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쥔장 서평

17. 애서광(愛書狂) 연대기 <젠틀 매드니스―책, 그 유혹에 빠진 사람들>

by 안티고네 2018. 2. 23.

애서광(愛書狂) 연대기

 

니콜라스 A. 바스베인스 지음, 김연수, 박중서, 표정훈 옮김, <젠틀 매드니스, 그 유혹에 빠진 사람들>(뜨인돌, 2006)

 

애서광(愛書狂)이라면 그래도 표현이 젊잖다. 풀어 말하면 책에 미친 사람이다. 책 제목대로 하면 젠틀 매드니스(A Gentle Madness)니까 곱게 미친 사람쯤 될까. 독서율이 OECD 가입국 중 꼴찌 수준에 머무는 우리 처지에서 보면, ‘개도 안 먹는책 수집에 미쳐버린 미치광이들의 이야기는 낯설고 신기하다. 그들의 모습은 실로 다양하고 기상천외하다.


랠프 엘리스 2세라는 남자가 있다. 그는 열다섯 살 때부터 조류학 책을 모으기 시작했다. 어찌나 미친 듯이 책을 모았던지, 32살 되던 1940년에 어머니는 그를 요양소로 보내버렸다. 아들이 집안 재산을 다 날려버릴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지만, 미치지는 않았다라는 진단과 함께 엘리스는 곧 요양소를 나왔고, 다시 예전보다 더욱 열심히 책 사냥에 나섰다. 1945년 그는 자신의 책을 모두 캔자스 대학에 기증했다. 기증의 대가로 엘리스가 대학 측에 요구한 것은, 애장서들을 보관할 수 있는 독립 공간과 자신이 머물 사무실뿐이었다. 캔자스 대학 측은 그의 요청을 흔쾌히 들어주었다. 하지만 6개월 뒤 엘리스는 어느 호텔 방에서 폐렴으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의 나이는 37세였다.


15세기 필사본 수집가인 우르비노 공작 페데리코 몬테펠트로(14221482)는 펜으로 일일이 쓴 책(필사본)만을 수집했다. 필사본이 아닌 책은 수집가를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라고 여겼다. 당시 유럽 전역에서 새로운 유행의 물결을 타고 있던 활판 인쇄본은 그의 서재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었다(구텐베르크가 활판 인쇄술을 완성한 것은 1440년경이다). 필사본만을 책으로 여겼던 그는 책이란 대량생산이 불가능한 물건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모습은 역사적 전환기에 종종 목격할 수 있다. 1980년대 콤팩트디스크(CD)가 널리 보급될 무렵 엘피(LP) 애호가들이 보였던 냉소적 반응, 2000년대 초 디지털 카메라가 확고한 대세로 자리를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필름카메라에 애착을 보인 일부 사진가들의 모습과도 닮아 보인다. 새로운 추세와 유행을 인정하지 않는 보수적 성향의 사람은 어디에나 있지 않은가.


제 돈으로 책을 사들인다면 그래도 나은 편이다. 대학도서관 같은 공공기관의 소장 도서를 몰래 도둑질해서 어마어마한 규모의 컬렉션을 만드는 애서광도 있다. 스티븐 블룸버그(1948)20세기 최대의 책 도둑이다. 그는 북아메리카(미국과 캐나다)268개 도서관을 뒤져 23,600여 권의 책을 훔쳤다. 하버드 대학, UCLA, 듀크 대학, 미네소타 대학, 뉴멕시코 대학, 코네티컷 주립도서관, 워싱턴 주립대학, 미시간 대학, 위스콘신 대학 등을 털었다. 훔친 책의 무게는 무려 19톤에 달했다.


블룸버그는 미네소타 대학 도서관에서 그 대학 교수의 신분증을 훔친 다음, 교수 행세를 하며 북미의 다른 도서관들을 자유롭게 이용했다. 품이 넉넉한 옷을 입고 그 안쪽에 큼직한 주머니를 꿰매어 붙인 다음 거기에 책을 숨겨가지고 나오는 수법을 썼다. 일단 책을 고르면 대출카드 봉투를 떼고, 도서관 스티커도 떼어낸다. 책 속에 경보장치가 있는지 확인한 다음, 도서관 인장표시를 지우기 위해 책모서리를 사포로 문지른다. 빼돌린 책은 엘리베이터에 싣고 아래층으로 내려와 트럭으로 실어 날랐다. 책이 워낙 많아 트럭에 싣는 것도 큰일이었는데, 블룸버그는 지나가던 학생들로부터 도움을 받기도 했다.


그는 용의주도하게 목록별 수집방식으로 책을 훔쳤다. 특정 주제들을 정해놓고, 그 주제와 관련된 모든 책을 완벽하게 수집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해당 주제에 대한 완벽한 자료 컬렉션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른바 블룸버그 컬렉션(!)’이다. 그러나 그는 동업자가 고발하는 바람에 경찰에 체포되고 만다. 훔친 책의 가격은 시가로 무려 2천만 달러에 달했지만 책을 훔친 목적은 돈이 아니었다. 체포된 후 정신감정을 받기 위해 의료시설에 감금되었을 때, 같은 시설에 있던 마피아 두목이 물었다. “재주도 좋은 녀석이 시시하게 보석도 아닌 책 따위를 훔쳤느냐?” 블룸버그는 대답했다. “팔기 위해 책을 손에 넣은 게 결코 아닙니다. 다만 책을 갖고 싶을 뿐이었어요.” 마피아 두목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답변이었을 것이다.


책 도둑질까지 서슴지 않은 블룸버그의 경우는 물론 극단적인 사례에 속한다. 그러나 부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애서광들은 역사 속에서 중대한 기여를 했다. 그리스 고전 필사본을 찾아내기 위해 유럽 곳곳의 수도원 도서관을 찾아 헤맨 최초의 근대인페트라르카(13041374)의 노력이 없었다면 이탈리아 인문주의(Italian Humanism)’는 태동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도저히 다스릴 수 없고 채워지지도 않는 욕망 하나를 갖고 있다고 고백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책을 향한 욕망이었다. 서양 역사의 물줄기를 중세에서 근대로바꾼 욕망이다. 한국 사회에서 거의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욕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