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기독교는 수백 개의 교파로 나뉘어 있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제대로 이해하기가 대단히 어렵게 되어 있는 현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신앙의 중심에 철저하도록 힘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수백 개 교파라고 하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대체로 외적인 문제, 즉 세례란 필요한가의 여부, 세례가 유아에게도 필요한가의 여부, 세례가 상징인가 공덕인가의 문제, 그리고 세례시 물 속에 잠기는가 아니면 물만 가볍게 떨어뜨리는가 하는 문제 등으로 교파가 갈라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런 식의 쓸데없는 문제를 제외하고 내적·정신적인 면에서 기독교를 구분한다면, 대체로 세 가지 경향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과거 기독교사에서도 그랬고 현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 것으로 보인다.
즉 예수의 속죄 신앙을 중심으로 하고, 좌측으로 기독교를 윤리 도덕적으로 이해하여 산상수훈 같은 예수의 교훈에 치중하는 경향, 그리고 우측으로 예수의 부활에 중심을 두는 내세적인 신앙, 이 세 가지로 구분해서 생각할 수 있다. 나 자신은 예수의 속죄 신앙이야말로 기독교의 중심이라고 주장하는 바이며, 또한 이를 분명히 하는데 나의 생애를 바치고자 한다.
그런데 전자 윤리적인 신앙이란 대체로 현세적인 사업교로 타락하여 기독교를 정치의 들러리나 하는 천박한 종교로 만들어 버린다. 설령 이것이 높은 의미의 인도주의로 인류의 평등과 박애 등을 부르짖고 실천하려는 이상주의적 방향으로 나아가더라도, 결국 인류의 죄악 문제에 부딪혀 운신도 못하게 되고 만다.
예수의 산상수훈의 찬미자요 이의 실천자인 톨스토이는 러시아 사회 문제는 차치하고 자신의 가정 문제마저 해결하지 못하고, 80 고령에 가출하여 비참하게 객사하고 말았다. 인도주의자들은 톨스토이를 극구 찬양하지만 나는 그의 종말을 인도주의 자체의 패배이자 자살로 보는 바이다.
그러면 후자 내세 신앙은 어떤가? 나는 이 역시 불건전한 것으로 본다. 좋은 의미에서 내세 신앙은 내세의 희망으로써 현실의 모든 고난과 유혹과 죄를 극복하고 살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지만, 사실상 현실의 고난과 유혹과 죄악이란 내세의 희망이나 이에 대한 희망 정도로 쉽사리 물리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내세 신앙이 불교와 같이 철저히 현실을 도피하여 입산 수도에 전력하면 몰라도, 본래 그 성격이 그렇지 못한 기독교에 있어서는, 도리어 이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인생의 떳떳한 모든 임무와 책임과 노력을 저버리고, 도덕적으로 불건전한 상태에 빠져들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 내세 신자들이 소위 그들의 기쁨이라고 말하는 열광적인 또는 신비적인 상태도, 사실은 내적 생명의 충실이라기보다는, 도리어 이의 분열과 고민을 인위적으로 억제하려는 수단에 불과하여, 수많은 불건전한 신앙 현상 내지 정신 질환에 빠져드는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윤리적인 면과 내세적인 면 이 둘은 종교와 인생에 있어서, 그리고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내용을 이루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른 무엇보다도 속죄교이며,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유일 중심적인 진리임은 우리의 신앙 체험의 사실로써 부정될 수 없는 것이다. 이 속죄야말로 사람의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여 전자의 윤리 도덕적인 실천 생활을 향한 길을 열 뿐만 아니라, 또한 죽음의 근원인 죄악의 제거로 말미암아 사람에게 신생(新生)의 체험과 함께 부활 생명을 제공하여,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의미에서 내세와 부활을 믿고 현실에서부터 부활 생명으로 살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이 속죄 신앙에서 오는 내적 생명이야말로 신자에게 있어서 진정 현실을 이기고 모든 유혹을 물리치는 힘이며, 또한 천국 대망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속죄 신앙에 서지 못하는 기독교는 결코 인생의 현세 및 내세 문제를 진정한 의미에서 해결할 수 없다. 속죄야말로 기독교의 중심, 아니 전부인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곧 속죄교이다.
<성서연구> 제37호 (1953년 3,4월)
차명님 <소망>

'노평구 선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평구전집> 사명의 실천 (0) | 2000.09.20 |
---|---|
<노평구전집> 독립주의 (0) | 2000.09.20 |
<노평구전집> 김교신 선생과 하나님에 대한 신뢰 (0) | 2000.09.16 |
<노평구전집> 그리스도인과 국법 (0) | 2000.09.14 |
<노평구전집> 신앙의 성장 (0) | 2000.09.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