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날 장로의 직분을 갖고 있었고 더욱이 현재 어느 신학교에서 신학을 연구 중인 어떤 분과 신앙 관련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분은 "근래 노자 철학을 공부하던 중 지금까지 가졌던 신앙에 대해 실로 놀라운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또 "최근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저작집을 입수하여 읽고 있는 중인데 선생의 신앙 역시 노자의 생각에 불과하더라"고 하는 말에 접해 나로서는 대경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이 분이 지금까지 장로의 요직에 계셨지만 신앙의 참 맛, 즉 죄의 인간이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해서 아주 죽고, 예수의 구속(救贖)으로 다시 나는 진정한 기독교의 회심과 구원은 경험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것 없이 무슨 기독교를 말하고 연구하는 것인가 하고 의아를 금할 수 없었다. 노자는 철학으로 배울 일이다. 더욱이 중국 철학으로 배울 일이다. 그리고 기독교는 복음 신앙으로서 믿음으로 믿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영국의 어느 시인은 "우리가 만일 공자나 노자를 대한다면 인사하는 것으로 족할 것이나, 예수를 대한다면 그 앞에 엎드려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노자 철학에 의한 기독교의 이해, 그것은 결국 사상적, 철학적 기독교가 될 수밖에 없다. 나는 그것은 노자의 본래 의도와도 거리가 멀고 예수에 대한 충실도 못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3대 종교인 유교, 불교, 기독교의 정수를 끌어다 조선인이 창시했다는 천도교는, 좀 심한 말일지 모르나, 유교, 불교, 기독교에 대한 모독이라고 단정하는 바이다.
불교는 불교대로 믿고, 기독교는 기독교대로 믿을 일이다. 이를 통째로 소화하지 못하고 진수를 체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만족하지 못하고 혼동하고 야합시켜, 천박하고 힘없는 혼합종교(syncretism)를 만들어내게 되는 것이다. 이는 실로 종교에 대한 믿음의 태도가 아니다. 한낱 이를 이용하는 정도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은 사실 인간의 죄성(罪性)의 발로일 뿐이다.
사실 우리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오늘날까지 한낱 정치 운동의 도구밖에 못 되었고, 요즘 성행하는 동양사상에 의한 기독교의 이해란, 기독교를 단지 하나의 인생관, 처세 철학 등으로, 즉 정신적으로 이용하려는 태도에 지나지 않는다. 한마디로 이는 불신인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 유교 등을 자기 것으로 비교적 빨리 소화시킨 이웃 일본의 메이지(明治) 초기의 기독교 수용은, 동양 사상은 물론 모든 민족 종교와 국가 관념 등을 전적으로 부정함으로써 시작되었던 것이다. 우치무라 간조의 소위 "불경사건(不敬事件)" 같은 것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 체험, 기독교 이해는 우선 순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깊이 도덕적이고 양심적이어야 한다. 기독교는 결코 사상, 철학, 인생관은 절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산 예수와의 인격적인 관계, 그리고 이로 인한 죄에서의 해방, 신생, 구원인 것이다. 우리는 전날 최태용(崔泰瑢) 씨가 복음교회를 창설하고 그 감독이 되어, 니체, 도스토예프스키 등을 동원시켰던 사상적, 신학적 기독교가 실패했던 것을 상기할 것이다.
근래에는 무교회 신앙의 초월, 지양(止揚) 운운하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이는 안 될 말이다. 도대체 우리에게 그 사이 몇 푼 어치의 체험과 소화가 있었다고 이를 벌써 뛰어넘겠다는 것인가? 물론 기독교가 인생관이나 정치 사상이나 처세훈 정도라면 편리할 대로 헌신짝처럼 버리든지 또는 매일 갈아대도 상관없을 것이다.
그러나 종교 신앙은 내적으로, 정신적으로, 아니 도덕적으로 영혼의 깊은 밑바닥에서 체험, 소화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의미에서 한 종교의 민족적인 이해가 있기 위해서는, 귀의와 경전 소화, 신앙 체험 등, 적어도 수백 년이 걸려야 이루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비로소 개인은 물론 민족의 진정한 살이 되고 피가 되어, 민족의 정신과 도덕과 양심, 그리고 성격과 생활 자체까지 근원적으로 다시 살려내는 것이다. 그리고 변화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기독교를 소화함에 있어서, 결코 이를 과거의 불교나 유교에 대해 했듯이, 약삭빠르게, 천박하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소위 동양학이나 동양 종교와의 철학적, 사상적 비교 정도로는, 즉 인간의 선성(善性)에 근거한 도덕적 수양이나, 인간의 이성(理性)이나 의지(意志)를 존중하는 오도(吾道)나 고행(苦行)을 인생 문제 해결의 근저로 생각하는 정도로써는, 인생 문제 해결에 있어서 인간의 신에 대한 반역으로 말미암은 죄성(罪性)을 그것도 원죄적인 의미의 죄성을 인생관의 본질로 삼는 기독교는 절대 소화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점 우리는 구원 문제에 관한 한, 그것이 철저히 이것이냐 저것이냐(Entweder-Oder)의 양자택일의 문제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서연구> 제41호 (1953년 11·12월)
앙리 루소 <숲속의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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