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2015년)는 선생님이 타계하신지 7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선생님은 그토록 바라던 조국 광복을 100일 앞두고 하늘나라로 떠나셨습니다. 투철한 그리스도인이었던 선생님의 친구 중에는 공산주의자 한림(韓林, 1900~?)도 있었지요. 그는 선생님의 장례식에서 우인(友人) 대표로 분향을 하기도 했습니다.
선생님이 도쿄고등사범학교에 다니면서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 문하에서 성서를 공부하던 무렵, 한림은 와세다 대학에 재학 중이었습니다. 한림은 1928년 조선공산당 일본총국 책임비서를 맡던 중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1930년 10월 경성지법에서 징역 4년 6월의 중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뒤 1933년 9월에 만기 출옥했습니다. 일제가 주목한 거물급 공산주의자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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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신 선생 |
선생님의 ‘일기’에는 1933년 9월 초순 감옥에서 석방되는 공산주의자 한림을 마중 나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선생님은 감옥에서 나오는 한림의 태도가 너무나 당당하고 희망에 부풀어 있어 감탄을 금치 못합니다. 선생님의 눈에는 ‘유물론자 한림의 당당한 모습’과 ‘조선 그리스도인들의 왜소한 모습’이 너무나 대조적으로 비쳤지요. 한국 기독교의 암흑시대라 불리는 1930년대에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 대부분이 일제에 굴복했습니다.
선생님은 이날 ‘일기’에 “한림 군을 백두산의 거목이라면, 오늘의 기독신자 대다수는 고층건물의 옥상 분재(盆栽)에 불과하다”고 썼습니다. 신념에 목숨을 건 공산주의자 한림의 당당한 기개에 견주어, 1930년대 조선 기독교는 나약하기 그지없었습니다. 1934년 9월 12일 ‘일기’에는 한림이 보낸 편지가 인용되어 있는데, 한림이 선생님의 한결같은 신앙에 감탄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군(君)은 지난 7월은 꽤 다난다망했던 모양이구나. <성서조선>의 속간(續刊) 허가는 잘 됐네. 늦은 대로 축하하네. <성서조선>의 속간에 축의를 표하는 일에 군은 약간 의외일지 몰라. ‘무신론자인 내가 종교 잡지의 속간을 기뻐하다니’라고. 물론 이런 면으로 보면 이는 모순이다. 그러나 나의 축의는 딴 데 있다. 설명할 것도 없이, 군의 생애의 사업으로 전 생명을 투입하는 군의 의지 또는 정신을 생각하고서의 축의다. 아 군이여, 철저! 종시일관(終始一貫)! 확호부동(確乎不動)!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 오늘 같은 ‘비상시’에 있어서. 발분하기 바란다.
선생님이 온힘을 다하여 발행하던 신앙잡지 <성서조선>이 폐간을 모면하고 계속 간행할 수 있게 된 것을 축하하는 편지였습니다. 편지를 받아 읽은 선생님의 두 뺨에는 감격의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밖으로는 폐간을 위협하는 일제의 탄압이, 안으로는 무교회주의자란 이유로 기독교회로부터의 조롱과 핍박이 있던 시기에, 엉뚱하게도 유물론자의 격려를 받게 된 것입니다. 선생님은 한림으로부터 큰 위로를 받고 ‘일기’에 이런 감회를 남겼습니다.
“모든 기독신자가 무시하고 동인들까지 조롱할지라도 대표적 유물론자 한 사람의 지지가 있으면 족하다. 소위 ‘과격주의자’ 한 사람에게 읽히고 그 비판을 받기 위하여 <성서조선>지는 발간하여야 하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이한 것은 하나님의 의지이다. 무신론자와 함께 주를 찬송하니 비통한 찬송이다.”
<성서조선>이 또다시 폐간의 위기에 몰렸던 1940년 6월에는 한림의 집에 초청받아 그의 격려의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선생님의 ‘일기’를 들춰봅니다.
“1940년 6월 19일(수). 저녁에 한림 형 댁에 부름을 받아 여러 시간 유쾌한 대화를 나누다. 형은 본래 ML(마르크스 레닌)당 사건의 거두(巨頭)지만, 나의 근래의 심경을 가장 깊이 통찰하여 머뭇거릴 때가 아니라며 책망하다시피 독촉함을 받았다. 주의와 사상을 위하여 목숨을 던져본 경험을 가진 사람인지라, 그 심지가 비열하지 않음이 존경스럽고 사랑할 만하다(可敬可愛). 기독교 신자가 안 한다면 자기가 뒷일을 돌봐 줄 터이니 전진하라고. 신앙의 세계와는 별천지로 ‘의기(意氣)의 세계’가 따로 있음을 발견하다.”
기독교 신자가 돕지 않는다면 공산자의자인 나라도 돌봐주겠으니 끝까지 신앙의 길을 가라고 격려했다는 말입니다. 이념을 뛰어넘어 기독신자와 유물론자 ‘두 거인’을 끈끈한 동지애로 맺어준 공통점은 ‘의기’였습니다. 공산주의자마저 경탄을 금치 못하게 한 선생님의 신앙이 실로 놀랍습니다.
선생님의 신앙과 조국애가 다른 그리스도인과 차별화되는 지점은 선생님이 1939년 3월 14일자 ‘일기’에 쓰신 기도문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 예수여, 당신을 사랑하기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을진대 내 입에서 설교를 끊으시옵소서. 그 나라보다 더 연모하는 생활이 땅위에 있을진대 한 줄 원고도 이루지 못하게 하옵소서. 땅의 것을 생각지 말고 위의 것을 생각함이 절실하옵거든, 주여, 그 때에 다음 달 호의 원고를 쓰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선생님의 글을 접한 많은 이들이 이 기도를 읽노라면 양심이 찔린다는 말을 종종 합니다. ‘땅의 것’이란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사랑함입니다. 물질과 지위에 대한 집착입니다. 여기에 지식인의 나약함이 끼어들면 신념을 포기하기란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운 일입니다. 선생님은 주 예수에 대한 순전한 사랑으로 ‘땅의 것’에 대한 모든 집착을 끊어낼 수 있었습니다. 앎과 삶이 일치되는 지사적(志士的)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공산주의자 한림의 표현처럼, 선생님은 ‘철저! 종시일관(終始一貫)! 확호부동(確乎不動)!’하게 전 생명을 투입해 그리스도를 따랐습니다. 그리고 지극한 정성으로 조국을 사랑했습니다. 선생님의 신앙과 나라사랑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1928년부터 12년간 양정중학 교사로 근무한 선생님은 1940년 3월 일시 사임했다가 1940년 9월경 다시 교직에 복귀합니다. 재취임한 학교는 서울의 제1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였습니다. 도쿄고등사범학교 지리박물과 출신인 동문 선배 이와무라 도시오(岩村俊雄) 교장이 길을 열어주었지요. 모처럼 재취임했지만 선생님은 불과 반년 만에 학교를 사임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일제의 동화정책을 완강하게 거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조선 민족의 자존심을 끝까지 지키려 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었는지는 선생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는 공식적인 장소에서 조선말을 사용하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었습니다. 당연히 수업도 일본말로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끝끝내 조선말로 수업을 진행했습니다. 당연히 교내에서도 문제가 되어 선생님을 영입한 이와무라 교장을 난처하게 만들었지요. 심지어 학생들 중에도 조선말 수업에 반발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누구보다도 조선인으로서의 자존심이 강했던 선생님은 분명한 태도로 동화정책에 동조하는 학생과 대치했습니다. 진정한 조선인으로서의 긍지를 지키기 위해서는 제1고보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와무라 교장에게도 더 이상 누를 끼칠 수 없었지요.
저는 그 당시 선생님께 대들었던 조선인 학생이 누구였을까 상상을 해봅니다. 조선 최고의 수재들이 입학하는 제1고보 학생이니 광복 후 이 나라의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엘리트로 성장했을 것입니다. 아마 미국 유학을 다녀와서 영어도 곧잘 했겠지요. ‘오렌지’가 아니라 ‘어린쥐’로 발음하는 게 정확한 영어 발음이라고 강조했을지도 모릅니다. 한국어의 열등함을 절감하면서 영어를 공용어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광복 70년을 돌이켜보면 우리나라는 그와 같은 ‘수재들’이 주도해왔습니다. 지금도 그들이 이 나라의 상층부에서 기득권자로 행세하고 있지요. 선생님이 그리던 조국의 모습은 아닙니다.
하지만 세상이 상식과 정도에서 멀리 벗어날수록 선생님의 삶은 더욱 빛을 발합니다. 세상이 혼탁하고 염치없이 흘러갈수록 선생님이 실천으로써 보여주신 올곧은 삶은 길이길이 후학들의 귀감이 되기 때문입니다. 캄캄했던 그 시대에 우리에게 본보기가 되어주신 선생님께 마지막으로 한 말씀 올립니다.
“엄혹한 그 시절 선생님은 우리 민족이 짐승 무리 아닌 인간임을 온몸으로 증명해 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자랑스럽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