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번역 출간된 책입니다. 저도 며칠 전 다 읽었습니다.
후반으로 갈수록 힘이
떨어지고, 독창적인 주장보다는 남의 학설이나 이론 등을 따다가 이어 붙인 느낌을 준다는 것이 이 책의 결정적인 약점이로군요.
하지만
저자가 주장하는 신수도사적 개인(New Monastic Individual; NMI)이라는 대안은 구미가 당깁니다. (그것이 우리가 지금 당장
실천할 수 있는 대안이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특히 비주류가 되기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저자의 주장에는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 대부분의 텔레비전 방송 프로그램은 시청자들을 바보라고 간주하고 방송을 제작한다.
*
대학들의 위상은 마치 중세 말 교회와 다를 바 없다. 오늘날 대학들은 학생들에게 천국(고수익의 직장)에 갈 수 있는 면죄부(학위)를 판매한다.
이것이 수천을 헤아리는 고등교육기관들이 기본으로 삼는 원칙이 되어버렸다.
* 지식의 습득이 사람의 정신이나 인성을 훈련시키는데
필수불가결의 요소라고 하던 기존의 원칙은 점점 사라지고 있고 이런 경향은 더욱 심해질 것이다. 지식은 현재 상품처럼 판매되기 위해 생산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또한 새로운 생산에 이용되고 부가가치를 창조하고 소비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대학의
학장 총장들은 너나없이 기업체 CEO를 모방하기에 급급하고, 기업에서 사용하는 경영 용어라든지 애매모호한 화법을 구사하기에 이르렀다. 진지한
사상과 의식을 지닌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이 책으로 출간되는 것만도 행운이라고 할 정도가 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 하룻밤 사이에 인생을
바꾼다는 식으로 비전을 제시하는 책 이외에는 읽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 스벤 베커츠는 하이퍼텍스트의 등장과 인터넷이 인쇄물이
제공해주던 ‘수직적 경험’을 파괴시킨 주범이라고 지적했다. 책을 마주 대하고 앉아 있는 경험이야말로 독자를 사색의 세계로 안내하고 자아를
발견하도록 도와준다고 말했다. 만약 소설을 읽는다면 독자는 자신의 정서나 감정 상태를 주인공과 대조하게 되고, 이렇게 함으로써 자아에 대한 더
깊은 의식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반면 하이퍼텍스트가 제공하는 것은 ‘수평적 경험’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연관된 (또는 연관 없는)
생각이나 정보를 스쳐 지나치는 경험을 가리킨다. 이처럼 컴퓨터 매체는 삶의 깊이나 자아 성찰에 오히려 역효과를 주며, 네트워크를 통해 얻어내는
효과라는 것도 실은 분산되어 있는 자아로서, 별 의미 없는 인포테인먼트에 의해 만들어질 뿐이다.
* 최근에는 조악하고 저속한
것들이야말로 사회에 잘 적응하고 문화적으로도 환영받는 실정 ………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다는 것이, 그것이 비록 우스꽝스럽거나 부끄러운
모습이더라도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자랑거리가 되었다.
* 한나 아렌트는 대중문화란 문화가 아니며 오락이고, 사회가 이런
과정을 통해 문화적 발전을 이룬다는 발상은 치명적인 실수라고 지적했다.
* 책을 읽는 사람이란 결코 신문의 스포츠 란을 골라가며
읽거나 처세 관련 베스트셀러를 듬성듬성 읽거나 컨설턴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만을 읽으려는 사람들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가 말하는 책을 읽는
사람들이란 두어 시간만이라도 전화나 텔레비전을 뒷전에 둔 채 까다로운 책 한 권을 읽기 위해 독서삼매경에 빠지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 또한
책을 읽는 사람이란, 우리 인간 됨됨이의 가장 좋으면서도 가장 깊은 면은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에 있을 뿐만 아니라, 책들을 섭렵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정직하게 믿고 있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다.
* 현 미국 문화는 본질적으로 개인주의 문화가 아니라
집단주의 문화가 되어버린 것이 현실이다. 정치학자 케네스 미노그는 개인주의를 비난하는 현실에 대해, 현대의 혁신적인 활력을 말살시키는 작업이라고
비판한다.
* 특정 활동이 개인적으로 나타날수록, 그리고 공공에 드러나지 않을수록 장기적으로는 보다 큰 효과가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해서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서로 유대관계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만 이들 관계가 비공식적인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케네스 미노그가 지적한 것처럼, 공동체로 엮어진 문명보다 오히려 개인들이 더욱 강력한 실천적 협조 관계를 유지할 능력을
지녔다.
* 수도사적 해법 속에 포함시킬 수 있는 것으로는, 전통적인 기술, 남에 대한 배려, 성실성, 학문의 정통성 보존,
비판적인 사고, 계몽주의 지적 전통 등이 있다. 그 밖에도 환경 악화와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투쟁, 개인적 성취 및 독립적 사고에 대한 가치
부여 등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이 모든 본보기들의 공통적이고 핵심적인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싸구려 속물주의, 소비주의 문화,
이익 추구, 권력 투쟁, 명성에 대한 동경, 자신을 드러내기 등을 과감히 배척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 무엇보다도 가장 큰
위험은 위대한 사람들만이 수도사적 해법을 실천하는 신수도사적 개인(New Monastic Individual; NMI)이 될 수 있다는 잘못된
인상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 이와 정반대로, 평범한 사람들 누구나 수도사적 삶을 살아갈 수 있고 지금 당장 실천에 옮길 수도 있다. 사회적으로
주류에서 벗어날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주류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람직할 수도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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