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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읽기

서양역사를 왜 읽어야 하는가(2)

by 안티고네 2000. 4. 6.


3. 전통의 시제(時制)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

해마다 설날이 되면 텔레비전에서는 "외국인 장기 자랑 대회"가 열리곤 한다. 어느 해 설날, 이 프로그램의 사회자가 한 참가자에게 "우리 전통 풍속 가운데 인상 깊은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 외국인 참가자는 망설이지 않고 얼른 "대중 목욕탕"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사회자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표정이 잠깐 스치면서 "그런 것 말고, 연날리기, 제기차기 같은 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얼른 말을 돌리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전통"에 관한 두 개의 상이한 개념이 교차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즉 사회자는 민속촌이나 민속 박물관 등에 박제된 모습으로 남아있는 "과거의 것들"을 전통으로 생각한 반면, 장기 자랑에 참가한 그 외국인은 "현재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을 전통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두 사람 가운데 누가 전통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가졌다고 볼 수 있을까? 아마 우리 대부분은 이 프로그램의 사회자처럼 전통을 과거에 속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사회자는 우리 대부분이 지니고 있는, 전통에 대한 고정 관념을 고스란히 드러낸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학자 이매뉴얼 월러스틴(Imanuel Wallerstein)은 "전통의 시제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라고 말한다. 지금 이 순간도 전통은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더욱 엄밀하게 표현하자면, "전통의 시제는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한때 "우리 것이 좋은 것"이라는 광고 카피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 것이 좋은 것"이라고 말할 자격이 아무에게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것"뿐만 아니라 "남의 것"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만이 그런 말을 할 수 있다.

"남의 것"을 모르면서, 더욱이 "남의 것"에 관해 알아볼 생각도 없으면서, 그저 "우리 것이 좋은 것"이라고만 말하는 것은, 자칫 우물안 개구리의 독백으로 그칠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4. 감자, 고추도 외래 식물

세계화는 이제 거부할 수 없는 대세로 굳어져 가고 있다. 세계화를 달리 표현하자면 "전세계적인 규모의 경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전세계를 무대로 국제적 경쟁이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우리가 기왕에 갖고 있던 지적 인프라만을 갖고서는 국제 사회에서 충분한 경쟁력을 갖추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유용한 값진 지적 자산들을 전세계로부터 끌어 모아 우리의 전통을 부단히 새롭게 충전시키려는 노력이 없다면, 우리는 21세기의 "전세계적인 규모의 경쟁"에서 성공적으로 살아가기 힘들 것이다.

서양 역사 속에는 우리의 전통을 살찌울 값진 문화적 유산이 다른 어떤 외래 문명 못지 않게 많다. 우리가 서양 역사를 공부하는 중요한 목적 중 하나는, 서양 문명 중 가장 우수한 것들을 우리의 전통, 우리의 유산으로 삼아 21세기 우리의 미래를 밝히자는 데 있다.

비근한 예를 들어보기로 한다. 감자, 옥수수, 고구마, 고추 등은 모두 이 땅에 들어온 지 4백년 남짓밖에 안된 외래 식물이지만 이제 완전히 "우리 것"이 되었다. 외래 문화인 유교, 불교가 우리의 정신적 전통의 일부가 되고, 우리의 문화적 토양을 풍요롭게 했던 것처럼, 이 식물들도 우리 식단(食單)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필수 불가결한 요소가 된 것이다.

서양 문명은 지금 이 순간도 우리 전통의 일부로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중이다. 이제 남은 문제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부분을 "제대로" 이 땅에 뿌리내리게 하여, 진정한 "우리 것"으로 만드는 일이다. 이 책은 바로 이런 목적에 기여하기 위해 쓰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