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적 이상주의자 밀턴
월간 <기독교사상> 2008년 6월호
영문학사상 최고의 서사시인으로 꼽히는 존 밀턴(1608-1674)의 생애에 대한 한국 독자들의 인상은 어떤 것일까? 이렇다 할 풍파 없는 안온한 삶을 영위하다가 노년에 이르러 가족들의 애정 어린 보살핌 속에서 딸들에게 서사시 《실낙원》을 구술하여 집필하는 정경, 아마 이런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를지 모른다. 비록 시각장애인의 처지이기는 하지만 순탄한 삶을 살다가 노년에 접어들어서는 따사로운 햇살이 비치는 창가에 앉아 사랑하는 딸들의 시중을 받으며 위대한 서사시를 완성한 행복한 시인의 모습이다.
그러나 일반의 통념과는 달리 밀턴의 생애는 지극히 파란만장하고 고난에 찬 것이었으며, 그는 이 모든 역경과 장애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켜낸 불굴의 이상주의자였다. 국왕 찰스 1세가 사형 선고를 받고 도끼에 목이 잘려나가는, 영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태가 벌어지던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밀턴은 조국을 위해, 그리고 신앙과 대의를 위해 온몸을 불사른 혁명가요 종교개혁가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밀턴의 고난에 찬 생애와 혁명적 이상주의를 알지 못하고서는 그의 서사시와 문학을 이해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혼 문제로 오명을 얻다
밀턴의 생애에는 세 번의 커다란 위기가 있었다. 첫째로, 이혼문제이다. 그는 부부가 정신적으로 불일치할 경우 이혼을 해도 무방하다는 주장을 펼쳤는데, 이것은 현대적 기준으로 보면 매우 상식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글들은 편협한 시대정신 속에서 철저히 왜곡되었고, 그 결과 평생 “이혼자divorcer”라는 오명을 감수해야만 했다. 이혼자를 “난봉꾼”과 마찬가지 취급하던 시대였으니, 도덕성을 긍지로 삼고 있던 밀턴으로서는 수치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1643년 8월에서 1645년 3월에 이르기까지 그는 이혼을 옹호하는 네 편의 팸플릿을 작성했다. 밀턴에 의하면 신이 정한 결혼의 일차적 목적은 육체적 결합이 아니라, 상호간의 우의를 도모하고 고독을 위로하는데 있었다. 다정한 대화와 정신적․감정적 일치, 그것이야말로 부부의 결합에서 본질적인 것이었다. 밀턴에게 있어 감미로운 사랑과 위안이 없는 결혼은 영혼 없는 육체와 다름없었다.
그러므로 밀턴은 이혼을 금지한 《성경》 구절들을 새롭게 해석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그의 해석에는 상당한 파급력을 갖는 정치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요컨대 율법의 근본은 긍휼과 공평이며, 따라서 율법의 유일한 목적은 인간의 복리(福利)라는 것이었다. 율법을 그 자구(字句)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복리라는 본래의 목적에 비추어 이해하는 것이 올바르다는 전제에서 볼 때, 그리스도는 인간의 복리에 반하는 율법을 제정할 리가 없었다. 밀턴은 “인간의 복리와 자비에 앞서 결혼을 말하거나 다른 규례를 들먹거리는 자는, 스스로를 교황쟁이라고 고백하든 아니면 프로테스탄트라고 고백하든 또는 다른 무엇이라고 신앙을 고백하든 간에, 그는 바리새인에 불과하며 복음을 이해하지 못한 자”라고 단언했다.
이혼 문제는 밀턴이 사상적 급진파로 전환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밀턴은 이혼 팸플릿들에서 처음으로 계약, 형평, 자연법, 자유 등의 개념을 취급했는데, 이러한 개념들은 그 후 그의 정치사상에서 핵심적인 것이 되었다. 결혼 계약과 정치적 계약을 비교하면서, 밀턴은 만일 ‘잘못된 결혼’이나 ‘잘못된 정부’가 ‘무가치한 속박’을 초래한다면 이들 계약은 구속력을 갖지 못한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그 계약들은 인간의 복리라고 하는 정당한 목적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그 후 정치적 자유를 논한 《왕과 행정관의 재직조건》(1649)에서 밀턴은 국왕의 재판과 처형을 지지했다. 밀턴은 앞서 이혼 팸플릿들에서 개인의 자유와 복리야말로 혼인 관계를 해소시키는 중요 근거라고 보았다. 마찬가지로 그는 이 글에서 국왕이 인민의 복리를 도모해야 할 계약상의 의무에 얽매어 있다고 주장하면서, 자연권, 본원적 자유, 계약, 동의 등 이성주의적 원리를 원용했다.
당시의 소란스러운 정국에 심란해 있던 지체 높은 잉글랜드인들은 밀턴의 이혼관을 ‘마음 내키는 대로의 이혼’을 주장하는 것으로 받아들였고, 그들은 그러한 밀턴의 입장이 모든 사회 질서의 종국, 즉 완전한 무질서를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느꼈음에 틀림이 없다. 밀턴이 취한 태도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온건하고 심지어 전통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당시의 관점에서 그것은 너무나도 망측한 것이었다. 밀턴은 자신의 생각이 받아들여지기는커녕 진지한 토론의 주제로마저도 다루어지지 않는 당시의 세태에 크게 실망했다. 밀턴은 이혼 문제로 수모를 당하는 과정에서 사상과 표현의 자유의 중요성에 눈을 뜨게 되었고, 그 결과 인류 역사상 최초로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주장한 《아레오파기티카》를 집필하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혼의 정당성을 주장한 밀턴은 평생 한 번도 이혼한 적이 없었다.)
문필가에게 닥친 실명의 고통
밀턴 생애의 두 번째 위기는 44세 되던 1652년에 덮친 시력의 완전 상실이다. 말 그대로 앞을 전혀 못 보는 시각장애인이 된 것이다. 그의 시력 상실은 36세 무렵부터 시작되어 8년에 걸쳐 서서히 진행되었다. 글 읽기와 글 쓰기를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삼고 있는 문필가에게 이 같은 시련은 실로 악성(樂聖) 베토벤의 청력(聽力) 상실에 견줄 수 있는 가혹한 것이었다. 더욱이 17세기의 낙후된 의학 수준으로 인해, 밀턴은 치료 과정에서 현대인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1650년 1월 8일, 잉글랜드 공화국 국무회의는 외국어장관 밀턴에게 명령을 내렸다.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던 프랑스의 탁월한 논객 클라우디우스 살마시우스(1588-1653)가 얼마 전 출간한 《찰스 1세를 위한 변론》(1649)에 대한 반박문을 집필하라는 것이었다. 밀턴의 집필 작업은 그 해가 저물기 전에 끝났으며, 이듬해인 1651년 2월 24일에 《잉글랜드 국민을 위한 변론》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잉글랜드 공화국 정부의 찰스 1세 처형을 비난한 살마시우스의 주장에 맞서, 전 유럽을 상대로 잉글랜드 국민의 무고함을 밝힌 이 글은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다. 그의 글은 전 유럽의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라틴어로 작성되었고, 이 글이 출간된 후 밀턴은 잉글랜드 공화국의 옹호자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처음 밀턴이 이 임무를 떠맡으려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를 만류했다. 그들이 살마시우스의 학문적 권위에 주눅이 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행여 밀턴의 답변이 적절치 못한 것이 되거나, 그로 인해 조국의 대의가 손상되지나 않을까 우려했다. 그러나 밀턴은 이러한 모든 우려를 비겁한 소치로 간주하거나 자신이 맡은 역할에 대한 시샘 정도로 간주했다.
만류한 것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밀턴은 이미 1644년경부터 시력이 나빠지기 시작하여 그 후 왼쪽 눈의 시력을 완전히 잃었고, 국무회의로부터 반박문을 집필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는 남은 오른쪽 눈마저 매우 나쁜 상태에 있었다. 전반적인 건강 상태마저 악화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의사들은 밀턴이 그 임무를 맡을 경우 남은 눈의 시력마저 완전히 잃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자랑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잉글랜드 국민을 위한 변론》이 출간된 지 만 1년 후인 1652년 2월에 완전 실명의 비운을 맞게 되었다.
밀턴의 실명은 가혹한 시련이었다. 글을 읽고 쓰는 학자에게 시력이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생애의 대부분을 글 읽기에 할애했던 학자에게 독서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참기 힘든 고통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밀턴은 완전 실명 한 후, 적들로부터 그가 장님이 된 것은 신의 심판에 의한 것이라고 공공연한 비난을 받기도 했다. 신체적인 장애도 감당하기 힘든 일이거늘, 하물며 밀턴처럼 자부심 강한 인물에게, 적들의 비난은 실로 굴욕적이었을 것이다.
군주제라는 황금 송아지 앞에서
밀턴 생애의 세 번째 위기는 1660년의 왕정복고였다. 왕정복고는 불굴의 공화주의자요 정치적 이상주의자였던 밀턴에게 쓰디쓴 환멸을 안겨 주었다. 그에게 공화주의는 단순한 정치적 신념 이상의 것이었다. 밀턴에 따르면 군주정은 인민을 왕의 종으로 격하시킴으로써 인간성을 모독하는 정치체제였다. “신의 형상”을 지닌 인간에 대한 모독은 신성모독에 다름 아니었다.
밀턴은 국왕 주변에서 사치와 방종, 그리고 인민을 비참하게 만들고 남녀 귀족들을 타락시켜 굴종적으로 만드는 저열한 생활방식 말고는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멀쩡한 귀족들로 하여금 “공공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지 않고, 국왕의 집사, 시종, 의전관, 하인 나부랭이로 전락해 심지어 국왕의 요강단지나 들고 다니며 수발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요컨대 군주정은 인간성을 타락시킨다는 것이 밀턴의 결론이었다. 밀턴은 이런 이유로 1649년 찰스 1세 처형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글을 써서 반혁명세력의 준동에 일침을 가했다. 그러나 잉글랜드의 공화정 실험은 11년 만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밀턴은 1660년 2월에 잉글랜드 공화국을 위한 최후 변론이라 할 《자유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한 쉬운 길》을 출간했다. 이 팸플릿은 왕정복고를 저지하려는 밀턴의 마지막 시도였다. 밀턴은 한때 잉글랜드 공화국 옹호자로서 얻었던 전 유럽적인 명성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임박한 파멸로부터 공화국을 구원해 내겠다는 강렬한 사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해 4월에 밀턴은 《자유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한 쉬운 길》을 수정 증보하여 재판을 간행했다. 초판을 간행한지 2개월 만의 일이었고, 찰스 2세가 복귀하기까지 2개월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왕정복고가 뻔히 예상되는 상황에서 밀턴은 무모할 정도로 커다란 위험 부담을 감수하고 팸플릿을 연거푸 출간한 것이다. 이렇듯 긴박한 시기에 반(反)군주제적 견해를 그토록 노골적으로 천명한 인물은 잉글랜드 전역에서 밀턴 이외에 달리 찾아볼 수 없었다. 크롬웰 지지자들은 대부분 이미 적에게 투항했거나 서둘러 항복하는 중이었다. 앞 못 보는 밀턴만이 마치 투사 삼손처럼 끝까지 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밀턴의 이런 행동은 그의 과거의 행동양식에 비춰볼 때 낯선 일이 아니다. 1640년대와 1650년대 혁명기를 거치면서 그는 자신의 종교적․정치적 입장을 천명함에 있어서 정치적 위험성에 대한 고려를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러나 왕정복고가 기정사실화 되고 있는 시점에서의 공화주의 옹호는 이제껏 밀턴이 취한 어떤 행동 이상으로 무모하고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마침내 두려워했던 사태가 닥쳤다. 1660년 5월 29일, 마침내 국왕이 런던에 도착하여 군중으로부터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다. 밀턴에게 왕정복고는 정치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크나큰 재앙이었다. 그는 온 나라가 군주제라는 황금 송아지 앞에 변절하여 무릎을 꿇는 치욕적 장면을 목격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악명 높은 국왕시해 옹호자로서 목숨마저 위협받는 가련한 처지에 내몰리게 되었다. 밀턴은 그 해 11월에서 12월 사이에 한 달 정도 감옥에 갇히기도 했지만 복고왕정의 관용 정책 덕분에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다.
왕정복고 이후 밀턴은 정치적 실천이라는 현세적 이상을 뛰어넘어 개인의 영혼을 개혁하는데 절대적 가치를 둔 새로운 입장, 새로운 차원으로 그 중심을 옮겼다. 그 열매가 바로 3대 서사시 《실낙원》, 《복낙원》, 《투사 삼손》이다. 밀턴이 겪었던 삶의 모든 고통은 그를 파멸로 이끈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적인 눈과 귀를 열어 가치관과 인식의 변화를 일으켜 새로운 시각으로 인생과 우주와 역사를 바라볼 수 있게 만들어준 것이다.
저는 두 눈을 잃었을 뿐입니다
1663년 2월에 밀턴의 자택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요크 공 제임스가 직접 방문한 것이다. 그는 1649년 사형당한 찰스 1세의 둘째 아들이자 당시 잉글랜드 국왕이던 찰스 2세의 동생으로서, 장차 제임스 2세(1685-1688 재위)가 될 인물이었다. 어느 날 그는 형인 찰스 2세에게, 늙은 장님 밀턴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한번 꼭 만나봤으면 한다고 승낙을 구했다. 국왕은 동생의 호기심을 막을 의사가 없음을 밝히며 허락했고, 얼마 후 제임스는 밀턴의 거처를 알아내 개인적으로 방문했다. 먼저 밀턴이 소개되었고, 다음으로 밀턴은 찾아온 손님이 어떤 신분인지를 소개 받았다. 얼마간 서로 대화를 나누던 중 제임스는 손님답지 않게 퉁명스러운 말투로, 밀턴의 실명이 그의 저술 활동에 대한 신의 심판의 결과라고 생각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수사법의 대가답게 밀턴은 이렇게 답변했다.
“만일 전하께서 여기 우리에게 닥친 재앙을 하늘이 진노하신 징후라고 생각하신다면 전하의 부친이신 선왕의 운명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겠습니까? 그런 전제에서라면 하늘은 저보다는 부친께 더 훨씬 더 불쾌하셨던 게지요. 저는 두 눈을 잃었을 뿐이지만 선왕은 머리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밀턴은 자신이 두 눈을 잃은 것이 하늘이 내린 벌이라면, “당신 아버지 찰스 1세는 하늘로부터 얼마나 큰 벌을 받았기에 처형장에서 목이 잘렸느냐”라고 반문한 것이다. 제임스는 이 말에 몹시 화가 나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궁정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는 국왕에게 밀턴 같은 악당을 교수형 시키지 않은 것은 큰 실수라고 따졌다.
동생의 이야기를 듣던 국왕은 밀턴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더냐고 물었다. “늙고 가난했습니다.” “늙고 가난하다고? 게다가 그는 앞도 못 보지 않던가?” “그렇습니다. 딱정벌레 같은 장님이었습니다.” “제임스, 그를 교수형 시키길 원하다니, 어쩌면 그토록 어리석은가? 그를 목매달아 죽이면 그에게 봉사를 하는 셈이야. 불행에서 구해주는 꼴이지. 암, 그리 되어서는 안 되지. 만일 그가 늙고 가난한 장님이라면 그는 분명 충분히 비참한 처지에 있겠군. 그냥 그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게.”
국왕의 회유를 거절하다
밀턴이 번힐에 살던 1663년 어느 날 찰스 2세 정부의 고위 관리가 집으로 찾아왔다. 그는 밀턴에게 정부를 위해 라틴어 비서관으로 봉사해 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당시 상황에서 그와 같은 제안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정부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악명 높은 밀턴을 전향시켜 자기네 편으로 끌어들이는 쾌거인데다, 밀턴에 과거에 했던 모든 주장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일이기도 했다. 물론 밀턴은 이 제안을 거부했다. 훗날 밀턴의 미망인은 종종 이렇게 말하곤 했다.
“국왕은 메시지를 보내 왕실을 위해 글을 써줄 것을 남편에게 요청했지요. 하지만 남편은 그와 같은 행동은 자신의 과거 행동과 크게 모순되는 것이며, 자신은 양심에 반하여 글을 쓴 적이 결코 없었노라고 답변했어요.”
왕정복고로 재산의 상당 부분을 잃은 밀턴에게는 부양할 가족도 많았다. 경제적 어려움 없이 편안하게 살자면 왕의 제안을 수락하는 것도 현실적인 선택일 수 있었다. 그러나 밀턴은 양심에 어긋나는 글은 쓸 수 없다고 제안을 거절했다. 흔히 지식인은 나약하다고 하지만 밀턴의 생애에서는 권력이나 금력에 굴복한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맑게 살던 사람이 늙어서 추하게 변한다고 하여 “노추(老醜)”라는 말이 있다. 곧게 살던 사람이 늙어서 탐욕에 눈이 먼다고 하여 “노욕(老慾)”이란 말도 있다. 어려움에 처한 후에야 사람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법이다.
밀턴은 일개 시인을 뛰어넘어 한 시대를 풍미한 혁명적 지식인이었고, 그의 영웅적 분투의 궤적은 정치적 삶과 문학에서 분명히 나타났다. 이런 의미에서 밀턴은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1795-1881)이 《영웅숭배론》에서 정의한 “시인”의 개념과 정확히 일치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위인은 어떤 종류의 위인도 될 수 있다고 나는 상상해 봅니다. 그저 의자에 앉아 글귀나 짓는 시인은 대단한 시는 결코 짓지 못할 것입니다. 그 자신이 영웅적 전사가 아니라면 영웅적 전사를 노래할 수 없습니다. 생각건대 진정한 시인의 내면에는 정치가, 사상가, 입법자, 철학자의 자질이 잠재해 있습니다. 많든 적든 간에 이런 모든 것이 어느 정도는 다 들어 있습니다.
칼라일이 말한 대로 밀턴은 한가로이 의자에 앉아 글귀나 짓는 시인이 아니었다. 그의 내면에는 영웅적 전사, 정치가, 사상가, 입법자, 철학자의 자질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일평생 흔들림 없이 원칙과 신념을 견지한 실천적 지식인이며 혁명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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