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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평구 선생

<노평구전집> 문학과 품성(品性)

by 안티고네 2000. 12. 15.

우리가 문학의 위대한 가치를 모르는 바 아니다. 칼라일은 셰익스피어의 작품과 인도를 바꿀 수 없다고 했는데, 과연 우리는 오늘날 위대한 문학의 출현을 절실히 요구해 마지않는다. 문학의 대중성과 그것이 민족 성격에 미치는 힘과 정신적인 영향을 생각하면, 실로 모든 사상·철학·종교 이상의 것을 거기에서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근래 나는 신문 지상을 통해 문학자들의 술 놀이 대회 등 광고에 접해 크게 놀라고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하여 오늘날 한국의 문학자들이 문학과 품성의 문제를 완전히 망각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속담에 못난 것이 못난 짓부터 배운다고, 우리에게 있어서는 문인이 되려면 술부터 알고, 여자를 알고, 또 무엇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 큰 조건으로 되어 있어, 이것이 또한 세상 사람들이 마음 속으로 문학자를 일종의 망종(亡種) 취급하는 원인이 되어 있다.

한국의 문학자란 실로 취기(醉氣)를 영감으로 알고, 계집을 시신(詩神)으로 착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우리는 위대한 문학이란 작가의 고귀한 인생과 품성의 발로라고 알고 있다. 단테의 <신곡>은 실로 그의 인생관 이상 종교의 표현이며, 밀턴의 시편들은 그의 고귀한 청교도 정신의 발로인 것이다. 브라우닝의 사랑은 결코 음욕이 아니며, 톨스토이는 인도주의 작가이기 전에 그 자신 인도주의자, 아니 이의 실천자였다.

따라서 한국의 문학자들은 문학을 순수한 재질과 기교의 산물로 알고 있으나 그것은 표현상의 문제이고, 내면화되고 인격화된 생활과 사상과 철학과 종교가 없는 상황에서는, 이 재질은 악마의 기능을 할 뿐이다. 내용이 없으면서도 무엇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할 뿐, 국민에게 아무런 이상도 도덕적 힘도 제공하지 못한다. 도리어 이를 타락시킬 뿐이다.

그렇지 않아도 사람의 내심의 상태란 죄악적으로, 이에서 오는 고투이며 절망인데, 우리는 저속한 문학으로 또 이를 부채질 할 필요가 도무지 없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한국의 문학자들은 대체로 다방에서 살고, 그 작품 역시 다방에서 산출되어 나온다는 것이다.

끝으로 원고료의 문제인데, 나는 예술가들이 이 문제로 너무 어린애같이 밥투정을 하지 말기 바란다. 그런 불평은 오히려 자신의 정신을 죽일 뿐이다. 배가 고파 예술 창작을 못하는 자는 밥 때문에 이를 하는 모독을 범하지 말고, 애당초 이를 그만두는 것이 좋다. 그리고 배가 고파 죽더라도, 아니 생명을 바치고 가족을 희생시키고서라도 진정한 재질과 사명의 자각, 사상의 충동과 영감 때문에 이를 할 사람만 할 일이다.

호메로스도 걸인이었다. "아, 괴로운 일이여, 남의 집 층계를 오르내리고, 남의 밥을 얻어먹는 일이란‥‥‥" 이는 망명 중에서 <신곡>을 쓴 단테의 술회이다. 그리고 밀턴은 실명(失明)의 비운 가운데서 <실락원>을 완성했음을 알아야 한다.

<성서연구> 제57호 (1956년 1월)






소쇄원

"...배가 고파 예술 창작을 못하는 자는 밥 때문에 이를 하는 모독을 범하지 말고, 애당초 이를 그만두는 것이 좋다. 그리고 배가 고파 죽더라도, 아니 생명을 바치고 가족을 희생시키고서라도 진정한 재질과 사명의 자각, 사상의 충동과 영감 때문에 이를 할 사람만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