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쥔장 서평

15. 마라톤 영웅 손기정과 그의 시대<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

by 안티고네 2017. 12. 1.

마라톤 영웅 손기정과 그의 시대

손기정 지음,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학마을 B&M, 2012)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누가 나갈 것인가를 놓고 일본 및 조선 육상계는 비상한 관심을 쏟고 있었다. 1935113일 드디어 올림픽 출전 국가대표 마라톤 선수를 뽑는 예선전이 도쿄에서 벌어졌다. 양정고보 재학 중이던 손기정(1912~2002)2시간 2642초라는 세계 최고 기록을 세우고 우승했다.

경성으로 돌아온 손기정은 동포들로부터 열렬한 환대를 받는다. 경성역(서울역) 앞에는 1백여 명의 양정 학우들이 오색 테이프를 던지며 환호성을 올렸다. 이어 마라톤 우승 축하연이 명월관에서 열렸다. 많은 하객들이 모였다. 미국 선교사이자 경신(儆新) 학교장인 게일(James S. Gale, 1863~1937) 목사가 축사를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양 사람들이 정구(테니스)하는걸 보고서는 왜 힘든 일을 하인에게 시키지 않느냐던 조선 땅에서 오늘 이렇게 훌륭한 마라톤 우승자를 키워냈다. 손 군의 우승을 보니 조선 사람들의 의식도 많이 달라졌음을 느끼게 된다.”

 

193664, 손기정은 양정고보 전교생과 교직원들, 조선 육상 관계자 및 수많은 시민들의 뜨거운 환송을 받으며 서울역을 출발했다. 열차는 곧 신의주에 도착했고, 그곳에서도 군중들의 열렬한 환송이 기다리고 있었다. 신의주를 출발한 기차는 단둥, 봉천, 하얼빈, 모스크바를 거쳐 717일 베를린에 도착했다. 장장 한 달 반의 여정이었다.

 

일본 선수단에는 여자 선수가 18명 있었는데, 입장식 때 그들을 어느 위치에 세우는가를 놓고 논란이 있었다. 서양 풍습에 따라 여성을 앞세우자는 사람도 있었고, 맨 뒤에 세우자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레이디 퍼스트라는 서양 관행대로 맨 앞에 기수, 그 다음 선수단장, 그리고 여자 선수가 선두에 서게 되었다. 그 뒤를 마장마술 경기에 출전하는 군인 선수들, 그리고 남자 선수들이 행진했다. 군인 선수들은 여자 선수들이 자기들보다 앞서 나가는 게 불쾌하다며 행진하는 도중에도 소리 내어 불평을 털어놓았다.

 

193689일 오후, 마라톤 경기를 중계하던 일본 방송의 아나운서는 격정에 못 이겨 눈물을 흘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손 군, 손 군이.” 더듬거리던 그는 한참 후에야 손기정 군이 우승했습니다! 일본 마라톤의 4반세기에 걸친 소망이 이루어졌습니다.”하고 손기정의 승리를 전했다.

 

베를린 올림픽은 히틀러가 총애하던 여류 영화감독 레니 리펜슈탈(1902~2003)에 의해 기록영화 <올림피아>로 남겨졌다. <올림피아>에서 리펜슈탈이 가장 주목했던 선수는 손기정이었다. 과묵한 동양의 마라토너에게 반한 그녀는 <올림피아>에서 손기정의 영상을 상당히 비중 있게 다루었다. 뛰어난 표현력과 영상 기법으로 스포츠 기록영화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올림피아>는 베니스 영화제 최고작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도쿄 개봉 때는 수천 명이 극장을 에워싸고 입장 차례를 기다려야 할 정도였다. 손기정과 리펜슈탈은 종전 후에도 몇 차례 만나곤 했다.

 

89일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올림픽 시상대에 오른 손기정의 모습은 즉각 세계 각국으로 전송되었고, 조선 내의 신문들도 열광했다. 미나미 지로(南次郞) 조선총독은 손기정 선수는 우리 반도의 자랑이다. 조선 반도에는 이 같은 우수 청년들이 많이 있다. 이것은 일본을 위해 참으로 기쁜 일이다.”라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825일 한낮이었다. 윤전기에서 뽑혀 나오는 동아일보 사회면에는 자랑스러운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의 늠름한 모습이 실렸다. 그러나 나라 잃은 국민의 슬픔을 보이려는 듯 가슴에는 나라를 상징하는 아무런 표시도 없었다. 이른바 일장기 말소사건이었다. 일본 경찰은 즉각 동아일보 사옥에 출동했다. 경기도 경찰부는 모의에 가담한 기자 등을 체포해 40여 일 동안 고문하면서 이 사건이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자백 받으려고 날뛰었다. 827일 조선총독부는 동아일보에 정간 처분을 내렸다.

 

당초 조선총독부는 손기정의 우승 소식을 듣고 정치적 선전물로 이용하기 위해 대대적인 환영 행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일장기 말소사건이 터졌고, 깜짝 놀란 총독부는 모든 환영 행사를 금지시켰다. 마라톤 영웅 손기정은 감시 대상이 되었다. 머물던 숙소에는 툭하면 형사들이 찾아와 어디서 편지 온 것 없느냐? 누가 찾아오지 않더냐?”고 시시콜콜 캐묻고 다녔다.

 

1937년 양정을 졸업한 손기정은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 상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입학 직후부터 사고가 터졌다. 선배들이 주선한 신입생환영회에 경찰이 들이닥쳤다. 누군가의 제보로 학생들의 비밀 집회가 열린다 해서 달려온 것이었다. 손기정을 심문하던 경찰은 한참을 캐묻다가 별다른 혐의점을 찾지 못하자 다음부터는 사람 많은데 가지 말라고 주의를 주고는 내보냈다. 그 후로도 손기정이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일본 경찰의 그림자가 따라다녔다.

 

손기정은 차라리 일본 본토에 들어가 일본 사람 속에 섞이는 게 악몽 같은 감시의 눈초리를 떨쳐버리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2학기에 보성을 떠나 일본의 메이지(明治)대학에 들어간다. 마라톤 왕 손기정의 입학 조건은, 다시는 육상 운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마라톤 선수로서 어디에도 얼굴을 내밀지 말고 쥐 죽은 듯이 엎드려 있으라는 뜻이었다. 날개 꺾인 식민지 청년의 비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