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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밀턴

<밀턴평전>(2008) 머리말

by 안티고네 2009. 2. 20.

밀턴평전 머리말

 

영문학사상 최고의 서사시인으로 꼽히는 존 밀턴John Milton(1608-1674)의 생애에 대한 한국 독자들의 인상은 어떤 것일까? 이렇다 할 풍파 없는 안온한 삶을 영위하다가 노년에 이르러 가족들의 애정 어린 보살핌 속에서 딸들에게 서사시 《실낙원》을 구술하여 집필하는 정경, 아마 이런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를지 모른다. 비록 시각장애인의 처지이기는 하지만 순탄한 삶을 살다가 노년에 접어들어서는 따사로운 햇살이 비치는 창가에 앉아 사랑하는 딸들의 시중을 받으며 위대한 서사시를 완성한 행복한 시인의 모습이다.

 

과연 밀턴의 생애는 그렇게 안온하고 평탄한 것이었을까? 저자는 이 책에서 일반의 통념과는 달리 밀턴의 생애가 지극히 파란만장하고 고난에 찬 것이었음을, 그리고 이 모든 역경과 장애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켜낸 불굴의 이상주의자임을 보여주고자 한다. 국왕 찰스 1세가 사형 선고를 받고 도끼에 목이 잘려나가는 영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태가 벌어지던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밀턴은 조국을 위해, 그리고 신앙과 대의를 위해 온몸을 불사른 혁명가이자 종교개혁가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밀턴의 고난에 찬 생애와 혁명적 이상주의를 알지 못하고서는 그의 서사시와 문학을 이해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밀턴 생애의 3대 위기

밀턴의 생애에는 세 번의 커다란 고난과 위기가 있었다. 첫째로, 44세 되던 1652년에 덮친 시력의 완전 상실이다. 말 그대로 앞을 전혀 못 보는 시각장애인이 된 것이다. 그의 시력 상실은 36세 무렵부터 시작되어 8년에 걸쳐 서서히 진행되었다. 글 읽기와 글 쓰기를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삼고 있는 문필가에게 이 같은 시련은 실로 악성樂聖 베토벤의 청력聽力 상실에 견줄 수 있는 가혹한 것이었다. 정적들은 밀턴의 시력 상실을 신의 징벌로 규정하고 공격을 퍼부었다. 더욱이 17세기의 낙후된 의학 수준으로 인해, 밀턴은 치료 과정에서 현대인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둘째로 이혼문제이다. 그는 부부가 정신적으로 불일치할 경우 이혼을 해도 무방하다는 주장을 펼쳤는데, 이것은 현대적 기준으로 보면 매우 상식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글들은 편협한 시대정신 속에서 철저히 왜곡되었고, 그 결과 평생 “이혼자divorcer”라는 오명을 감수해야만 했다. 이혼자를 “난봉꾼”과 마찬가지 취급하던 시대였으니, 도덕성을 긍지로 삼고 있던 밀턴으로서는 수치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밀턴은 이혼 문제로 수모를 당하는 과정에서 사상과 표현의 자유의 중요성에 눈을 뜨게 되었고, 그 결과 인류 역사상 최초로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주장한 《아레오파기티카》를 집필하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혼의 정당성을 주장한 밀턴은 평생 한 번도 이혼한 적이 없었다.)

 

셋째로 1660년의 왕정복고는 불굴의 공화주의자요 정치적 이상주의자였던 밀턴에게 쓰디쓴 환멸을 안겨 주었다. 그에게 공화주의는 단순한 정치적 신념 이상의 것이었다. 밀턴에 따르면 군주정은 인민을 왕의 종으로 격하시킴으로써 인간성을 모독하는 정치체제였다. “신의 형상”을 지닌 인간에 대한 모독은 신성모독에 다름 아니었다. 밀턴은 이런 이유로 1649년 찰스 1세 처형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글을 써서 반혁명세력의 준동에 일침을 가했다. 그러나 잉글랜드의 공화정 실험은 11년 만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왕정복고 이후 밀턴은 정치적 실천이라는 현세적 이상을 뛰어넘어 개인의 영혼을 개혁하는데 절대적 가치를 둔 새로운 입장, 새로운 차원으로 그 중심을 옮겼다. 그 열매가 바로 3대 서사시 《실낙원》, 《복낙원》, 《투사 삼손》이다.

 

진정한 시인이란

아마 평범한 사람 같으면 밀턴이 겪은 세 가지 고통 중 한가지만으로도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거듭해서 밀어닥친 시련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유에 대한 열망과 공화주의의 신념을 일관되게 견지했으며, 그마저 실패로 돌아가자 평생 추구한 이상과 가치를 불후의 장편 서사시들에 담아냈다. 밀턴은 일개 시인을 뛰어넘어 한 시대를 풍미한 혁명적 지식인이었고, 그의 영웅적 분투의 궤적은 정치적 삶과 문학에서 분명히 나타났다. 이런 의미에서 밀턴은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1795-1881)이 《영웅숭배론》에서 정의한 “시인”의 개념과 정확히 일치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위인은 어떤 종류의 위인도 될 수 있다고 나는 상상해 봅니다. 그저 의자에 앉아 글귀나 짓는 시인은 대단한 시는 결코 짓지 못할 것입니다. 그 자신이 영웅적 전사가 아니라면 영웅적 전사를 노래할 수 없습니다. 생각건대 진정한 시인의 내면에는 정치가, 사상가, 입법자, 철학자의 자질이 잠재해 있습니다. 많든 적든 간에 이런 모든 것이 어느 정도는 다 들어 있습니다.

 

칼라일이 말한 대로 밀턴은 한가로이 의자에 앉아 글귀나 짓는 시인이 아니었다. 그의 내면에는 영웅적 전사, 정치가, 사상가, 입법자, 철학자의 자질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일평생 흔들림 없이 원칙과 신념을 견지한 실천적 지식인이요 혁명가였다. 혁명가 밀턴의 정치적 발언과 행동에 근본적인 맥락을 부여한 것은 바로 영국혁명이었고, 그것은 밀턴의 생애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그래서 많은 연구자들은 밀턴의 생애를 영국혁명을 중심으로 하여 3단계, 즉 “혁명 이전 시기,” “혁명 기간,” “혁명 이후 시기”로 구분한다.

 

밀턴 생애의 첫 단계는 스튜어트 왕정에 대한 혁명이 발발하기 이전, 향학열을 불사르며 시인으로서의 자질을 연마하던 교육과 습작의 시절이다(1608-1640). 그는 열두 살이 되던 해부터 밤 12시 이전에 잠자리에 든 적이 없을 정도로 학업에 열중했다. 밀턴은 자신의 실명 원인을 어린 시절부터 지나치게 독서에 열중한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이러한 밀턴의 뛰어난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본 부친은 아들의 학업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해 주었다. 이 시기는 밀턴의 유럽 여행(1638-39)에서 그 절정에 달한다.

 

두 번째 단계는 영국혁명의 대의를 지지한 논객으로서, 그리고 공화정 및 호국경 체제의 옹호자로서 활동한 시기이다(1640-1660). 그는 혁명 초기에는 국교회를 반대하는 청교도들과 연대하여 반주교제적 팸플릿과 이혼 관련 팸플릿들을 다수 출간했다. 그러나 밀턴은 그 후 혁명동지였던 장로파의 배신으로 큰 충격을 받는다. 그의 실명도 부분적으로 이 충격에 기인한 것이었다. 크롬웰의 호국경체제가 수립된 후 그는 잉글랜드 혁명정부에서 외교부장관에 해당하는 직분을 맡아, 전 유럽을 상대로 글로써 혁명 대의를 천명하면서 적들과 논쟁을 벌였다. 사실상 혁명정부의 대변인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그는 이 시기의 과로와 격무로 인해 시력이 악화, 끝내 실명의 비운을 맞이하게 되었다.

 

세 번째 단계는 혁명이 실패로 끝나고 스튜어트 왕정이 복고된 후 서사시 집필에 몰두하던 시기이다(1660-1674). 혁명 주도세력이 반역 혐의로 체포되고 처형당하던 살기등등한 분위기 속에서 밀턴 역시 체포를 당했지만 가까스로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살아남은 뒤에도 “반역자”에 대한 감시의 시선은 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이 시기에는 흑사병이 번져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었고 대화재가 발생하여 런던시가 폐허로 변하는 등 엄청난 재난이 잉글랜드에 닥치기도 했다. 밀턴은 역병과 화재를 피해 한동안 런던을 떠나 피신해야만 했다. 집안에서 딸들과의 불화가 생긴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러나 그는 앞 못 보는 늙은 몸으로 세 편의 위대한 서사시를 완성하여 출간했다.

 

밀턴 탄생 400주년을 맞이하며

영국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1770-1850)는 종교가 타락하고 예의와 염치가 사라진 부박浮薄한 풍조 속에서 영혼을 잃어가던 동시대인들에게, 이 시대야말로 밀턴이 간절히 필요한 시대라고 설파하는 한 편의 소네트(〈런던, 1802년London, 1802〉)를 써서 밀턴에게 바쳤다.

 

밀턴, 그대야말로 우리 시대에 살아 있어야 하겠다.

영국은 그대를 요구함이 간절하다.

지금 이 나라는 괴인 물 썩어가는 늪 같으니.

교회도, 군대도, 문학도, 가정도, 웅장한 부호의 저택도

마음속의 행복을 잃었도다.

아, 우리를 일으키라, 우리에게 돌아오라.

그리하여, 우리에게 예의와 덕행과 자유와 힘을 달라.

그대의 영혼은 아득한 별같이 고고하게 살았고,

그대의 목소리는 바다같이 울렸다.

맑은 하늘처럼 깨끗하고, 위엄 있게, 자유롭게

그대는 인생의 대도大道를 경건한 기쁨 가운데서 걸었다.

그러나 또한 가장 낮은 의무마저 피하지 않고.

 

2008년은 밀턴이 태어난 지 40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현실에서 밀턴은 상아탑에 유폐된 채 몇몇 전공 학자들만의 전유물專有物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그 덕분에 우리 출판가에는 일반 독자들이 밀턴의 아름답고 올곧은 삶을 접할 수 있는 평전 하나를 쉽사리 찾아보기 힘든 형편이다. 저자는 “이 땅에서” 밀턴을 공부한다는 것의 의미를 고민해왔던 사람으로서 우리 현실에 대해 약간의 의무감을 가지고 있었다. 밀턴 탄생 400주년을 맞이하여 상아탑 안에 갇힌 밀턴의 아름다운 삶과 사상을 끄집어내어 모국어인 한글로 우리 젊은이들과 공유하고 싶었다. 아울러 밀턴 탄생 400주년을 저자 혼자서라도 축하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 평전은 저자가 밀턴을 위해 마련한 조촐한 400주년 생일 잔칫상이요, 한국 사회에 바치는 자그마한 선물이다.

 

바라건대 밀턴의 올곧은 생애와 사상이 난쟁이와도 같은 우리 모두가 함께 딛고 올라설 “거인의 어깨”가 되었으면 한다. 무엇보다도, 평생 돈과 권력을 좇아 온갖 비리와 탈법을 저지르며 카멜레온처럼 변신을 거듭해왔으면서도 자신들의 기회주의를 “변화”라는 이름으로 합리화, 정당화하는 모리배謀利輩와 정상배政商輩들―유감스럽게도 그들 중 상당수는 우리 사회의 지배자로 군림하고 있다―이 우리 젊은 영혼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는 현실에서, 조국과 사회를 위해 아름다운 원칙을 평생 관철한 밀턴의 올곧은 삶이 하나의 본보기가 되었으면 한다. 신념도 지조도 없이 권력과 이익을 따라 불나방처럼 나부끼는 우리 시대의 지식인(?)들, 그리고 자폐증에 걸린 채 지성의 불은 꺼지고 칙칙한 열기만이 가득한 한국 개신교는 밀턴에게서 무언가 배울 점이 있을 것이다. 그럴 안목이 있다면 말이다.

 

이 땅의 젊은 독자들에게

저자는 여러 해 전부터 평전 집필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실천에 옮기기가 그리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우선 막대한 공력이 드는 평전 저술에 능력도 경험도 없는 사람이 뛰어든다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았다. 특히 국내외를 막론하고 밀턴 연구자들이 대부분 영문학 전공자라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저자가 역사학 전공이라는 점이 행여 밀턴을 바라보는 관점에 한계로 작용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다. 게다가 작금의 위축될 대로 위축된 인문 출판 시장을 고려할 때 과연 밀턴이란 주제가 우리 독자들에게 얼마나 호소력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능력이 부족하고 그 결과물이 보잘것없을지라도, 그리고 아무리 조건이 척박할지라도,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은 비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일반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밀턴의 문학적 성과물들에 대한 이론적 접근과 고답적인 비평보다는, 그의 고난에 찬 생애와 불굴의 이상주의에 초점을 맞춘 역사학자의 서술이 한층 접근하기 쉬우리라는 생각도 해봤다. 접시 깰 것이 두려워 설거지를 않겠다는 것은 변명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용기를 냈다. 그 결과물이 이 책이다. 책 말미에 인용문헌을 밝히는 주가 붙어있어 전공자들이나 읽는 학술서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단지 겉모습일 뿐, 이 평전은 어디까지나 밀턴에 관심을 갖는 일반 독자들, 특히 자신의 정신적 성장과 우리 사회의 미래에 진지한 관심을 갖는 “젊은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씌어졌다.

 

젊은 독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서두에 “밀턴의 마지막 회상” 같은 장치를 고안해 넣기도 했고, 물 흐르듯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글쓰기는 물론이고 편집과 구성에도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역시 쉽게 쓰기는 어렵고 어렵게 쓰기는 쉬운 법임을 절감하게 된다. 밀턴의 아름다운 생애에서 한줄기 빛을 발견하는 독자가 단 한 사람이라도 나올 수 있다면, 이 책을 만드는데 기울인 저자의 모든 노력과 시간은 충분히 보상을 받고도 남을 것이다.

 

저자의 대학생 시절 고전 독서회에서 밀턴의 《실낙원》을 함께 읽으시면서 젊은이들에게 진리에 대한 사랑을 일깨워주시던 노평구 선생님의 자애로운 모습이 떠오른다. 저자가 처음 밀턴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 독서회에서였으니, 아마도 이 평전은 그 무렵부터 착상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계획만 세운 채 예의 “수동성”에 기대어 주저하고 있던 저자를 끌어내 평전 집필의 계기를 만들어준 안희주 님과 조성웅 님께 감사를 표한다. 특히 원고를 처음부터 끝까지 여러 차례 꼼꼼하게 검토하고 평전의 전체적 구성에 귀한 도움말을 주신 푸른역사 박혜숙 사장께는 각별한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지은이 박상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