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문학·번역

[펌]우리 나라 개판 번역 문화에 대한 보고서

by 안티고네 2007. 2. 13.
우리 나라 개판 번역 문화에 대한 보고서 | 2007-02-06 10:20
http://blog.yes24.com/document/614882
박상익 저 | 푸른역사 | 2006년 02월
내용     편집/구성    

히가시노 게이고의 <백야행>을 읽다보면 여주인공 유키호의 오로라 어쩌구 저쩌구 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 글을 읽고 연달아 오로라 오로라 하니깐 도대체 오로라가 무엇일까 ? 하는 의문이 든 적이 있었다. 문맥을 보면 오로라라기 보다는 발터 벤야민이 말하는 아우라가 아닐까? 하는 순간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이야기의 전체적인 흐름에 있어서 오로라는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는 단어가 아니었기에, 그때는 그냥 넘어갔었다. 한참 나중에야 그 오로라가 역시 생각했던 대로 아우라였다는 것을 일본 원서와 비교해가며 번역의 오역을 지적한 타인의 리뷰를 보고 알았다. 그 때 백야행을 번역한 정태원이라는 사람의 일본어 실력이  일본어만 알고 인문총서에 대한 무지를 여실히 드러나는 것 같아서 실실 웃고 넘어갔는데, 전체적인 이야기의 흐름이 몇몇 단어에 의해서 좌우될 정도로 큰 타격을 받지 않았고 그까짓거 용어 모를 수도 있지. 인문과학이나 예술 총서도 아니고 기껏해야 소설인데 뭐, 하며 번역문학에 있어서 오역은 어쩔 수 없는 하나의 현상이다라는 안일한 생각을 가졌었다. 

 

오히려 이 <백야행>이라는 작품을 읽고 나서 정태원이라는 역자의 몇몇 가지 오역보다도 이 작품에 대한 안내 정보(작가 소개도 형편없는)는 커녕 역자 후기 한장 없다는 사실에 경악 했었다는 사실이다. 번역이라는 것이 결코 만만치 않는 작업이라는 사실로 짐작하건데, 그래도 책 한권의 번역을 마치고 나서는 무슨 소감 한마디 정도는 독자들을 위해 남겨 놓아야하는 것이 의무 아닌가!  달랑 작품만 수록 되어 있다는 사실이 오역보다도 더 꽤심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오죽하면 그 때 게이고를 검색한 것이 아니고 정태원이라는 역자를 검색하고 난리를 친 적이 있었다. 추리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정태원이라는 분은 거목정도로 받들어 모시는 인물같은데, 이런 무성의로 일관하는 책의 역자에게 거목이라는 무슨 조폭 우두머리에게 머리 조아리듯  갖다 붙여댄 것에 비웃지 않을래야  비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느 독자가 이런 작품에서 보여준 역자의 매너에 믿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이 책 도서관에서 빌려보고 나중에 포인트로 사야지하고 있었는데,  개정본에 역자 후기 실리는 날 살 것이다.)

 

이런 정태원 같은 역자가 꼭 읽어야 할 책이 바로 이 <번역은 반역인가>이다. 박상익 선생은 어학 실력만 있다고 번역 작업이 쉽사리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113쪽)라며 인문학만 들여다 보더라도 문학 역사 철학 사이에는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긴밀한 관련이 있으며, 또 그것들은 사회과학 및 자연과학의 여러 분과들과 영역이 서로 중첩되어 있(110쪽)다고 말하고 있는데, 자신도 번역 작업시 필요한 참고 서적을 구입하는 비용이 큰 비중을 차지 하다보니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고 말하고 있다. 이 정도의 번역 서비스는 차치하고라도, 고등학생도 알고 있는 아우라를 몰라 오로라(혹 오로라 공주를 연상하지 않았을려나?, 이 정도의 용어는 사전 한 번 들춰보았더라면 금방 알 수 있었을 텐데) 라고 덥석 해석한 정태원씨나 편집자가 이 정도의 상식을 가지고 있으니 .. 하긴 메이저급 출판사라고 다르지 않다. 얼마전에 읽은  하루키의 <의미가 없다면 스윙도 없다>라는 작품에 하루키가 부르스 스프링스틴에 대한 음악평을 얘기하다가 그의 노래 Born in the USA를 거론할 때 본 인 유에스에이라고 음운을 옆에다 표기해 났는데 이거 무슨 웃지 못할 해괴망측한 일인지. 아니 우리 나라가 영어시장에 쏟아붓는 돈이 조가 넘는다면서 본 인 유에스에이를 본 인 디 유에스에이라고 곳곳마다 표기한 것은 정말이지 한숨이 푹푹 나오는 일이었다. 이거 요즘 영어 배우는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알지 않나요. 모음 앞에서 디라고 읽어야 하는데 발음상 예외적인 경우가  어쩌구 저쩌구.....메이저급도 이모양이니, 이렇게 되면 이 책에 대한 신뢰가 반으로 깍이는 것은 사실이다.

 

저자 박상익이 말하는 우리 나라 번역문화에 대한 신랄한 비판에 귀 기울이면서, 우리 나라 번역문화의 현장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저자 박상익은 다른 나라 언어로 된 텍스트의 번역이야 말로 우리의 문화 발전의 원동력이며 문화 경쟁력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솔직히 우리 나라 번역의 현주소가 이렇게 개판인 줄 몰랐다. 번역자에 대한 대우가 형편 없다보니 전문 교수들 조차 대학원생 제자들에게 번역을 떠 맡기고 얼렁뚱땅 번역해 놓은 우리 글을 무슨 말인지 몰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었던 것이다. 부끄러운 것은 둘째치고 적어도 어떤 분야에서 전문이라고 일컫는 사람들이, 학문에 대한 열정은 다 어디로 가고 자리 꿰차고 앉자 있기위하여 엉뚱한 곳에서 기를 쓰고 아부하는 권력형의 교수만 있는 것 같아서 영 씁쓸했다.

 

좀 놀란 것은 지금 이렇게 사용하고 쓰고 말하는 한글이 사용된 시기가 얼마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박상익 교수가 지적하기 전까지는 몰랐었고 자각조차 하지도 않았었다.게다가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용어 또한 대부분 일본에게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즉 우리가 이렇게 한글로 말을 하고 글을 쓴 것이 100년이 채 안 된다는 것이다. 일본은 메이지 시대부터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국가차원에서 번역국이라는 기관을 설치하여 조직적으로 서양 서적을 수만권씩 번역했다고 하니, 실로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어느 문명이든지 다른 문명을 처음 접촉할 때 가장 먼저 수행하는 작업이 바로 번역(27쪽)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도 번역을 우습게 알고 번역자에 대우가 형편 없다는 사실은 지식 사회가 순수 학문에 대한 열정보다는 권력으로 물들어 있음을 단적으로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일본에게 우리가 번역에 있어서는 100년 정도 뒤져 있다는 저자의 말은 필시 새겨들을 만 하다. 

 

박상익 선생은 이 책에서 저술가이면서도 역자이기에, 번역 작업을 하면서 겪은 경험들과 공감대를 번역의 역사에서 부터 중역 문제, 번역의 오역, 편집인의 자질 그리고 도서관 문제에 이르기까지 폭 넓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그것도 상당히 재미있게, 아이들이 간식달라고 하는 말도 무시하고 불량 엄마 소리 들어가며 이 책 읽고 있었다. 어째든 그가 제시하는 것 중에서 번역문학계의 권력자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해 볼 만 했고 독자는 당연히 제대로 번역된 문장을 읽을 권리가 있고 오역에 대해 당당히 말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지금 당장 태동출판사와 문학세계에 전화 걸어 볼까나 !  하지만 이렇게 오역에 대한 항의 전화 일일히 출판사에 걸었다가는 전화비는 어떻하라구)

 

학자로서의 길은 어둠속에서 묵묵히 연주하는 파블로 카잘스 같은 모습이여야하지 않을까싶다.

 


 
인상 깊은 말
읽기에 재미있는 역사는 피상적, 감정적인 저작에 틀림없고 난해한 문체는 심오한 사상가임과 성실한 저술가임을 암시한다는 생각은 진실이 아니다. 읽기에 쉬운 것이 쓰기에는 어렵다. 설령 저자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처음부터 정확하게 알고 있다해도, 쓰고 또 쓰고, 고치고 또 고치는 수고는 모든 훌륭한 저술가들이 당연히 치러야 하는 일이다.투명한 문체는 언제나 고된 노력의 결과이며 문장과 문장, 단락과 단락사이의 흐르는 듯한 연결은 항상 이마에 땀을 흘린 후에야 얻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