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주신 분은 모 대학 영문학과 재학 중입니다.
안녕하세요. 자주 이 홈페이지에 들려서 자료를 보지만 이렇게 글을 올리는 것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지난번 YMCA에서 했던 김교신 강연회 때 교수님 강연 잘 들었고 흥미로웠습니다. 그날 시간이 여의치 않아서 인사도 못 드리고 왔는데 지금도 아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요즘 70년대의 페미니스트들이 쓴 밀턴에 대한 논문을 읽게 되었는데 그 분석이 상당히 놀라워서 교수님의 의견을 묻고 싶었습니다. 우선 그들에게 있어서 밀턴이라는 존재는 가장 최초의 가부장적 남성으로 그 후의 여성작가들에게 밀턴의 ‘악령’과도 같은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고 주장했습니다.
로망주의의 바이런적 사탄의 경우와 동일하게 그들은 하나님이란 존재가 억압적 성격을 지닌 독재자의 형상이고 그것에 반기를 들고 용감히 맞서 싸운 존재가 바로 사탄과 이브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듯 했습니다.그러면서 그들은 이브가 얼마나 에덴동산에서 억압받는 존재로 형상화 되어있고 하늘의 선에서 배제된 존재인지, 그리고 그들의 이미지가 사탄과 교묘하게 동일화 되면서 하늘에서의 배재화가 밀턴이라는 한 가부장적인 남성에 의해서 얼마나 정당화 되고 있는지를 "분노"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러한 논리를 처음 접했기 때문에 무척 당황스러웠고 그들의 그러한 기독교와는 완전히 다른 사고 시스템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단순히 기독교적 사고와 ‘다른 것’이 아니라, 총체적이면서 전체적인 사고 시스템, 즉 인테그러티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여주는 것 같아 완전한 의사소통의 불가능함을 느꼈습니다.
저는 그 논문에 반박하고 싶어졌고 비판하고 싶어졌기에 페미니스트들이 ‘밀턴의 복음적 시스템을 페미니스트들은 그들의 구약적 혹은 율법적 시스템으로 보고 해석하려고 한다’라는 식으로 너무나 추상적인 비판을 했고, 또 “이브가 아담의 갈비뼈에서 나온 것은 이분법적인 세계에 들어오기 전 그 이분법이 초월된 에덴의 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남성과 여성이라는 분리된 개체가 아니라 ‘하나’의 존재임을 뜻하는 것이다”라는 등의 또다시 추상적인 비판을 해버렸는데요.그들을 반박하기에는 제가 너무도 아는 바가 없는 것 같았습니다.
밀턴이 장님이 되어 받게 된 어떠한 예언자적인 이미지조차 상당히 비아냥거리는 페미니스트들에게, 그것에 동의하지는 않으면서 그러나 아는 것이 없기에 그들의 논리성에 함몰 당하고 말았는데요.
교수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건강하세요..^^
드디어 본격적인 영문학의 세계로 진입을 하게 되는군요. ^^*
한창 페미니즘이 유행하던 시기에 나타난, 페미니즘 시각에서의 텍스트 해석 경향은 긍정적, 부정적 측면을 함께 갖고 있습니다.
우선 긍정적 측면을 볼까요? 인문학의 모든 연구란 결국 ‘자기 시대의 현안문제’에 대한 담론을 ‘텍스트’로부터 얻어내려 한다는 것입니다. 페미니즘이 확산 일로에 있다면, 밀턴 연구자로서 밀턴 텍스트에서 페미니즘 담론을 이끌어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미국 역사학계에서는 60년대 흑인 민권운동과 더불어 ‘흑인노예사’에 대한 연구가 대단히 활발해졌죠. 그리고 같은 시기 여권운동의 활성화와 더불어 60, 70년대에 ‘여성사’가 중요한 비중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부정적 측면도 있습니다. 특히 밀턴 텍스트에 대한 페미니즘 관점의 연구는 몇 가지 점에서 문제를 안고 있다고 판단합니다.
먼저 역사성을 간과하는 경우가 종종 생기게 됩니다. 밀턴을 가부장주의자란 이유로 비판을 한다는 것이 그 단적인 예입니다. 17세기를 살다 간 사람을 가부장주의자란 이유로 비판한다는 것은 ‘비역사적 사고’의 소치입니다. 이른바 현재주의(presentism)의 오류를 범한다는 것이지요. (현재주의란 현재의 가치 기준에 입각해서 과거의 인물과 사건들을 판단하려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순신 장군이나 세종대왕 같은 훌륭한 인물도 현재주의적 잣대를 들이대면 형편없는 인간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두 사람 모두 반(反)민주주의자라는 이유로 비판을 받을 수 있거든요. 하지만 과연 그런 비판이 정당한 것일까요? 모든 인간의 시대의 아들입니다. 자기 시대를 초월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인문학 연구에는 역사학적 접근방식(historical approach)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19세기 로망주의자들이 하나님을 전제군주의 상징으로, 사탄을 그에 대한 반항의 상징으로 여긴 것도 혁명이 휩쓸던 그 시대의 분위기가 텍스트를 압도한 경우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적한 사탄을 공화주의자로 파악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연구는 그 반대의 해석을 내놓고 있습니다. 사탄은 공화정에 대적하여 반역을 획책한 찰스 1세(1649년 크롬웰 정부에서 사형 당했죠?)를 암시한다는 것이지요.
그럼 두 가지 해석 중에서 후자가 맞는다는 것을 어떻게 보증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 나올 수 있겠죠?
그건 밀턴의 사상적 일관성 문제를 따져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밀턴은 <실낙원> 뿐만 아니라, 방대한 분량의 산문을 썼고, 여기에는 일관해서 공화주의자로서의 소신이 줄기차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점은 생애 만년에 이르기까지 변함이 없습니다. (한 인물이 산문에서는 공화제를 지지하다가 시에서는 군주제를 지지한다고 말한다면, 그건 너무 억지스러운 주장 아닙니까?)
특히 공화주의적 신념은 밀턴의 기독교 신앙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습니다. 밀턴은 군주제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의 존엄성을 모독한다고 보고, 종교적 확신으로써 군주제를 반대하고 공화제를 지지했던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소위 페미니즘적 시각에서의 밀턴 연구는 밀턴 사상의 기독교적 컨텍스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합니다.
그러면 어째서 그 똑똑한 서양 학자들이 밀턴에 대한 터무니없는 주장을, 그것도 집단적으로 할 수 있었을까요? 앞에서 두 가지를 말했죠? (1)비역사적 접근방식, (2)기독교적 맥락과 사상적 일관성의 무시 말이지요.
그런데 또 하나가 있습니다. (3)텍스트 읽기의 게으름입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밀턴의 텍스트는, 특히 산문의 경우 분량이 방대할 뿐더러, 읽기에도 쉽지 않습니다. 영어권 독자들이 읽기에도 밀턴 영어는 독해가 어렵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꼼꼼하게 텍스트 전반을 살피기보다는, 대충대충 자신의 논지를 입증해 줄 것 같은 몇몇 문장과 단어를 뽑아내어 멋대로 꿰맞추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믿기 힘들겠지만 인문학계 일각에서 지금도 행해지고 있는 엄연한 현실입니다.
인문학에도 유행이란 것이 있습니다. 옷 유행과도 흡사하지요. 일단 페미니즘이 지성계를 휩쓸다시피 유행하게 되면 시류에 편승하여 자신의 이름을 높이려는 연구자들이 나타나게 마련이고, 그들은 밀턴 사상의 문맥 파악이라든가 역사적 접근방식 또는 사상적 일관성 문제보다는, 언론이나 학계에서 튀어보려는 동기가 우세하게 됩니다. 최근 번역된 소칼의 <지적 사기>(민음사)도 이와 비슷한 문제를 꼬집은 것이지요.
유행의 첨단을 걷는다는 평판으로 명성을 얻게 되면 여기 저기 초청하는 곳도 생기고, 현직 교수의 경우라면 연구비 신청할 때도 매우 유리해집니다. 일단 그런 흐름이 형성되면 그 흐름에 편승하는 집단의 규모가 계속해서 커집니다. 일종의 ‘학파’(?)가 생겨나는 셈인데, 그 안에 소속이 되면 비슷한 생각을 가진 연구자들끼리 서로 밀고 끌며 보호를 해주니까 여러 면에서 세속적인 의미의 시너지 효과(?)가 생깁니다.
하지만 부풀어 오른 풍선은 언젠가는 바람이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진실 없는 연구가 오래 갈 턱이 없지요. 혜연 양이 말한 것처럼 일개 대학생이 봐도 문제점이 드러난다는 겁니다. 그래도 공부하고 논문 쓰는 입장에서는 이런 엉터리 연구들이 고마울 때가 있습니다.
결국 논문이란 기존 연구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해석을 내놓는 것입니다. 독창성이야말로 논문의 질을 보증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연구자들에게는 그것이 다소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시류에 휩쓸린 어수룩한 논문들이 있으면 그에 대한 비판과 반박을 해가면서 자신의 논지를 반듯하게 세울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그런 ‘얄팍한’ 연구들도 우리에게는 다 쓸모가 있는 셈입니다.
좋은 논문 주제를 잡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면 석사 논문으로 이 주제를 다루는 것도 의미가 있겠습니다.
내가 쓴 <언론자유의 경전 아레오파기티카>를 잘 읽으시면 (특히 2부) 아마 앞으로 공부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밀턴의 공화주의에 관해서는 동아대 송홍한 교수가 쓴 “실낙원에 나타난 밀턴의 공화주의” (<밀턴연구> 제11집 2호)를 참조하기 바랍니다. 앞에서 말했던, 사탄이 공화주의였는가 여부에 대한 논점이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자주 이 홈페이지에 들려서 자료를 보지만 이렇게 글을 올리는 것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지난번 YMCA에서 했던 김교신 강연회 때 교수님 강연 잘 들었고 흥미로웠습니다. 그날 시간이 여의치 않아서 인사도 못 드리고 왔는데 지금도 아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요즘 70년대의 페미니스트들이 쓴 밀턴에 대한 논문을 읽게 되었는데 그 분석이 상당히 놀라워서 교수님의 의견을 묻고 싶었습니다. 우선 그들에게 있어서 밀턴이라는 존재는 가장 최초의 가부장적 남성으로 그 후의 여성작가들에게 밀턴의 ‘악령’과도 같은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고 주장했습니다.
로망주의의 바이런적 사탄의 경우와 동일하게 그들은 하나님이란 존재가 억압적 성격을 지닌 독재자의 형상이고 그것에 반기를 들고 용감히 맞서 싸운 존재가 바로 사탄과 이브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듯 했습니다.그러면서 그들은 이브가 얼마나 에덴동산에서 억압받는 존재로 형상화 되어있고 하늘의 선에서 배제된 존재인지, 그리고 그들의 이미지가 사탄과 교묘하게 동일화 되면서 하늘에서의 배재화가 밀턴이라는 한 가부장적인 남성에 의해서 얼마나 정당화 되고 있는지를 "분노"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러한 논리를 처음 접했기 때문에 무척 당황스러웠고 그들의 그러한 기독교와는 완전히 다른 사고 시스템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단순히 기독교적 사고와 ‘다른 것’이 아니라, 총체적이면서 전체적인 사고 시스템, 즉 인테그러티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여주는 것 같아 완전한 의사소통의 불가능함을 느꼈습니다.
저는 그 논문에 반박하고 싶어졌고 비판하고 싶어졌기에 페미니스트들이 ‘밀턴의 복음적 시스템을 페미니스트들은 그들의 구약적 혹은 율법적 시스템으로 보고 해석하려고 한다’라는 식으로 너무나 추상적인 비판을 했고, 또 “이브가 아담의 갈비뼈에서 나온 것은 이분법적인 세계에 들어오기 전 그 이분법이 초월된 에덴의 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남성과 여성이라는 분리된 개체가 아니라 ‘하나’의 존재임을 뜻하는 것이다”라는 등의 또다시 추상적인 비판을 해버렸는데요.그들을 반박하기에는 제가 너무도 아는 바가 없는 것 같았습니다.
밀턴이 장님이 되어 받게 된 어떠한 예언자적인 이미지조차 상당히 비아냥거리는 페미니스트들에게, 그것에 동의하지는 않으면서 그러나 아는 것이 없기에 그들의 논리성에 함몰 당하고 말았는데요.
교수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건강하세요..^^
드디어 본격적인 영문학의 세계로 진입을 하게 되는군요. ^^*
한창 페미니즘이 유행하던 시기에 나타난, 페미니즘 시각에서의 텍스트 해석 경향은 긍정적, 부정적 측면을 함께 갖고 있습니다.
우선 긍정적 측면을 볼까요? 인문학의 모든 연구란 결국 ‘자기 시대의 현안문제’에 대한 담론을 ‘텍스트’로부터 얻어내려 한다는 것입니다. 페미니즘이 확산 일로에 있다면, 밀턴 연구자로서 밀턴 텍스트에서 페미니즘 담론을 이끌어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미국 역사학계에서는 60년대 흑인 민권운동과 더불어 ‘흑인노예사’에 대한 연구가 대단히 활발해졌죠. 그리고 같은 시기 여권운동의 활성화와 더불어 60, 70년대에 ‘여성사’가 중요한 비중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부정적 측면도 있습니다. 특히 밀턴 텍스트에 대한 페미니즘 관점의 연구는 몇 가지 점에서 문제를 안고 있다고 판단합니다.
먼저 역사성을 간과하는 경우가 종종 생기게 됩니다. 밀턴을 가부장주의자란 이유로 비판을 한다는 것이 그 단적인 예입니다. 17세기를 살다 간 사람을 가부장주의자란 이유로 비판한다는 것은 ‘비역사적 사고’의 소치입니다. 이른바 현재주의(presentism)의 오류를 범한다는 것이지요. (현재주의란 현재의 가치 기준에 입각해서 과거의 인물과 사건들을 판단하려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순신 장군이나 세종대왕 같은 훌륭한 인물도 현재주의적 잣대를 들이대면 형편없는 인간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두 사람 모두 반(反)민주주의자라는 이유로 비판을 받을 수 있거든요. 하지만 과연 그런 비판이 정당한 것일까요? 모든 인간의 시대의 아들입니다. 자기 시대를 초월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인문학 연구에는 역사학적 접근방식(historical approach)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19세기 로망주의자들이 하나님을 전제군주의 상징으로, 사탄을 그에 대한 반항의 상징으로 여긴 것도 혁명이 휩쓸던 그 시대의 분위기가 텍스트를 압도한 경우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적한 사탄을 공화주의자로 파악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연구는 그 반대의 해석을 내놓고 있습니다. 사탄은 공화정에 대적하여 반역을 획책한 찰스 1세(1649년 크롬웰 정부에서 사형 당했죠?)를 암시한다는 것이지요.
그럼 두 가지 해석 중에서 후자가 맞는다는 것을 어떻게 보증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 나올 수 있겠죠?
그건 밀턴의 사상적 일관성 문제를 따져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밀턴은 <실낙원> 뿐만 아니라, 방대한 분량의 산문을 썼고, 여기에는 일관해서 공화주의자로서의 소신이 줄기차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점은 생애 만년에 이르기까지 변함이 없습니다. (한 인물이 산문에서는 공화제를 지지하다가 시에서는 군주제를 지지한다고 말한다면, 그건 너무 억지스러운 주장 아닙니까?)
특히 공화주의적 신념은 밀턴의 기독교 신앙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습니다. 밀턴은 군주제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의 존엄성을 모독한다고 보고, 종교적 확신으로써 군주제를 반대하고 공화제를 지지했던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소위 페미니즘적 시각에서의 밀턴 연구는 밀턴 사상의 기독교적 컨텍스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합니다.
그러면 어째서 그 똑똑한 서양 학자들이 밀턴에 대한 터무니없는 주장을, 그것도 집단적으로 할 수 있었을까요? 앞에서 두 가지를 말했죠? (1)비역사적 접근방식, (2)기독교적 맥락과 사상적 일관성의 무시 말이지요.
그런데 또 하나가 있습니다. (3)텍스트 읽기의 게으름입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밀턴의 텍스트는, 특히 산문의 경우 분량이 방대할 뿐더러, 읽기에도 쉽지 않습니다. 영어권 독자들이 읽기에도 밀턴 영어는 독해가 어렵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꼼꼼하게 텍스트 전반을 살피기보다는, 대충대충 자신의 논지를 입증해 줄 것 같은 몇몇 문장과 단어를 뽑아내어 멋대로 꿰맞추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믿기 힘들겠지만 인문학계 일각에서 지금도 행해지고 있는 엄연한 현실입니다.
인문학에도 유행이란 것이 있습니다. 옷 유행과도 흡사하지요. 일단 페미니즘이 지성계를 휩쓸다시피 유행하게 되면 시류에 편승하여 자신의 이름을 높이려는 연구자들이 나타나게 마련이고, 그들은 밀턴 사상의 문맥 파악이라든가 역사적 접근방식 또는 사상적 일관성 문제보다는, 언론이나 학계에서 튀어보려는 동기가 우세하게 됩니다. 최근 번역된 소칼의 <지적 사기>(민음사)도 이와 비슷한 문제를 꼬집은 것이지요.
유행의 첨단을 걷는다는 평판으로 명성을 얻게 되면 여기 저기 초청하는 곳도 생기고, 현직 교수의 경우라면 연구비 신청할 때도 매우 유리해집니다. 일단 그런 흐름이 형성되면 그 흐름에 편승하는 집단의 규모가 계속해서 커집니다. 일종의 ‘학파’(?)가 생겨나는 셈인데, 그 안에 소속이 되면 비슷한 생각을 가진 연구자들끼리 서로 밀고 끌며 보호를 해주니까 여러 면에서 세속적인 의미의 시너지 효과(?)가 생깁니다.
하지만 부풀어 오른 풍선은 언젠가는 바람이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진실 없는 연구가 오래 갈 턱이 없지요. 혜연 양이 말한 것처럼 일개 대학생이 봐도 문제점이 드러난다는 겁니다. 그래도 공부하고 논문 쓰는 입장에서는 이런 엉터리 연구들이 고마울 때가 있습니다.
결국 논문이란 기존 연구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해석을 내놓는 것입니다. 독창성이야말로 논문의 질을 보증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연구자들에게는 그것이 다소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시류에 휩쓸린 어수룩한 논문들이 있으면 그에 대한 비판과 반박을 해가면서 자신의 논지를 반듯하게 세울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그런 ‘얄팍한’ 연구들도 우리에게는 다 쓸모가 있는 셈입니다.
좋은 논문 주제를 잡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면 석사 논문으로 이 주제를 다루는 것도 의미가 있겠습니다.
내가 쓴 <언론자유의 경전 아레오파기티카>를 잘 읽으시면 (특히 2부) 아마 앞으로 공부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밀턴의 공화주의에 관해서는 동아대 송홍한 교수가 쓴 “실낙원에 나타난 밀턴의 공화주의” (<밀턴연구> 제11집 2호)를 참조하기 바랍니다. 앞에서 말했던, 사탄이 공화주의였는가 여부에 대한 논점이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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