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나이하라와 일본의 양심세력
야나이하라 다다오 지음, 홍순명 옮김, <개혁자들>(포이에마, 2019)
도쿄제국대학 경제학부 교수 야나이하라 다다오(矢内原忠雄, 1893-1961)는 <중앙공론(中央公論)> 1937년 9월호에 ‘국가의 이상’이란 글을 기고했다. 그는 이 글에서 국가의 이상은 대내적으로는 정의, 대외적으로는 평화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구약성서>의 예언자 이사야를 들어 일본의 대륙정책을 비판했다. 또한 국내의 언론·사상 탄압에 항의하고, 일본의 도발로 중일전쟁의 발단이 된 노구교사건(蘆溝橋事件, 1937년 7월 7일)을 불의의 싸움으로 단정하여 일본의 반성을 촉구했다.
이 글이 문제가 되어 <중앙공론> 9월호는 판매 금지되고, 야나이하라는 교수직을 박탈당했다. 이른바 ‘야나이하라 사건’이다. 대학에서 추방된 야나이하라는 개인월간지 <가신(嘉信)을 발간하면서, 대학생들 상대로 고전독서회 ‘토요학교’를 열어 단테, 밀턴 등을 읽었다. 그러나 <가신>마저도, 이를 폐간하는 것은 군국주의 일본의 패망을 예언하는 것이라고 야나이하라가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1944년 폐간되고 만다. 전세가 기울어 미군 폭격기가 도쿄를 폭격할 때도, 모든 시민이 방공호로 대피할 때, 그는 밖에 나가서 예언을 무시한 나라의 운명을 침통하게 지켜봤다고 한다.
패전과 함께 그는 도쿄대학 교수로 복직해 도쿄대 총장(1951-57)을 역임했다. 그는 중앙공론사가 1966년 창립 80주년을 기념해 선정한 ‘근대 일본의 대지식인 10인’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필자는 1980년대 초에 ‘토요학교’의 한국인 제자 노평구(1912-2003)로부터 야나이하라의 마지막 모습을 전해들은 적이 있다. 말기 위암으로 투병 중인 야나이하라를 문병했을 때, 그는 노평구의 손을 맞잡고 “군국주의보다 암이 더 무섭다”며 힘들어했다는 것이다. 평생을 군국주의에 맞서 싸운 지식인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도쿄대 총장 재직 시 학내 소요사태로 일본 국회에 소환된 그는, 급진 이념도 대학에서 마땅히 연구되어야 한다며 대학과 학문의 자유를 단호히 옹호했다. 실험실에서 페스트 같은 인체에 유해한 병원균을 연구하듯이, 체제를 위협하는 사상일지라도 대학에서는 연구할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야나이하라는 한국에 대해서도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간사이 지방의 명문인 고베중학교를 수석 졸업한 그는 당시 일본 최고의 명문으로 꼽히던 도쿄 제일고등학교에 교장 추천으로 무시험 입학한다. 그의 한국에 대한 관심은 제일고등학교 재학 중 프레더릭 매켄지(Frederick Arthur McKenzie)의 <대한제국의 비극(The Tragedy of Korea)>을 접하고부터였다. 그는 고등학교를 수석 졸업한 후 도쿄제대 법과대학 정치학과에 입학한다.
도쿄제대 재학 시 니토베 이나조(新渡部稻造)의 식민정책 강의를 듣고 1916년 대학 3학년 때는 니토베를 찾아가 한국에 가서 민간인으로서 한국인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기도 했다. 특히 도쿄조선기독교청년회 초대 총무 김정식의 강연을 듣고 감동하여 “조선인을 위해 이 몸을 바치리라.”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정치학 교수 오노츠카 기헤이지(小野塚喜平次)의 연구실에 가서 “조선에 가서 일본인과 조선인의 고랑을 메우고 싶다.”며 취직 알선을 의뢰한 바도 있다.
대학 졸업 후 조선은행 취업을 결심했으나, 가세가 기울어진 상황에서 가족을 부양해야 할 책임 때문에 고향과 가까운 스미토모(住友) 광업소에 취업한다. 27살 되던 1920년 니토베 이나조의 후임으로 도쿄제대 경제학부 조교수에 취임한 그는 식민정책을 맡아 강의하는데, 식민지의 자주와 자유를 인정하는 것이 식민지 문제 해결의 열쇠임을 역설한다.
제일고등학교 학생시절부터 한국을 깊이 사랑했던 그는, 월간지 <가신>과 학술논문들을 통해 한국에 대한 무단통치와 경제착취를 비판했으며, 장래 자주국가 건설을 목표로 한국민족 중심의 경제정책을 펼 것, 한국민족의 자주적 지위를 용인하고 조선의회를 개설할 것 등을 주장했다.
그는 일본의 언어정책, 기독교탄압, 동화정책을 여러 차례에 걸쳐 비판했다. “조선인 학동이 조선인 교사에 의해 일본어로 일본 역사를 배우는 소학교 교육을 참관하고 심중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일제 탄압에 신음하던 많은 한국인이 그의 격려와 의로운 투쟁에 힘을 얻었다. 한국인 독자에게 쓴 편지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내 마음은 일시(一時) 일각(一刻)이라도 조선 반도를 떠나본 적이 없다. 그곳에 있는 젊은이들아, 낙심치 말고 씩씩하라. 뜨거운 기도를 보낸다.” 야나이하라는 젊은 제자들이 한국 여행을 떠날 때, 한국에 가면 무엇보다도 일본제국주의의 착취 실상을 보고 와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민족지도자 고당 조만식은 1945년 민족 해방을 맞이하자 “지금 일본의 진정한 애국자인 야나이하라 교수의 심중을 생각하고 한없는 슬픔을 느낀다.”고 말했다.
1961년 그가 서거하자 각계각층의 애도가 이어졌다. 탐욕에 물든 권력자와 그를 추종하는 사이비 학자 등 진리를 거스르는 세력에 대한 의연한 저항, 섬나라 국민에게 보기 드문 활달하고 진실하고 겸손한 인격, 기독교사상의 확장으로 학문과 신앙을 통합시킨 대형 지식인의 면모는 큰 울림을 남겼다.
1965년 이와나미서점(岩波書店)에서 그의 방대한 저작 전집 29권이 발간되었다. 그러나 그의 저작 중 시중에서 구해볼 수 있는 번역서는 <개혁자들>이 유일하다. 식민정책 관련 학술 논저는 한 권도 소개되지 않고 있다. 우리의 빈약한 지식 인프라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야나이하라의 저서 중 유일하게 번역된 이 책은 링컨, 크롬웰 등 그가 존경했던 인물들의 삶과 사상을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야나이하라의 뜨거운 삶이 더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쥔장 서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37.대장촌, 일제의 쌀 수탈 현장, <봉인된 역사: 대장촌의 일본인 지주와 조선농민> (0) | 2019.08.29 |
---|---|
36.그들은 이렇게 제국 신민이 되었다, <제국대학의 조센징> (0) | 2019.08.29 |
34.혁명가 밀턴 <밀턴평전> (0) | 2019.08.29 |
33.종교는 없지만 청렴한 나라, <신 없는 사회>(마음산책, 2012) (0) | 2019.08.29 |
32.대학이란 무엇인가, <대학의 몰락> (0) | 2019.08.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