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적 영성과 '조선적 기독교'의 모색 (ASIAN SPIRITUALITY AND KOREAN CHRISTIANITY BY LEE YONGDO AND KIM KYOSHIN) / 이정배 (한국문화연구, Vol.- No.2, [2002])
8-541-02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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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들어가는 글
본고는 탄생 100주년을 맞는 위대한 한국적 사상가, 이용도와 김교신의 신학적 지평을 연구하고 그들이 모색해 온 ‘조선적 기독교’의 실상을 동양적 영성의 시각에서 조명하려고 한다. 기미독립운동의 좌절이후 기독교 신앙의 내세화, 교리화 그리고 비정치화 경향으로 인해 ‘민족교회’ 이미지가 완전히 소멸되어 가던 때에 이분들은 민족애를 토대로 조선을 위한 기독교를 주창하고 나섰다. 이 두 사람은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유입된 보수적 신학체계를 거부했고 그들에게 빌붙어 이득을 챙기는 교권화된 조선교회 지도자들에게 대항하였으며 조선 민족의 천부적 권리를 빼앗는 일제를 향해 자신의 방식대로 저항하다가 이들 모두로부터 배척을 받아 짧은 인생을 마감한, 참으로 의로운 신앙의 선각자들이었다. 그들은 진정 민족의 참된 평화를 위해 스스로 날선 검이 되어 거짓된 세력과 싸웠으며 당시의 교회를 향하여 ‘회칠한 무덤’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었던 하느님 영의 소유자들이었던 것이다. 이들이 활동했던 1920년, 30년대 한국 상황은 로마의 압제하에 있던 예수 당시의 유대 현실과도 비슷하며, 세계화의 미명 하에 주체성을 상실하고 있는 오늘 우리의 처지와도 닮아 있고, 또 짧은 삶의 여정속에서 펼쳐진 그분들의 역할이 예수의 생애를 보는 듯하여 오늘 우리에게 한국인으로서의 기독교인 됨의 의미를 새로이 던져 주고 있음이 틀림없다.1) 21세기를 맞는 한국 교회가 이분들의 문제의식으로부터 새롭게 시작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같은 목적을 갖고 있었더라도 조선적 기독교를 형성해 나가는 방식에서 두 분 간의 차이점이 분명하게 존재한다. 목사와 평신도라는 외형적인 모습 말고도 그들의 교육배경, 종교체험의 방식, 가정환경 등이 기독교를 이해하는 방법론적 차이점을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다. 무속적인 신비체험을 지닌 이용도가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며 하느님 계시를 感(느낌)으로 알려고 하였다면 김교신은 이성과 합리성을 강조하며 성서 연구를 중시하였고 인간의 점진적 수신의 과정을 밟아 나가려고 하였다.2) 이용도가 자아(ego) 없는 삶을 영성의 본질로 삼을 만큼 노장적 사유 도상에서 기독교를 이해한 데 반해 김교신의 원어로 성서읽기, 양심을 지닌 인간으로서의 명분강조 등은 그의 기독교적 삶이 유교적 영향사 속에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에 때로는 김교신이 용도식의 부흥회를 비이성적인 것으로 비판하기도 했으며 이용도가 김교신의 무교회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를 갖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용도가 시종일관 學生心을 갖고 살려고 했으며 김교신이 이른 새벽마다 사찰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산 속에서 기도를 했었다는 사실은 상호간에 공통된 기질이 존재하였음을 보이는 대목이다.3) 동아시아 전통 속에서 유교와 노장 사상이 상호보완적 구조 속에서 존재했던 것처럼 이들 영혼 속에서도 동아시아의 영성이 함께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무속적 신비주의를 머금고 있는 노장적 영성과 유교적 수행론이 저마다 이용도와 김교신에 있어 ‘조선적 기독교’를 형성하는 사상적 토대가 되었음을 부정하기 어렵지만 이들의 신학적 지평을 융합시킬 수 있는 가능성 또한 없지 않다고 생각해본다. 본고에서는 바로 그들이 모색한 ‘조선적 기독교’를 차이의 관점에서보다는 동양적 영성의 큰 틀에서 새롭게 하나로 조망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이점에서 이용도와 김교신의 사상사적 위치는 한국 신학사 속에서 새롭게 조명될 필요가 있다.
주지하듯 이용도와 김교신 양자는 한국 신학사에 있어 지금껏 주류의 자리를 점하지 못하고 있다. 열광적 신비주의자라든가 무교회주의 자라는 그들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그들의 실상을 압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접어들며 유동식 교수를 중심으로 한 이용도의 생애와 사상연구회 모임을 통해 그리고 일본에서 교회사를 공부하고 돌아온 학자들의 김교신 연구 결과들로 인해 새로운 평가와 조명이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지금껏 선교 1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한국 기독교는 보수주의, 진보주의 그리고 자유주의적 신학 노선으로 대별되고 있다. 이는 선교의 주체가 ‘개화’였던 시기부터, ‘독립’의 시기를 거쳐 ‘민주화’를 말하던 60년대를 지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조금씩 그 형태를 달리하여 발전해 왔다.4) 보수주의가 神의 절대 초월성을 강조하며 교회중심의 신앙 생활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다면 진보주의는 神의 성육신에 근거하여 역사참여, 현실개조의 뜻을 품고 있으며, 자유주의는 동양 종교들 간의 만남을 통해 기독교 복음의 토착화를 모색하려는 신학적 입장을 지닌 것이라 하겠다. 이들 각자 사조는 저마다 정당성과 한계를 아울러 지니는 것으로 통합되어야 할 성질의 것인바, 불행하게도 지금껏 별개의 내용으로 존재해 왔다. 이 점에서 볼 때 이용도, 김교신은 하느님의 영, 곧 복음의 세계에 확실히 붙잡힌 사람들이며 진보주의자들이 관심을 갖는 민족 문제를 신학의 주제로 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복음을 종교적 배경과의 연속선상에서 이해하려고 했던 사상가들로서 한국 개신교 사조를 통합시킬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 예수에 미친 사람으로, 민족의 문제에 관심을 집중했고 동양적 영성을 매개로 복음을 표현했던 이들 사상을 한국 신학사 속에서 주류의 위치로 새롭게 자리 매김하는 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다.
이상의 문제의식을 근거로 필자는 본 논문을 다음의 순서로 정리하여 물음에 대한 답을 풀어보고자 한다. 첫째, 세계 내 존재로서의 이용도, 김교신의 삶과 생각. 둘째, 동양적(한국적) 영성과 민족주의 - 민족주의의 두 다른 시각. 셋째, 조선적 기독교의 모색-영적 생명 운동과 무교회주의. 그리고 마지막으로 통합적 사상가로서의 이용도와 김교신, 한국 신학사 다시 쓰기.
Ⅱ. 세계 내 존재로서의 이용도와 김교신, 그들의 삶과 생각
인간을 주관적인 순수의식으로 파악하지 않고 ‘세계 내 존재’(In-der-Welt-Sein)로 이해한 것은 철학사의 전회를 이룬 하이데거, 가다머의 공헌이다.5) 이때의 세계란 단순히 주변 환경, 풍토만이 아니라 인간의 삶이 이루어지고 그 의미가 살아 있는 생활세계, 실존적 삶의 총체적 존재구조(지평)를 의미한다. 그렇기에 인간은 이런 세계를 소유할 수 없고 오히려 그것에 의해 구성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 따라서 시공간적, 문화적 정황 속에 얽혀져 있는 주체로서, 그리고 사회적, 문화적 산물로서 인간은 언제든 자신이 누구인지를 먼저 생각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어떤 새로운 사상이나 종교를 만나게 될 때 그 자신의 고유상황이 해석을 촉발시키고 관계를 형성해 가는 일차적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6) 이것은 어느 누구든 전통과 관계된 삶의 지평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보여주는 바다. 이 점에서 볼 때 이용도와 김교신의 조선적 기독교는 동아시아적인 그들의 삶의 지평이 기독교 세계관과 만나 지평들 간의 융합을 이룬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지평 융합의 해석학을 혼합주의로 매도하는 부정적 평가가 한국 신학계에 여전히 존재한다. 이것은 이용도와 김교신을 반기독교적으로 매도했던 당시의 그 입장과 일치하는 부분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먼저 종합적 혼합주의(Synthetischer Synkretismus)와 공생적 혼합주의(Symbiotischer Synkretismus)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7) 전자가 기독교 문화 및 그 종교 체제가 전통문화체계에 의해 압도되어 자신의 본래성을 상실하는 경우라면, 후자는 상호 본래성을 유지하면서 자신들의 지평이 확장되고 더욱 깊어지는 상태를 의미한다. 후자적 의미에서 혼합주의는 지평융합의 긍정적 형태로서 성육신 신학의 철저화이며 종교적 차이성, 생명성을 얻도록 하는 요인이라고 평가해도 좋을 것이다. 이런 이해를 근간으로 우리는 조선적 기독교를 주창한 이들 한국적 사상가들의 이해의 선구조, 즉 기독교를 받아들인 한국적, 동아시아적 주체성이 무엇이었는지를 그들의 생애를 통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이용도 목사와 김교신 선생은 3·1운동의 적극 가담자로서 조선 독립을 위해 선교사들의 반문화적 식민지 이데올로기를 거부하였으며 교회의 교권화 및 신앙의 형식화와 싸워가며 복음 속에 내포된 문화창조력을 이 땅 위에 나타내 보인 분들이었으나 그 표현 방식 및 양태가 상호 극단적으로 달랐다. 이것은 그들간의 가정 및 교육배경, 그리고 종교체험의 방식들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먼저 가정 배경을 보면 가난 속에서 어릴 적부터 노동을 통해 돈을 벌며 가족의 생계를 염려해야 했던 이용도와 넉넉한 가정에서 태어나 반듯한 가정 교육을 받고 일본유학까지 다녀올 정도의 안정된 환경을 지녔던 김교신간의 차이가 두드러진다. 우시장의 거간 일로 생계를 이어간 이용도의 가계와 비록 일찍이 부친을 여의었으나 유교식 명문 가문 출신의 김교신의 삶, 어린 시절부터 몸이 허약하여 항시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 있던 이용도 그래서 스스로 상처 입은 영혼이 되어 살 수밖에 없었던 그와 한학을 공부했고 선비의식을 배우며 당당하게 자라난 김교신의 생애가 이후의 삶을 형성하였으리란 추측은 언제든지 가능하다. 어머니로부터 받은 이용도의 영향력 또한 김교신의 경우와 구별되는 부분이다. 세상의 어느 어머니치고 모성의 위대함을 삶으로 보이지 않은 분이 있겠는가마는 이용도의 경우 어머니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배운 점이 독특하다. 기독교 신앙에 대한 남편의 몰이해와 박해에도 불구하고 자식들에게 신앙을 가르치고 눈물로 기도한 어머니의 사랑은 이용도의 생애 및 사상에 지대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름 중에 제일은 어머님, 마음 중에 제일은 어머님의 마음, 눈 중에 제일은 어머니의 눈. 나의 오늘이 있음은 오로지 너의 어머니의 기도와 영덕에 인함이다."8) 반면, 김교신의 유년시절 기록이 거의 없긴 하지만 유교적 풍토속에서 자랐고, 주변의 기독교 신앙을 지닌 사람들이 주변에 없었던 고로 이용도와 같은 모성적인 신앙적 감수성을 배울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교육 배경 역시 이들 간의 차이점을 드러내 주는 부분이 있다. 이용도는 어린 시절 신앙의 영향으로 감리교 미션계 학교인 송도고보에 입학, 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르며 9년 만에 졸업하게 되고, 협성신학교에 적을 두었지만 신학이나 목회에는 별 뜻을 두지 않고 글쓰기, 문학적 창작 등에 관심하였고 교회학교 어린이들을 지극히 사랑하여 교회교육에 전념하였다. 특정한 스승을 모시지 않고 스스로의 종교 체험에 근거하여 자신의 세계를 개척해 나간 것도 그의 특징일 수 있다. 김교신의 경우 기독교와의 만남은 청년 시절인 일본 유학 때에 가능했다. 함흥농업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22년 동경고등사범학교 영어과에 입하하여 다니다가 지리박물과로 전과한 자연과학도였다. 이 기간 중에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연구회에 다니면서 기독교 신앙을 배웠고 그를 ‘세상에 들도 없는 대스승’으로 모시며 살았다.9) 스승을 통하여 기독교 이해방식을 배웠고 그것을 조선에 새롭게 펼쳐가려고 했던 김교신과 스스로의 체험에 의해 독특한 부흥회를 주도한 이용도, 더욱 자연 과학도로서의 학문적 엄밀성을 추구한 사람과 문학을 사랑하고 가야금 소리를 즐겨 듣던 예술적 상상력의 소유자 간의 민족을 이해하고 기독교를 표현하는 방식이 달랐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동일한 맥락에서 생각해 보아야 될 또 하나의 중요한 사안은 그들 집안의 종교적 배경과 각자의 종교 체험 방식의 차이에 관한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부지불식간에 가정의 종교적 분위기에 영향을 받고 살게 된다. 또한 어린 시절 종교체험이 그의 일생의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는 경우도 있다. 일반적으로 조선조 말까지 한 가정의 종교 구조는 ‘한 지붕 두 전통’이었다고 말해진다. 동아시아 전통의 핵심인 무속과 유교가 한 가정 내에서 공존하였던 것인데 남자들은 유교문화에 길들여지고 여성들에게는 무속 행위가 허용되었던 것이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중국 음양사상의 한국적 토착화라고 말하기도 한다. 물론 무속의 기본적 모티프, 예컨대 엑스타시적 신인합일이나 자연정령숭배 그리고 여성적 체험 등이 人僞의 문화(禮)를 강조해 온 유교 속에서는 억압이 되고 노장사상 및 도교 속에서 재현되어졌기에 이들 관계를 노장사상과 유교적 관계로까지 말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두 종교 전통의 관계를 한국적 토착화로 보기보다는 기본적으로 이 두 종교전통이 인간 심성 속에서 상호 보완적 관계로서 존재해 왔다고 이해하는 편이 적당할 것이다.10) 그럼에도 조선조 말기에는 무속이 전반적으로 유교 문화에 의해서 억압되었고 여전히 체면과 명분이 강조되고 조상신을 섬기는 유교적 제사행위가 문화의 주종을 이룬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외세의 침략이 시작되던 시점에서 여성의 존재 및 그들 종교경험 일체가 부정되는 가부장적 체제가 강화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용도 가정에서 어머니가 전도부인으로 활동할 만큼 뜨거운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무속적 엑스타시의 코드가 당시 교회들의 영향 하에서 기독교적으로 바뀐 것으로 이해할수 있으며 그렇기에 이용도의 모친은 같은 이유로 남편에 의해 부정되거나 배척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이용도는 가정 내에서 부모들의 문화적 갈등을 보면서 자라났고 어머니의 종교성에 깊이 매료되었다. 그가 16세 나이에 경험한 마귀를 이긴 중생체험(勝魔體驗)이란 것도 전도부인이었던 어머니의 무속적 신앙 경험과 연속선상에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11) 다시 말해 무속적 강신 체험이 이용도에게 기독교적으로 구체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이후 목회활동을 시작한 이용도가 당시의 사경회 형식을 파괴하고 열광적인 부흥회 형태로 자신의 기독교성을 나타내 보인 것도 이런 원초적 종교 배경과 연루되어있다. 후에 상세히 재론하겠으나 한 마디로 이용도는 무속적 합일 체험의 근간에서 예수 신비주의와 합류됨으로써 기독교를 동양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하는 독특한 구조를 갖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동양적으로 표현된 그의 기독교 영성은 이후 일체 교권, 교리 지상주의를 거부했으며 외세에 의해 형성된 조선에 대한 거짓된 담론을 부정하였고 민족에 대한 주체성 곧 ‘조선적 기독교’를 새롭게 각인시킬 수 있었다. 바로 이런 절대부정을 통한 절대긍정의 길, 즉 부정의 변증법은 원초적인 無의 세계를 지니고 있던 노장사상의 얼개 속에서 생겨난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12) 다시 말해 이용도의 영성, 영적 생명이 수용적이며 자연친화적이고 자기무화적인 노장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편 김교신은 이미 언급하였듯이 명문 유교 집안의 자손이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김교신의 가문은 함흥차사 박순과 함께 함흥에 갔다가 죽음을 면한 김덕재의 후예라고 한다.13) 어린 시절부터 한문을 수학했다는 기록이 있고 보면 당시 정황으로서 그가 얼마나 많은 유교경전을 읽었을 것인가를 추측할 수 있다. 흔히 『소학』을 거쳐 『격몽요결』, 그리고 『대학』, 『중용』 등 사서삼경을 읽는 것이 정해진 순서인바 이 점에서 김교신이 유교적으로 자신의 세계관을 형성해 왔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일평생 교육자로서의 삶을 살았고 선생으로 호칭된 것도 이와 무관한 일은 아니라고 본다. 김교신은 기독교에 입문하기 전부터 인생을 사는 것의 의미가 도덕적인 데 있다고 믿을 만큼, 유교적 교훈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인의예지의 四端을 본연지성으로 하여 태어난 인간이지만 자신의 마음을 갈고 닦고 보존하여 인간의 善性을 완성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청년 시절 삶의 목표가 있었다면 유교적 인간관의 정점인 공자의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즉 "나이 칠십에 이르러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을 하여도 법도를 넘어서지 않는다"는 바로 그것이었다.14) 이렇듯 유교적으로 형성된 김교신의 윤리적 지향성은 이후 기독교 신앙과 만나게 되면서 형태는 달라지지만 더욱 강하게 표출되었다. 김교신은 유교와 기독교를 의식적으로 비교하면서 상당 부분 비슷한 내용들이 상호 교차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의를 보고도 행하지 않음은 용기가 없는 것이다(見義不爲無勇也)"라는 공자의 말씀과 "의를 보고도 행하지 않는 것은 죄다"라는 성서의 말씀이 그렇고 "바른 것으로써 원수에 보답하고 덕으로써 덕에 보답한다(以直報怨 以德報德)"는 유교 교훈과 "원수를 사랑하며 오른뺨을 치려는 자에게 왼뺨을 갖다 대라"는 성서 교훈이 구체적으로 발견된 예다. 그러나 김교신의 윤리적 지향성은 기독교의 가르침이 공자보다 훨씬 심오함을 깨닫고 더욱 그 심오한 도덕은 인간이 스스로 성취할 수 없다는 자각에 이르게 된다. 오히려 기독교를 만나면서 인간의 깊은 죄의식에 눈뜨게 된 것이다.15) 그래서 그는 성선설을 말해 온 유교적 가치관과 결별하고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를 수용하게 되었다. 넓게 보면 한국 종교문화 전통에 대한 이러한 불신은 나라를 빼앗긴 민족지성들에게 찾아온 공통된 현상이었다. 그렇지만 일본에서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연구회를 드나들며 얻은 이런 종교 체험이 외형적으로 유교와 단절되었는지 모르지만 내면적으로는 깊은 연속선상에서 이루어진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가 비록 성서적 삶을 새로운 대안으로 받아들였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교적 명분 및 수양론의 바탕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가 기독교적 종교 예식을 최소화하고 오로지 성서 연구에만 몰두한 것은 내촌식의 무교회주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유교의 서당식 공부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16) 일제에 항거하며 박봉에 시달리면서도 성서 조선지를 출판하였던 것도 강직한 선비적 품격과 기상의 일면이 드러난 것이다. 김교신이 성서조선지 원고를 쓸 때 항상 목욕재계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골방에서 골몰하였다는 후학들의 증언은 김교신의 영성이 유교적 토양에서 자란 것임을 보여준다. 서구 문화에 의해 형성된 기독교를 비판하고 오로지 성서 위에 조선을 세우려고 했던 김교신, 그래서 일본에 의한 반도결정론을 비판하고 조선의 지리학을 긍정하여 섭리사적 한국 민족관을 세운 김교신 속에서 유교와 기독교의 합류를 읽어 내는 것이 무리한 일은 아닐 것으로 사료된다.
Ⅲ. 동양적(한국적) 영성과 민족주의: 민족주의의 다른 두 시각
이용도와 김교신, 이들이 각기 무속(노장사상)적, 유교적 풍토에서 자랐고 그를 배경으로 기독교를 이해하여 저마다 ‘조선적 기독교’를 세우고자 하였음은 앞에서 말해온 바다. ‘조선적’이라는 한정사는 그들의 민족에 대한 이해, 곧 민족주의 시각을 반영한다. 일본에 의해 국가적주권을 유린당하고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정신적 자유를 빼앗긴 현실에서 그들이 부르짖었던 것은 민족, 조선의 주체성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주체성, 민족 주권을 회복하는 방법에서 이용도, 김교신 이들의 길은 달랐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여 상대방을 향해 열광주의자, 감성에 호소하는 싸구려 기독교도, 무교회주의자로 힐난한 적도 있을 만큼, 그들의 방법론은 상호 이질적이었다. 3 · 1 만세운동에 참여한 대가로 다섯 차례나 옥살이를 할 만큼 민족애에 불탔던 이용도, 그가 협성신학교를 찾아온 것도 민족대표 33인 중 7인을 배출한 학교였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만큼, 그는 민족을 사랑한 신앙인이었다.17) 신학교를 졸업하고 통천에서 있었던 종교 체험 이후 열광주의적 부흥 목회를 시작했던 이용도를 이전의 민족지향적 삶과 단절로 보는 시각도 있으나 이것은 가당치 않은 일이다.18) 민족을 고통과 억압으로 몰아넣던 모든 현실을 부정하고 하느님의 영에 사로잡힌 새로운 민족으로 거듭나도록 하는 것이 그의 사명이었기 때문이다. 민족에 대한 이용도의 새로운 시각은 자신의 삶의 전이해가 되었던 무속적 영성 및 노장적 사유지평으로 인함이었다. 따라서 본고는 이용도의 민족의식을 무속적 신비체험 내지는 노장의 부정적 변증법의 시각에서 적극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한편 김교신 역시 3·1 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목이 터져라고 외친 경험을 지니고 있던 선비였다. 유교인으로서 명분을 중시하던 그에게 있어 나라를 빼앗겼다고 하는 것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유학 시절 그가 우치무라로부터 배웠던 것은 성서와 애국사상이었다. 이후 그의 일평생 작업은 성서를 조선에 전하고 조선 위에 성서를 올려 놓는 일이 되었다. 『성서조선』 75호에 게재한 「성서조선의 解」라는 글에는 "성서와 조선, 성서를 조선에, 조선을 성서 위에"라고 썼다.19) 나라를 잃는다는 것은 유교적 명분론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것을 다 잃은 것과 마찬가지다. 그 옛날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얼마나 많은 유교 선비들이 자신의 목숨을 끊었던가? 목숨을 끊는 심정으로 김교신은 조국을 사랑했고 사랑하는 방법으로 성서를 이 민족에게 가르쳐 전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가 말한 무교파주의, 무제도주의라는 것도 실상은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양심 밖에서 어떤 권위를 찾지도, 인정치도 않으려는 유학, 특별히 양명학의 사상적 배경과 관계가 깊다. 그의 스승 우치무라가 일본의 천황제도를 거부할 만큼 철저한 기독교인이 되기 이전에 양명의 良知論을 깊이 추종하였다는 사실이 이런 점을 밝혀 주고 있다.20) 여하튼 성서와 조선을 삶의 두 축으로 삼았던 김교신의 민족주의는 유교식 색채로 짙게 물들어 있다. 자신에 대해 엄격하며, 한 번 결정한 것을 언제든 지키고 사람 됨됨이에 희망을 걸었던 그 총체적 모습이 이를 반증하는 바다. 이렇듯 서로 다르게 표출된 두 사상가들의 민족의식을 탐구하는 것이 본 장의 과제지만 공통적인 것은 두 사람 모두 재래의 문화와 도덕 등 구습에 얽매여 스스로 종된 조선 민족에게, 형식화되고 제도화된 교회에게, 그리고 서양 선교사들의 문화적 우월주의에 대해 또한 일제하의 사회 현실 전체를 향해 날선 검이 되어 민족에게 참된 진리를 전하려다 모두로부터 등진 인생을 살던 하느님의 영의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이다.21)
널리 알려진 대로 지금껏 한국 문화 및 종교는 있는 그대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서양인들에 의해 보여진 대로 존재해 왔었다. 그들의 판단 기준에 따라 우리 문화의 실체는 있다가도 사라졌고, 없다가도 갑작스레 생겨나는 그런 것이었다.22) 이용도와 김교신이 활동하던1920∼30년대의 조선은 일차적으로 기독교 서구에 의해서 그리고 재차 일본에 의해 만들어진 민족에 대한 거짓 담론에 의해 민족적 주체성이 뿌리뽑히는 운명을 경험해야 했다. 조선을 지배하고 재구성하기 위한서구적, 일본적 언설들이 동서, 한일 간의 존재론적 위치를 결정하였고 조선 열등주의를 조장해 왔던 것이다. 당시 조선말의 각종 유형, 무형문화적 텍스트를 서구 및 일본적 시각에서 해독하여 비과학적, 미신적, 비합리적, 신비적이라고 낙인을 찍어 온 오리엔탈리즘을 극복하고자 동양적 주체성, 즉 한국이란 텍스트를 한국적 시각에서 해독하려는 노력이 이들 두 사상가들에 의해 생겨난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하겠다. 먼저 우리는 1920∼30년대의 교회 현실, 즉 내세적 보수주의, 규범화된 근본주의, 교리적 갈등 및 교권화, 주체성의 상실 등 기독교의 반민족적, 반민중적 상황에 대한 당시 민족의 평가를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23) 공초 오상순, 춘원 이광수 등의 당대 기독교 지성인들은 50만이나 되는 기독교인 수를 지니고 있지만 민족민중 모순에 대한 사회적 비판의식을 결여한 기독교, 사회신조 하나 변변한 것을 갖지 못한 한국 기독교의 현실을 성육화를 이루지 못한 수치로 이해하였다. 또한 중국 공산당 성립 이후 서구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의식이 생겨나면서 소위 자생적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의 하층계급을 끌어안으면서 식민지 현실을 극복하려고 힘썼는데 그들의 눈에 기독교 교회는 묵시록만을 설교하고 선교사들의 앞잡이 노릇이나 하는 회칠한 무덤으로 보였다. 그리고 역사를 我와 非我의 투쟁으로 보면서 주체적 민족사관을 정립했던 신채호 등의 민족주의자들은 기독교를 향해 한국인을 노예화시킨 문화로 비판하였고 이 땅에서 예수의 죽음을 선포하기도 하였다. 조선을 非我로 규정하는 기독교의 오만, 선교사들에게 빌붙어 스스로 특권화하려는 성직자들의 처세술, 민중의 경제적·사회적 고립에 대해 무감각한 교회 현실들이 바로 예수를 죽게 한 이유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용도가 일본과 서구적 담론에 의해 형성된 기독교인으로서의 종래의 자기의식을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추구해 간 것이나 김교신이 ‘조선과 자신’의 관계를 정립하고 조선산 기독교를 위해 『성서와 조선』이란 잡지를 만들어 내기 시작한 일은 민족사, 더욱 한국 교회사에서 획을 긋는 일이 아닐 수 없다.24) 앞선 언급대로 민족 및 주체성에 대한 이해방식이 그들 종교적 배경의 차이로 인해 다르게 전개되었으나 조선적 기독교를 목적함에 있어서 이들은 모두 동일한 열망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용도의 경우 통천에서부터 시작된 종교 체험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물음을 제시한 사건이었다. 독립에로의 의지를 꿈꾸며 젊은 시절을 보낸 그가 열광주의적 부흥사로 삶의 길을 전개하게 된 것은 종교 체험을 통해 자신의 주체성에 대한 재정립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지하듯, 인간은 문화의 창조적 주체이기 이전에 문화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자기 정체성이란 본래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문화가 지닌 이데올로기 구조에 의해 재생산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점에서 이용도의 종교 체험은 자신에게 허상적 정체성을 갖게 했던 기독교 서구 선교사들의 종교체제 및 일제의 식민지 문화담론 일체로부터 자유로운 길을 가능케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나도 지금까지 너무 남의 세상에 살아 왔습니다. 너무도 남의 눈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나도 이제부터 예수쟁이가 되렵니다. 미치도록 믿으렵니다. 이렇게 노력하는 것이 곧 나의 생활이 되겠지요……"25) 지금껏 서구 문화라는 이념 구도에 자신의 정체성을 투영해 온 지난날 삶이지만 이제부터는 문화를 넘어서 진정한 자아로서 삶을 살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이용도에 대한 새로운 전기적 고찰에 따르면, 젊은 시절 이용도는 기독교 종교를 한국인을 계몽할 수 있는 일종의 이념처럼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초기의 이용도를 계몽운동을 지지했던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여 기독교교육에 관심을 갖고 장년 공과를 쓰고 「춘풍」이란 연극 대본을 쓰면서 그 글 속에서 민족해방의 날을 염원하였던 사실이 이를 논증한다.26) 그러나 정작 신학이 현실에 있어 반정치적이며 신학교가 더 이상 민족계몽운동자를 육성하는 곳이 아님을 알게 되면서 이용도의 내면에 신학과의 갈등이 깊어지고 폐병 3기라는 실존적 병고로 종교 체험을 통한 새로운 자아 형성의 길이 계시된 것이다. 이 점에서 최대광은 이용도의 회심을 ‘혁명가에서 부흥사에로의 전이가 아니라 민족독립이라는 외형적 정서 구조에서 인간의 영과 정신으로 시작하는 래디칼한 변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27) 다시 말해. 근원으로부터 새로운 주체성을 확립했으며, 영성의 길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비정치적이며 세상 초월적인 영성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더욱 철저하게 자신의 주체성을 형성해 온 기독교 서구 및 일제 통치이념으로부터 전적으로 자유하려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영성이었다. 우리 민족이 자주인간으로서 바르게 살아가기 위해 종래처럼 일본을 적으로 만보는 시각을 떨쳐 버리고 오히려 인간의 마음 바탕에서 민족을 바로잡을 수 있는 종교, 기독교의 힘을 강력히 필요로 했던 것이다. 이것은 당대의 민족주의자들 다수가 시간이 흐르면서 친일세력이 되었고 일본의 식민통치 이데올로기에 굴복하고만 현실을 바라볼 때 이용도의 영성 및 주체성(민족의식)을 돋보이게 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이용도는 당시의 많은 지성인들, 민족주의자들이 자신들의 과거전통을 철저하게 부정하고 그로부터의 절연을 선언한 것이 이런 자가당착의 모습을 가져왔다고 보았다. 발전적 서양과 퇴행적, 정체적 동양이라는 오리엔탈리즘에 빠져, 야만적 동양과 일본을 분리하는 이데올로기 구조에 함몰되어 이들은 자신들의 뿌리인 한국 문화(세계 내 존재)로 되돌아올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에 반해 이용도는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을 여전히 무속적, 노장적 사유의 바탕에서 표현하고 있다. 이는 새로운 종교체험을 통해 형성된 이용도의 민족의식이 노장적 사유 틀 속에서 더욱 래디칼하게 언표되었음을 뜻한다. 그것은 바로 이용도가 말한 영적 생명론, 생명의 역환이란 개념을 통해서다.28) 그러나 지금까지 장로교 역사가를 중심으로 한 이용도의 평가는 이러한 이용도의 영적 생명론을 서구적인 변증법적 신학 구조에서 판단된 신비주의 틀 속에서만 바라보도록 하였다. 예컨대 ‘육에 죽고 영에 살자’라고 외친 이용도를 영지주의적 이원론자로, 때론 자신의 노력으로 신성에 도달하려는, 즉 구속론을 필요로 하지 않는 반종교개혁적 인물로 낙인 찍어 버린 것이다.29) 그러나 이용도가 말하는 ‘영에 살자’는 것은 실상 정욕과 불의의 지배를 받는 삶과 단절하자는 것으로 이는 당시 문화적 이데올로기 의해 형성된 종래의 자신을 거부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생명 공부는 영원한 생명, 곧 하나님과 예수를 아는 것이다. 생명은 곧 진리라. 이 知는 연구탐색의 知가 아니라 感하여 知하는 것이다. 感하여 知하는 일이 가장 만물을 잘 아는 법이다. 그림을 잘 아는 일은 그 작가의 영감과 같은 영감에 취하여서 보는 일이다 ··‥‥ 감은 생명의 일이니, 생명이 있어서, 감이 있고 감이 있어서 생명이 있는 것이다 …… 하나님을 아는 것은 곧 영적 생명이요, 영적 생명은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 그러므로 이 생명은 본래 우리에게 없는 것으로 예수로 말미암아 새로 받은 생명이다.30)
본문에서 보여지듯 새로운 자아의 발견은 하느님 곧, 영적 생명을 아는 일이며 영적 생명이란 바로 여타의 문화적 담론의 지배를 받지 않고 온전히 영적 생명이 주는 진리만을 근거로 살아가는 것을 말하고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생명과 感하여 知다는 것이다. 감한다는 것은 작가(하나님)의 영감과 같은 영감에 취하여서 보는 일이라고 했다. 바로 이러한 신학적 인식, 즉 합리적 이성이 아니라 황홀한 느낌과 체험으로 다가오는 영적 생명의 현실은 바로 무속적 종교 체험의 방식과 다르지 않다. 다르게 표현하면 온몸으로 진리를 체득하는 직각적 깨달음, 즉 頓悟의 경지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렇기에 직관적인 앎, 前분별적 주객 미분 상태로서의 영합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객 분열 이후 그것을 재결합시킨 초분별적 앎의 형태로서 이해해야 마땅하다.31) 이용도가 끊임없이 學生心을 갖고 그리스도의 삶과 하나되기를 열망하고 노력한 흔적이 너무도 치열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영적 생명의 체험은 이용도에게 있어 마음을 중시하는 동양적 감성, 심미주의적 직관의 산물로서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을 필자는 무속적 강신 체험이 예수의 삶과 고난의 내면화 과정과 만나 노장적으로 표현된 탈오리엔탈리즘적 정체성(영적 생명)이라고 말하고 싶다. 강신 체험을 근간으로 예수 신비주의가 된 이용도에게 있어서 자신의 자아는 다음처럼 기술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이상, 나의 주의(ism), 나의 계획 다 집어치우고, 오 주여 나는 무요, 공이로소이다. 나의 위에 성령이 움직이어 주의 이상을 세우고 주의 계획을 세우시옵소서. 그리고 주께서 움직이옵소서. 그리하여 나는 주에게 딸려 움직인 것입니다.32)
영적 생명을 입은 이용도는 이제 철저하게 거짓된 삶을 강요해 온 기존 담론과의 단절을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긴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이용도의 고통과 고난은 바로 문화적 이데올로기의 옷을 입고 오리엔탈리즘을 확대 재생산해 온 집단들에 의해 가해진 폭력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용도 목사가 영적 생명과의 연합을 통해 정립한 주체성, 곧 이용도식의 민족주의는 어떤 형태로 가시화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일까? 무엇보다 먼저 이용도는 네비우스 선교정책에 따라 선교사들이 형성해 놓은 선교지 분리정책을 무시하고 한반도와 간도 지방을 휩쓸며 교파를 초월한 영적 부흥회를 개최하였다. 선교사들에 의해 구획되고 나누어진 문화적 경계, 지리적 한계를 넘어서는 일은 바로 노장적으로 이해된 민족의식의 한 표현이었다. 이용도의 새로운 주체성은 오늘 우리가 대를 이어 감리교인이 되고 장로교인이 되고 성결교인이 되어 칼빈주의자와 웨슬리주의자가 된 것을 초창기 선교사들에 의한 선교지 분할정책의 효과가 확대 재생산된 결과로 이해한다.33) 기독교인이기 이전에 장로교, 감리교인으로서 한국인을 교리적으로 분리시킨 현실에 대한 비판적 지적인 것이다. 네비우스 정책의 또 다른 일면으로 우리는 선교의 대상 설정과 한국 교회의 경제적 사립을 추구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이 정책은 외형상 상류 계층보다는 근로 계층과 부녀자들을 우선적 선교 대상으로 삼게 했으며 성서 연구를 자국어로 하도록 권장했고 재정적 독립을 골자로 한국 교회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등 긍정적 일면을 보이고 있으나 그 실제에 있어 이 정책은 한국인들의 신앙 유형을 보수적 신앙전통 범주 안에 묶어 두려는 선교사들의 교파적 이데올로기의 산물이었다. 그들은 조선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특정 신학 전통만을 받아들이도록 권유했으며 자신의 신학 사상과 다른 교리나 성서 해석을 철저하게 이단으로 정죄하고 배척하도록 가르쳤던 것이다. 한국인 목회자의 지적 수준을 선교사들보다 낮게 책정한 것도 뿌리깊은 오리엔탈리즘의 산물이었다.34)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네비우스 정책이 자립을 빌미로 한국 교회 및 목회자로 하여금 물질화 세속화의 길에 빠져들도록 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교회를 자기 소유물처럼 여기며 목사직을 성직으로 여기지 않고 밥벌이로 타락시키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는 것이다. 네비우스 정책으로 인해 서구적 자본주의가 교회 안에 이식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한 이용도의 교회 비판은 철저했다. "예수는 죽이고 그 옷만 나누는 현대교회야. 예수의 피도 버리고 살도 버리고 그 형식과 의식만 취하고 양양자득하는 현대교회 무리여, 예수를 믿는 본의가 어디 있었나요."35) 이렇게 볼 때 이용도의 영적 운동, 사경회를 대신한 부흥회는 정치적 운동이자 영적 생명에 기초한 민족의식의 발로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용도의 민속의식은 식민지 문화와 선교사들에 의해 형성된 삶을 살아 가던 사람들을 비판하면서도 그들을 온몸으로 사랑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한편으로 김교신은 언급한 대로 유교 가정에서 태어났고 유교적 수행론의 관심을 갖고 기독교 신앙에로 입문한 평신도 신학자였다. 공자가 70세에 이르러 얻었던 자유한 인간상(從心所欲不踰矩)을 10년이라도 먼저 달성하고자 기독교를 받아들인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가 후일 성선론적 유교의 인간 이해를 버리고 깊은 죄의식의 발견을 통해 기독교적 회심 체험을 한 것도 사실이지만 김교신의 인격은 유교적으로 특징지어졌다. 김교신의 평전을 썼던 그의 제자 김정환은 스승의 인격적 특질로서 그의 선비성을 으뜸으로 꼽고 있다.36) 여기서 말하는 선비성이란 학자적 기질, 예술적 기질 그리고 지사적 기질을 총칭하고 말로써 옳은 것을 위해 삶을 바치고, 어느 경우든 여유를 잃지 않으며, 자신의 뜻을 이루려다 여의치 않으면 재야에 묻히는 삶의 태도 전반을 일컫고 있는 것이다. 그가 정몽주, 사육신들, 이퇴계, 신사임당, 전봉준 같은 이를 좋아했던 것도 그들이 이런 선비성을 지니고 살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이름에 걸맞는 책임을 나누어 받은 인간이 자신의 소임을 다하지 못하고 이익과 명예에 이끌리는 것을 너무도 싫어하였으며 명분을 위해 자신을 버릴 만큼 기개가 뛰어난 사람이라면 자신의 길과 다르다 할지라도 그의 삶을 높게 평가하곤 했었다.37) 이런 맥락에서 김교신은 일제식민지 치하에서 신음하는 조선 민족에게 성서를 갖게 함으로써 이 민족을 성서에 기초한 존재로 변화시키는 것을 자신의 天命으로 알았다. 그가 조선과 자아의 관계를 ‘성서조선’이란 하나의 말로 하나로 엮어 표현한 것은 성서를 가르치는 일이 그만큼 자신의 명분에 걸맞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공자의 『논어』마지막 부분에 "‘命’을 알지 못하면 군자라 할 수 없다"고 쓰여 있다. 하늘의 뜻을 모르고서는 자기 존재를 참되게 실현시킬 수 없다는 말이다. 『중용』 또한 하늘이 命한 것을 인간의 본성(天命之謂性)이라고 하였고 『맹자』 역시 자기 마음을 다 아는 사람은 자기의 본성을 알고 자기의 본성을 아는 사람이 天을 아는 것이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하느님의 명으로서 天命은 원래 하늘이 사람에게 내려주는 것으로서 인간이 보태거나 덜어 낼 수 없는 것이었다.38) 바로 당시 조선의 식민지상황에서 조선 민족에게 성서를 가르쳐 과거의 구습으로부터 자유케하고 비판적 항거를 통해 하느님의 의로움을 이 땅에 실현되도록 하는 순교자적 삶이 김교신에게는 하느님의 명령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렇기에 김교신의 神 체험이란 하느님의 정의를 한국 역사 속에서 구체화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이런 맥락에서 그의 神 체험은 사랑 및 고난의 신비주의를 말한 이용도의 경우와는 사뭇 다르게 나타난다. 김교신은 그리스도교가 사랑을 근간으로 하는 종교이긴 하지만 義의 골격이 없은 사랑만을 말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의 아가페란 단어를 맹자가 말했던 仁義 또는 仁愛로 번역하기를 즐겨하였다. 성서적으로 풀어 말하면 십자가란 인간의 죄에 대한 신의 분노를 포함한 자기 희생의 사랑을 지시한다는 것이다.39) 그렇기에 하느님의 의로움이 사라진 하느님의 사랑만으로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더 이상 표현해 낼 수 없다고 이해했다. 바로 이것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로움보다 낫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예수 말씀의 의미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김교신이 예수의 삶을 유교적 ‘중용의 도’에 비하여 ‘극단의 도’로 예시한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세상을 이기는 힘은 중용에서 나오지 않고 자신의 소유한 바를 완전히 버리는 극단의 길에서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40) 이것 역시 하느님에 대한 신념과 상응하는 부분이다. "예수의 교훈은 극단으로써 극단을 가르친다. 두 주인 섬기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하나님께 아니거든, 금괴에 절하라. 동이 아니면 서로, 천국이 아니면 지옥으로."41) 이것은 義의 하느님에 대한 김교신의 믿음, 그리고 예수의 상이 극단의 도를 지시하고 있다는 그의 판단은 결국 당시 조선 사회 모순을 가져온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항거, 다시 말해 그의 민족주의적 비판의식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조선인 한사람 한사람이 불의로 인해 생겨난 고난을 스스로 짊어지는 자기 수고를 개개인에게 부과된 명분으로 이해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을 義로 체험한 김교신의 역사의식이자 민족주의의 표현이었다. 비록 김교신이 외형적으로는 유교가 수직적 내세 개념을 결하고 있으며 윤리의 초월적 근거를 갖고 있지 않은 현실 순응주의라고 비판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실제로는 조선 민족이 지닌 유교의 선비적 이상주의-정절, 충성, 정성 등-를 매개로 하느님의 의를 체험하였고 그로써 조선적 기독교를 형성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사람의 이상은 그 이름에 잘 나타난다. 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 야곱, 예수 등은 유일신 여호와를 신앙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명명법에 의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인, 의, 예, 순화 …… 등의 이름자를 붙인 우리 조상들의 덕행의 목표는 바로 그 字義 대조였던 것이다. 우연의 일치일 것이지만 실로 감사한 일치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42)
이렇듯 유교적 정신세계를 통해 기독교를 이해하였으며 자신의 민족의식을 표방했던 김교신은 자신의 비판적 민족주의를 기독교의 부활사상과 연계시켜 내고 있다. 그리스도 부활을 하느님의 정의가 사랑의 힘에 의해 승리를 거둔 사건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부활을 역사적 사실로 보았고, 이 사건을 통해 조선의 불의하고 암울한 역사가 바뀌어질 수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인간의 영혼이 본질적으로 불멸할 것인지 아닌지 이는 희랍 철학자의 토의에 회부할 것이거니와 성서가 가리키는 대로 사람이 한 번 죽어 심판 받을 것은 정한 일이요, 심판의 결과는 멸망하여 다시 존재하지 못할 자와 하나님의 대능(大能)으로써 죽음에서 부활되어 영생의 구원에 참여할 자와 구별될 것이 필연의 이(理)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는 것은 부활의 추리산단(推理算段)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승을 믿는다.43)
결국 김교신의 부활신앙은 불의한 세력, 즉 조선 민족을 압제했던 식민주의, 서구적 교권주의에 대한 義의 심판을 통해 민족의 새 역사가 시작될 수 있다는 민족적 자의식의 내면을 구성하고 있었다. 이 점에서 김교신에게 따라붙은 무교회주의자라는 칭호, 곧 그의 무교회주의는 하느님의 의와 부활사상에 근거한 조선적 기독교의 구체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적 기독교의 본질 및 그 영성에 관한 것은 다음 장의 주제이니 약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무교회주의를 말할 만한 당시 교회 상황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김교신이 보기에 당시 조선교회는 무엇보다도 교회 본질을 잃어버리고 세속화되었다. 하느님 말씀을 가르치거나 그리스도 십자가를 증거하지 않고 양로원, 고아원, 한글 보급, 농촌 계몽과 같은 일을 하며 상호 이익을 도모하는 사회 단체로 전락해 버렸다는 것이다. 물론 김교신이 교회의 이런 역할을 부정한 것이 아니다. 그의 제자 류달영을 시켜 농촌계몽운동가인 최용신의 전기를 쓰도록 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44) 그러나 성서를 게을리하는 교회는 조선 민족에게 궁극적 희망도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다음으로 조선 교회의 문제는 이용도에 의해서도 밝혀졌듯이 교회의 교권주의였다. 교회를 정치의 집으로 만들고 부정한 조직을 만들어 운영하는 목사들을 김교신은 단호히 부정하였다. 조선과 자아의 관계는 ‘성서’를 매개로 하여 정립한 그의 주체성의 입장에서 볼 때 교권주의란 천명을 상실하고 민족의 희망을 앗아가는 강도 짓과 같은 것이었다. 그는 또한 서양에서 들어온 기독교 교파들의 교회만을 인정하고 한국인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들이 교회정치에 의해 배척받는 것을 못 견뎌 하였다. 때로 이용도를 진실한 영혼을 가진 사람으로 보았으나 이용도 식의 열광적 부흥회를 못마땅해 했고 최태용과의 무교회주의 논쟁에 휘말렸으나 그들에 의해 세워진 예수교회, 복음교회 등이 장로교, 감리교로부터 이단 정죄받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45) 이런 것은 성서적 민족주의 시각에서 볼 때 주체성을 상실한 서구 맹신적인 발상이었다. 그렇기에 교파주의와 교회제도를 절대화시킨 교회지상주의를 김교신은 온 힘을 다하여 배타하였다. 교파별 폐쇄주의에 갇혀있으며 제도로서의 교회를 신성시하여 구원을 독점하는 조선교회, 그리고 비이성적인 열광주의에 매몰된 부흥회식 교회행태는 그가 바랬던 ‘성서조선’의 뜻과 너무도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배경에서 나온 김교신의 무교회주의는 ‘성서조선’ 즉, 조선적 기독교를 실현시키고자 하는 하늘이 내린 天命이었다. 다시 말해 그의 무교회주의는 조선 교회를 타락시킨 일제식민주의와 서구적 기독교에 대한 민족주의적 항거이자 복음적 저항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김교신은 이제 조선 교회가 무교회주의의 깃발을 쳐들고 학문적 근거 위에서 기독교 신앙을 재건할 시점에 이르렀음을 천명하였다. "금후 50년은 이성의 시대요, 연구의 시대라. 식염주사 같은 부흥회로서 열을 구하지 말고 냉수를 끼쳐서 열을 식히면서 학도적 양심을 배양하며, 학문적 근거위에 신앙을 재건할 시대에 처하였다."46) 바로 다음 장에서 살펴볼 바는 민족주의를 머금고 있는 그의 무교회주의가 유교적 영성과 어떻게 합류되어져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속 및 노장적사유 틀 속에서 표현된 이용도의 영적 생명운동과 좋은 대비를 이루어낼 것인데, 그러나 이 둘은 서로 차이만을 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함께 만날 수 있고 만나야 할 필요성을 갖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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