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촌, 일제의 쌀 수탈 현장
윤춘호 지음, <봉인된 역사: 대장촌의 일본인 지주와 조선농민>(푸른길, 2017)
전북에 연고가 있거나 일제의 쌀 수탈에 역사적 관심을 갖는 독자라면 대단히 친근하게 느껴질 역사연구서다. 전북 익산군 춘포면 춘포리(대장촌) 지역이 연구 대상이다. 전북 전주(시) 북쪽에는 삼례(읍)이 있고, 삼례 동쪽엔 춘포(면)이 붙어 있다. 춘포 동쪽이 익산시다. 여수에서 출발한 전라선 열차는 전주를 거쳐 삼례, 춘포를 지나 익산역에 이른다. 물론 춘포역은 지금은 기차가 서지 않는다.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3년 일본 총리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 1938~ )가 방한한 적이 있다. 호소카와 총리의 조부가 대장촌의 지주였다. 일본 구마모토 출신의 호소카와 모리시게(細川護成) 후작은 1904년 3월 퇴역 육군소령 세토에게 명을 내린다. 조선 현지 사정을 면밀히 파악할 것, 특히 전북일대에서 대규모로 투자할만한 가치가 있는 농지를 파악해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세토의 보고를 받은 호소카와 후작은 대장촌 토지에 투자하기로 결정한다. 이렇게 해서 대장촌과 호소카와 가문의 41년(1904~1945)에 걸친 인연은 시작된다. (을사늑약 1년 전, 이미 침탈은 시작되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조선의 토지 가격은 일본 땅에 비하면 거의 공짜 수준이었다. 당시 조선 토지 가격은 일본 간사이(關西) 지역 토지에 비해 평균 10분의 1 수준이었다. 위치에 따라 30분의 1에 불과한 땅도 있었다. 그 결과 광풍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조선 농지 사재기 바람이 20세기 초 조선의 전북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유일한 불안 요소가 있다면 러시아와의 전쟁이었다. 세토가 조선에 파견되기 한 달 전인 1904년 2월 8일 일본은 중국 뤼순항에서 러시아 함대를 기습 공격하는 것으로 러시아와의 전쟁에 돌입했다. 러일전쟁 초기에는 어느 쪽이 이길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대부분의 서양 군사전문가들과 언론은 러시아가 일본에 압승을 거둘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1904년 5월 압록강에서 벌어진 육상 전투에서 러시아 군이 패배해 만주로 밀려나면서 한반도는 완전히 일본군 수중에 떨어졌다.
호소카와 가문의 조선 투자는 위험을 감수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 땅이 위험을 감수할만한 가치가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마치 투기를 하듯 호소카와 가문이 고른 땅이 대장촌이었다. 대장촌 사람들에게 일제 침략자는 총칼을 앞세운 군인의 모습이 아니라 돈으로 무장한 지주의 모습이었다. 호소카와 가문은 1919년이 되면 조선 땅에서 420만평의 대농장을 갖게 된다. 익산군 일대, 특히 춘포는 ‘일제의 식민지’라는 추상적 표현이 아니라 ‘호소카와 가문의 영지’라는 구체적 표현이 더 어울리는 마을이 되었다.
호소카와 외에도 이와무라 이치지로(今村一次郞), 다사카 사사부로(田坂佐三郞) 등 일본인 지주들이 대장촌 일대의 땅을 경쟁적으로 사들였다. 일본인 지주들은 태평양전쟁 패배로 대장촌에서 밀려날 때까지 이 동네의 완벽한 지배자로 군림했다. 그들은 대장촌의 천황 같은 존재였다. 대장촌 일대 농지의 80%가 일본인 지주들의 소유였고, 대장촌 농민들 중 이들의 소작인 아닌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일본인 지주들은 1912년 전북철도주식회사를 세웠고, 이 회사는 전주와 이리를 오가는 전북경편철도라는 이름의 철도를 완공했다(이게 나중에 연장돼 ‘전라선’이 된다). 대장촌에 기차역이 들어선 이유는 단 하나였다. 일본인 농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쌀을 기차로 실어 나르기 위한 것이었다.
이 철도 노선의 5개역 가운데 한 곳이 대장역이다. 이 철도는 총독부가 만든 국철이 아니라 일본 지주들이 만든 조선 최초의 사철(私鐵)이었다. 대장촌에 자리 잡은 일본인 지주들은 이 동네를 일본인 마을, 일본인 이민자들의 모범마을로 만들려고 했는데, 이 노력의 핵심이 기차역을 유치하는 것이었다. 대장역의 개통은 호소카와 농장을 비롯한 대장촌 일본인 지주들의 노력이 성과를 본 것이었다.
대장촌은 일본인들이 전북 서부 평야 지역을 장악하기 위한 핵심 근거지였다. 대장촌을 비롯한 전북 서부 평야지대에서 수확한 쌀은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실려 갔는데, 일 년에 수확되는 수만 가마의 쌀을 실어 나르기 위해서는 자동차만으로는 충분치 않아 철도를 건설한 것이다.
1914년 문을 연 이래 줄곧 ‘대장역’으로 불리던 이 역은 1996년 갑자기 ‘춘포(春浦)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대장이라는 지명이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일제 잔재라는 것이 역명 교체의 근거였다. 익산시는 일제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조례를 개정해 1996년 1월 1일부로 ‘춘포면 대장촌리’를 ‘춘포면 춘포리’로 개칭했고, 이에 따라 대장역도 춘포역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대장촌이라는 지명은 일제의 침략 이전부터 있던 이름이다. 원래 대장촌(大長村)이던 것을 일본인 지주들이 여기에 자리를 잡으면서 대장촌(大場村, 큰 농장이 있는 동네)으로 바꾸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 동네 이름을 일본인이 지었다는 것으로 잘못 전해지면서 대장촌이라는 지명은 일제 잔재의 하나로 굳어졌다. 오해와 편견이 진실로 굳어버린 한 사례다. 지금은 더 이상 기차가 다니지 않는 역이 되었지만, 이 역은 전국에 있는 600여 개의 철도 역사 가운데 가장 오래된 역사로 인정받아 2005년 11월 등록문화재 210호로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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