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은 김교신 선생의 달이다. 세월이 흐르니 요사이는 선생에 대한 간절한 마음이 더해진다. 아둔한 내가 조금씩이라도 선생을 더 이해하여가기 때문인가.
선생 이야기가 나오면 대개 선생이 무서운 분이었다고들 말한다. 나 자신도 집회에 지각하고 정면으로 책망을 들은 일도 있다. 나는 도쿄(東京) 마루노우치(丸之內) 쓰카모토(塚本) 선생 집회에서 신앙을 배우던 시절, 몇 번 선생을 대한 일이 있었다. 집회가 파한 후 멀리 이국 땅에서 뵙게 된 선생이 반갑기도 하고 혹 좋은 말씀이라도 들을까 하여 따라나서면, 선생은 이내 "오늘은 좋은 말씀을 많이 들었으니 돌아가 공부하라"고 하시고는 혼자 가버리시곤 하셨다. 그럴 때마다 나는 무서운 선생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생 선생을 가까이 할 기회를 썩 많이 갖지는 못했으나, 나에게는 무서운 선생이라는 생각보다는 신뢰의 선생이라는 인상이 더욱 깊다. 나는 도쿄에서 공부를 하던 중 이따금 서울에 올 때면 선생 댁을 방문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늘 저녁 식사를 대접해 주셔서, 여러 차례 선생과 함께 식탁에 앉아 선생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선생이 식사 기도를 끝낼 때마다 손수건을 꺼내 얼굴에 대시는 것과, 평소 말씀이 무거우셨던 선생의 기도의 마지막이 감사와 눈물로 얼룩지던 것을 목격했던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무서운 선생보다, 하나님 앞에 서신 신뢰의 선생을 느낄 수 있었다.
일제 시대 태평양전쟁이 벌어지던 중, 이른바 <성서조선사건>이 벌어지기 전에, 함석헌 선생이 일본 도쿄 경시청 지시로 조선에서 검거된 적이 있었다. 그때 김 선생께서 도쿄 경시청에 알아보기 위해 직접 일본에 오신 적이 있었다. 여러 날 도쿄에 머무르신 후 귀국하시기 전날 밤, 나는 선생의 숙소였던 도쿄의 이토(伊藤祐之) 선생 댁 2층으로 선생을 찾았다. 오신 일도 별로 성과가 없고, 따라서 모든 형세가 어려운 것을 나도 짐작할 수 있었다. 선생은 부산에 내리시면 선생 자신의 신변 역시 위태로울지 모른다고 말씀하시기도 했다.
그때 나는 서슴지 않고, 그러면 가이사라 빌립보에서의 베드로처럼 여러 날 더 머무시고, 부산과 서울에 연락하여 형편을 알아보신 다음에 출발하시면 어떻겠냐고 말씀드렸다. 그때 선생은 "될 대로 되겠지. 맡길 수밖에 있나" 하시며, 두 손을 올려 뒷머리에 대시고 얼굴을 들어 위를 쳐다보시며 그 장대한 몸을 그대로 다다미 위에 조용히 누이셨다. 나는 이때의 선생의 표정이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어린애와도 같이 하나님 아버지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신뢰하는 태도, 바로 그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선생의 유학자(儒學者)적인 강직과 근엄을 말한다. 그리고 그 강철같은 의지를 말한다. 사실 선생은 모자 하나도 똑바로 쓰지 않으면 마음을 놓지 못하는 분이셨다. 그러나 선생 역시, 선생의 그 뛰어난 의지력과 추호의 거짓도 불허하는 진실로써 도덕을 추구, 실천하신 나머지, 사도 바울같이 심중의 악을 발견하고 예수의 사죄의 복음에 기어코 굴복하셨다. 이렇게 하여 선생은 또한 신뢰의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선생의 인격의 위대한 특색은 눈물이 많은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선생의 눈물을 순전한 우국(憂國)의 눈물, 의분의 눈물, 진실에 대한 애끓는 눈물로만 보고싶지는 않다. 그것은 참 인격의 깊은 밑바닥에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 앞에 선생의 그 인간적인 굳은 심지(心志)가 산산이 부서진 후, 실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선생의 상한 심령에서 솟구치는 뜨거운 눈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선생의 혹심한 질책의 배후에는 언제나 깊고 뜨거운 사랑이 감돌고 있었다. 그저 단순한 불만이나 증오는 아니었다. 언젠가 겨울 집회에서 선생이 바울 서신을 강해하실 때의 일이었다. 선생은 전날 학교에서 자기 집안의 세도를 믿고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던 어느 학생이 너무 괘씸해서 피투성이가 되도록 죽어라 하고 때렸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이야기를 하시는 선생의 눈에서는 눈물이 글썽거리고 있었다.
150호를 넘겨 간행된 선생의 <성서조선>은 대체로 박물(博物, 오늘날의 지리·생물) 교사였던 선생이 안으로 자물쇠를 잠근 박물 교실에서 집필, 편집하셨다고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선생의 불굴의 의지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는 거기에서 하나님 앞에 엎드린 기도와 신뢰와 눈물의 선생을 생각한다.
개인의 명예와 이익을 위해 싸우는 투사도 많다. 국가와 민족을 위한 의분에 불타는 이도 없지 않다. 그러나 선생과 같이 눈물로써 하나님을 의지하고 또 우리들을 책망하는 신뢰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은 찾을 수 없다. 사람으로서는 절망밖에 없는 작금의 우리 현실에서 나는 더욱 신뢰의 선생, 눈물의 선생을 그리워한다.
<성서연구> 제37호 (1953년 3·4월)
고갱 <황색의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노평구 선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평구전집> 독립주의 (0) | 2000.09.20 |
---|---|
<노평구전집> 기독교는 속죄교이다. (0) | 2000.09.20 |
<노평구전집> 그리스도인과 국법 (0) | 2000.09.14 |
<노평구전집> 신앙의 성장 (0) | 2000.09.11 |
<노평구전집> 쓰카모토(塚本) 선생의 성서 번역 출판 (0) | 2000.09.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