, 토지를 갈망하는 부호들이 너도나도 농촌에 손을 뻗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미가의 시대에도 예외가 아니어서, 작은 땅을 갈아 생계를
삼던 영세 농민들은 생존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부자들은 먼저 농민들을 채무자로 만든 다음, 이어서 농민들의 토지와 인신마저 소유해 버렸다.
(유다뿐만 아니라 고대 사회에서는 빚진 자가 빚을 못 갚을 경우 그를 노예로 삼는 경우가 흔히 있었으니, 이를 채무노예제라고
부른다.)
미가는 부자들이 저지른 만행을 신랄하게 꾸짖는다. 금력과 권력을 쥔 그들은 못된 일을 계획하고는 거리낌 없이 해치우는
악당들이다. 탐나는 집과 밭이 있으면 다 빼앗고, 집 임자는 종으로 밭 임자는 머슴으로 부려먹는다. 그들은 백성을 원수 다루듯 하고, 평화롭게
지나가는 사람의 옷을 벗기며, 부녀자들을 정든 집에서 쫓아낸다(2: 1-9). 유다 지배 계급에 대한 미가의 분노는 실로 뼈에 사무치는
것이었다.
“야곱의 우두머리들아, 이스라엘 집의
지도자들아,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정의에 관심을 가져야 할 너희가, 선한 것을 미워하고, 악한 것을 사랑한다. 너희는 내 백성을 산 채로 그
가죽을 벗기고, 뼈에서 살을 뜯어낸다. 너희는 내 백성을 잡아먹는다. 가죽을 벗기고, 뼈를 산산조각 바수고, 고기를 삶듯이, 내 백성을 가마솥에
넣고 삶는다”(3: 1-3).
불의한 재판관들
금력과 권력을 가진 부자들이 농민을 수탈한 주역이라면, 유다의
재판관들은 부자들의 으뜸가는 충실한 하수인으로서 봉사했다. 어느 사회에서든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는 그들의 이익을 정당화, 합법화시켜 주는
기생충과 같은 집단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재판관들이 바로 그런 부류였다. 야곱 가문의 어른이요, 이스라엘 가문의 지도자라는 그들은,
정의(justice)로와야 할 재판(justice)을 뇌물을 받고 불의하게 시행했다.
그들은 정의를 미워했으며, 정직한 것을 구부러뜨렸다. 웃시야 왕 이래로 유다에는
놀라운 경제 성장이 있었고, 그와 같은 경제력을 토대로 수도 예루살렘에는 화려한 건물들이 곳곳에 들어섰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가 백성들의
무고한 피, 그리고 지도자들의 탐욕과 죄악으로 쌓아올려진 것이었다(3: 9-11).
미가는 기원전 8 세기 유다의 경제 번영 이면에
가려진 금권가들의 횡포와 민중의 비참한 삶을 깊이 통찰했다. “경제 발전” 이외에는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었던 정치 지배자들의 추악한
뒷모습을 그는 낱낱이 들추어 정죄했던 것이다. 미가가 살던 시대에 국가 재부의 총량은 외형상 크게 증가했다. 그러나 그것은 몇몇 재산가들에게만
독점되었고, 절대 다수의 농민들은 오히려 이들 금권가들의 노예로 전락하여 비참한 운명에 빠지고 말았다. 전체 인구의 10%가 국토의 70%를
소유하고 있는 한국 현실에서, 무려 2,700년 전에 발한 미가의 예언이 전혀 남의 말 같이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참담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거짓
예언자들
권력에 빌붙어 주구 노릇을 한 것은 재판관만이 아니었다. 소위 종교가라고 하는 자들 역시 돈과
권력에 팔려 정치 지배자들에 봉사했다. 그들은 입에 먹을 것을 물려주면, 만사형통하리라고 외치면서 귀에 듣기 좋은 말만 하지만, 입에 먹을 것을
넣어 주지 않는 자에게는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공갈과 비방을 일삼았다
“예언자라는 자들이 나의 백성을 속이고 있다. 입에 먹을 것을 주면 ‘평화’를 외치고,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면 전쟁을
벌일 준비를 한다. …… 이 도시의 지도자들은 뇌물을 받고서야 다스리며, 제사장들은 삯을 받고서야 율법을 가르치며, 예언자들은 돈을 받고서야
계시를 밝힌다. 그러면서도, 이런 자들은 하나같이 주께서 자기들과 함께 계신다고 큰 소리를 친다. ‘주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우리에게 재앙이
닥치지 않는다’고 말한다”(3: 5, 11).
거짓 선지자들이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신의 생계와 밥벌이를 위해
예언을 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무당, 판수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그들은 복채와 헌금을 갖다주는 자에게 빌붙어서, 굿을 벌이고 복을
빌어주는가 하면, 돈 때문에 남을 비방하고 중상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들은 부자와 한편이 되며, 민중의 사회적 조건에는 눈을 감고, 자기
시대의 죄악에 대해서는 아무런 비판도 가하지 않는다. 요컨대 그들에게는 도덕적 감각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예언자 미가는 그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환상을 볼 수 없을 것이요,
흑암을 만날 것이니, 점을 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예언자들에게는 해가 져서 낮이 캄캄할 것이다”(3:
6).
도덕성을 상실하고 무당, 판수로 전락해버린 거짓 예언자들에게 앞일을 내다보는 통찰력을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는 흔히 “돈에 눈이 멀었다”느니, “황금에 눈이 어두워졌다”는 표현을 하지만, 미가의 예언을 볼 때 이것이 단지 수사적 비유에 불과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엄연한 “도덕적 사실”인 것이다.
도덕성은 지혜를 낳는다.
미가에게는 거짓 예언자들과 달리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꿰뚫어 볼 수 있는 도덕적 통찰력이 있었다. 그는 자신과 거짓 예언자들의 차이를 이렇게 주장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주께서 주의 영과 능력을 채워주시고, 정의감과 아울러, 야곱에게 그의 죄를 꾸짖고, 이스라엘에게 그의 범죄를 꾸짖을 용기를
주셨다(3: 8).
미가는, 야훼를 거스르는 유다 지배 계급의 본거지인 예루살렘의 완전 파멸을 말한 최초의 예언자였다.
“그러므로 바로 너희 때문에 시온이 밭 갈 듯 뒤엎어질
것이며, 예루살렘이 폐허더미가 되고, 성전이 서 있는 이 산은 수풀만이 무성한 언덕이 되고 말 것이다”(3:
12).
예루살렘은 솔로몬이래 야훼의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시각적 상징물이었다. 그와 같은 성전이 잡초로 뒤덮이고,
예루살렘이 자갈밭이 된다는 것은, 유다 백성이라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또 그와 같은 예언을 한다는 것은 비범한 확신과 용기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미가는 예언자로서의 독창적인 영감과 용기를 갖춘 인물이었다.
독일 속담에 “마음은 머리보다도 영리하게 생각한다(Das Herz denkt
klüger als der Kopf.)”는 말이 있다. 거짓 예언자들은 영리한 두뇌를 기민하게 회전 시켜 많은 돈을 긁어 들였으나, 미가는 그런
방식으로는 도저히 자신의 두뇌 능력을 쓸 수 없었다. 아마도 그는 이 방면에는 어리석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악한 거짓 예언자들은 눈 뜬
장님처럼 앞을 내다보는 힘을 잃어버린 반면, 미가는 그 도덕성으로 말미암아 권능과 공의와 재능을 받아 이스라엘의 앞날을 내다 볼 수 있었다.
거짓 예언자들은 영리하되 영리한 것이 아니었고, 미가는 어리석되 어리석은 것이 아니었다.
메시야 출현 예고
「미가」 4장과 5장에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나온다.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의 여러 족속
가운데서 작은 족속이지만,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다. 그의 기원은 아득한 옛날, 태초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5:
2).
미가는 이사야와 더불어, 메시아의 출현을 처음으로 예고한 예언자이다. 그러나 미가와 이사야는 다같이
메시아 출현을 예고했지만, 그 강조점이 달랐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한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열매를
맺는다”(「이사야」 11: 1). “그 날이 오면,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깃발로 세워질 것이며, 민족들이 그를 찾아
모여들어서, 그가 있는 곳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11: 10). 이러한 이사야의 예언에서 강조된 사실은, 장차 올 왕, 곧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다윗 왕을 배출한 유다의 한 위대한 왕실 가문에서 탄생하리라는 것이었다.
미가 역시, 메시아가 다윗 왕의 출생지인
“베들레헴”에서 탄생하리라고 예언했다. 그러나 미가가 한 예언은 이사야의 예언과는 강조점이 달랐다. 미가는 도리어 메시아의 천한 출생을
강조하고자 했다. 따라서 미가는 먼저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의 여러 족속들 가운데서 작은 족속이지만”이라고 전제한 다음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상 그 누구보다도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여느 평범한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가난한 민중 출신이었고, 당시 백성들로부터 신망을 잃고 있었던 전제 군주 사울 왕과
맞서 싸워 승리한 민족사적 영웅이었으므로, 백성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미가는 수도 예루살렘이 아닌 “시골 출신 예언자”인 동시에, 포악한
금권가들에 맞서 대항한 “농민의 예언자”였다.
그가 그린 메시아는 보잘것없는 시골 마을에서 출생했다. 메시아가 압정과 폭정을 일삼는
귀족들의 거주지인 대도시에서 태어나지 않고, 민중 속에서 태어나 민중의 고통과 죄를 함께 나눈다는 것은, 상한 심정을 가진 이스라엘의 지배자들이
목자이기는커녕 백성의 강도요 도둑이었던 것과 크게 대조된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는 미가가 예언한 바와 같은 모습을 지닌 메시아로서
등장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미천한 출생의 노동자였다고 하는 역사적 사실은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그리스도의 조상은 목자였고,
어머니는 농부의 딸이었다. 그리스도 자신은 목수였다. 예수의 여러 비유들에서 잘 볼 수 있듯이, 그리스도의 풍모는 시골의 들판과 가축, 외양간에
잘 어울린다. 또 하인과 장터의 아낙네, 광야의 목자와도 잘 어울린다. 유다의 가난한 농민들은 메시아가 자기들과 같은 신분으로 출생한다는 미가의
약속을 통해서, 새로운 희망을 얻고 인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는 로마제국에서 주로 노동자들과 노예 하층민들에게서 환영을
받았던 것이다.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A. D. 81-96 재위)라고 하면 로마 제국의 기독교 박해자로 유명한
황제이다. 그가 황제로 재위하고 있을 때 예수의 친척 두 명이 살아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예수는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마음을 다하여 왕으로 섬기던
인물인데, 그의 친척들이 살아있다니 로마 황제로서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혹시라도 그 둘 중 한 사람을 옹립하여 예수의 뒤를 이을 왕으로
삼을까 심히 우려한 도미티아누스는 그들을 죽일 작정으로 궁전으로 불러들이도록 했다. 황제는 두 사람을 대하고는 손을 펴보라고 했다. 그들의 손은
노동 일로 검게 그을렸고 피부는 쩍쩍 갈라져 있었다. 이를 본 황제는 두 사람을 돌려보내면서 “우리는 저 같은 노예들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혹시라도 황제의 지위를 위협하지나 않을까 하여 두 사람을 불러들인 것이나, 하찮은 노동자라 하여 다시 되돌려
보낸 것이나, 모두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예수를 정치적인 의미의 왕으로 생각한 것이나, 그 친척 둘이 하찮은 노동자임을
확인하고는 별 것 아니라 해서 코웃음치며 돌려보낸 것이나, 모두가 이 세상을 오로지 정치적․물질적으로만 바라보는 천박한 세계관의 발로였다.
황제가 다른 무엇보다도 두려워해야만 했던 것은, 바로 그 거칠고 쩍쩍 갈라진 손이었다. 로마는 그 후 300년이 채 못되어 기독교에 정복되고 말았던 것이다. 미가의 말처럼, 메시아는 비록 보잘것없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으나(5: 2), 이제 그의 힘은 땅 끝까지 미치게 된 것이다(5: 4).
부정한 되
「미가」 6, 7장은 역사상 상인 집단에 대해 가장 신랄한 비판을 담은
문헌에 속한다. 그는 상인 집단의 가장 비열한 탐욕의 도구인 부정한(가짜) 되, 거짓 저울추 등을 열거하여 비판했다. 미가는 그와 같은 부도덕한
상거래가 이방 사회가 아닌, 종교 민족이자 선택된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국민들 사이에서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에 개탄을 금치
못했다.
상업 활동은 인류 정신사에서 많은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첫째, 상업 활동은 그 업무의 특성으로 말미암아, 소위 귀족
계급에서 널리 행해지는 겉치레라든가 불필요한 형식 등을 배제하도록 했다. 사회적 지위, 학벌, 혈통, 경력보다는 능력 위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 상업 사회의 관행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사람의 신분이나 지위를 묻지 않는, 이른바 “재능에 따른 지위 상승(career open
to talent)”의 원칙이 확립된 것은 18세기의 프랑스 혁명에 의해서였다. 그런데 프랑스 혁명은 바로 상업 활동 등으로 재산을 축적한 시민
계급(부르주아지)이 그 핵심 세력이었고, 이 때문에 프랑스 혁명은 시민 혁명(부르주아 혁명)이라고 불리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상업 활동은
신분제도를 타파하고 인간을 능력 위주로 평가하도록 하는데 커다란 기여를 한 셈이다.
둘째, 상업의 본질은 무엇보다도 신용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상거래는 그 성격상 거래를 시작하기 전에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을 믿도록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상대방의 신용이 전제된 다음에
비로소 거래가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신용카드 역시, 카드 소지자가 자신의 신용을 지키지 못할 경우 중대한
불이익을 감수해야만 한다. 상인들은 신용 사회를 정착시키고, 나아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믿음을 키워나가는데 중요한 역사적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의 모든 일이 그러하듯, 상업에도 어두운 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곧 “거짓”과 “속임수”를 이용한
상술이다. 성급하게 부자가 되고 싶다는 욕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경쟁으로 말미암아 부정직한 상행위가 예나 지금이나 비일비재하게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미가가 지적한 “부정한 되”, “거짓 저울추”는 그 대표적인 사례일 따름이다.
“부정한 되”, “거짓 저울추”란 되를
작게 만들고 저울추를 가볍게 만들어 폭리를 취하기 위한 속임수를 의미한다. 그것은 좀더 넓은 의미로 해석할 때,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마땅히
있어야 할 의무가 이기심과 악의로 말미암아 소홀해졌음을 뜻한다. 미가는 이렇게 자기 시대를
개탄한다.
“이 땅에 신실한 사람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정직한 사람이라고는 볼래야 볼 수도 없다. 남아 있는 사람이라고는 다만, 사람을 죽이려고 숨어서 기다리는 자들과, 이웃을 올가미에
걸어서 잡으려고 하는 자들뿐이다”(7: 2).
여기에서 “신실하다”를 뜻하는 히브리
원어는 “헤세드(인애[仁愛])”이다. 호세아가 특히 자주 사용했던 말이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 “신과 사람 사이”의 충성, 성실,
우애, 친절 등을 뜻하며, 두 경우에 아무런 구분 없이 함께 쓰이고 있다. 미가는 헤세드가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말한다. 그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이제 모두가 피를 흘리려고 숨어서 남을 노리고, 저마다 형제를 잡으려고 그물을 치게 되었다고 미가는 탄식했다.
이러한 세태가
미가의 시대에만 국한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삭막한 경쟁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 자기 가족(가족은 결국 자기 자신의 확장에
불과하다)의 일에만 매달려, 옆을 돌아보지 않으려 하는 풍조를 키워 가고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자신의 테두리 안에 안주하고자 하면, 그
사회는 마치 모래와 같이 응집력을 잃어버리고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다. 의무의 헌신적 이행과 이에 더하여 타인에 대한 선의와 성실성이 있을 때
비로소 그 사회가 바로 설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 이전에 “신과 사람 사이”의 올바른 관계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 히브리 종교의 핵심이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여라’하셨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이
두 계명에 율법과 예언자들의 본 뜻이 담겨 있다(「마태복음」 22: 37-40).
“신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 히브리 종교에서 이 두 계명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계명으로
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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