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의 역사
캐서린 애셴버그 지음, 박수철 옮김, <목욕, 역사의 속살을 품다>(예지, 2010)
그리스 과학자 아르키메데스(기원전 287-212)는 부력의 원리를 발견한 뒤 ‘유레카!’라고 외치며 욕조에서 뛰쳐나왔다. 그리스인들이 목욕을 즐겼음을 보여주는 일화다. 로마인은 그리스 식 목욕법을 받아들였고, 기원전 2세기경에는 목욕이 일상에 뿌리내렸다. 목욕이 로마인의 일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지면서 청결이 미덕으로 자리 잡았다.
별난 풍습도 있었다. 유명한 운동선수나 검투사가 손수 긁어낸 땀, 먼지, 기름 따위를 작은 유리병에 넣어 팬들에게 판매했는데, 일부 로마 여인들은 그것을 얼굴 크림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서양의 목욕 습관은 중세 기독교세계로 넘어가면서 급격한 변화를 겪는다. 목욕에 대한 반감이 커진 것이다. 8세기 바그다드를 주요 무대로 한 ‘아라비안나이트’에서 아랍정원사가 한 말은 이슬람교도의 중세 기독교인에 대한 시각을 보여준다. “그들은 씻을 줄 모른다. 기독교인이 태어나면 검은 옷을 입은 추한 남자들이 아기의 머리에 물을 쏟아 붓는데, 이상한 몸짓이 따르는 이 세정식을 거치면 평생 씻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세례식 이후 목욕을 하지 않는 기독교도들의 풍습을 비웃은 것이다.
기독교도들의 목욕에 대한 반감은 3세기부터 본격화되었는데, 이는 로마식 목욕이 쾌락주의와 연관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초기 기독교는 영혼을 떠받들고 육체를 경시하고 불신하는 경향이 강했다. 성 히에로니무스는 “목욕은 젊은 여자의 외모에 대한 관심을 유발할 수 있기에 요주의 대상이며, 올바른 생각을 가진 처녀는 의도적인 불결을 통해 자신의 타고난 미모를 서둘러 망친다.”고 설파했다. 기독교인은 타인이 자신 때문에 느끼는 욕정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말이다. 성 히에로니무스의 친구인 수녀원장 파울라는 “깨끗한 몸과 깨끗한 옷은 깨끗하지 않은 영혼을 뜻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기독교 사회와는 달리 이슬람 사회에서는 청결이 중요한 종교적 요건이었다. 중세 초기 유럽에서 가장 깨끗한 곳은 이슬람세력의 지배를 받았던 에스파냐였다. 에스파냐의 기독교인들은 목욕 문화를 이슬람교도의 이단적인 신앙과 연관시키면서, 자신들의 불결한 생활방식을 진정한 믿음과 연결 지었다. 에스파냐에서 이슬람교도들을 추방한 국토회복운동 기간 중 기독교인들이 가장 먼저 취한 행동은 이슬람식 목욕탕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기독교 사회의 목욕에 대한 태도는 그 후 바뀌기 시작한다. 13세기의 고대 프랑스어로 쓰인 ‘장미 이야기’는 젊은 남자에게 청결을 강조한다. “그대의 몸에 한 점의 때도 없게 하라. 손을 씻고 이를 깨끗이 닦고, 손발톱에 단 하나의 검은 점도 그냥 두지 말라.” 젊은 여자에게도 마찬가지다. “여자는 자기 몸에서 더러운 것이 하나도 눈에 띄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장미 이야기’는 이미 11세기부터 시작된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서유럽에서 공중목욕탕 시설은 5세기경부터 기능이 마비되거나 수가 현저히 줄었지만, 11세기 이후 십자군 덕분에 다시 등장했다. 십자군은 동방원정에는 실패했지만 이슬람식 목욕탕이란 흥미로운 관습을 유럽에 들여왔다. 유럽에 다시 등장한 목욕탕은 급속도로 퍼졌다. 14세기 런던에는 최소한 18개의 목욕탕이 있었고, 1292년 인구 7만 명인 파리에는 26개의 목욕탕이 있었다.
그러나 14세기부터 번지기 시작한 흑사병은 목욕 문화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다. 흑사병은 14세기 중반에 불과 4년 동안 유럽인 3명 중 적어도 1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문제는 당시의 의학 수준이었다. 당시의 의학 지식에 의하면, 흑사병은 감염되기 쉬운 사람들이 해로운 공기를 마시기 때문에 발병하는 것이었다. 파리대학 의학교수들은 뜨거운 목욕이 사람의 몸을 축축하게 하고 긴장을 풀어주는 위험한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일단 열과 물이 피부의 구멍을 열면 역병이 온몸에 침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후 200여 년 동안 역병이 창궐할 때마다 이런 외침이 터져 나왔다. “죽기 싫으면 부디 목욕탕과 목욕을 피하시오.”
1568년 한 왕실 의사는 이렇게 썼다. “목욕탕을 이용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신체의 전체적인 기질과 모공이 열리면서 결과적으로 유해한 증기가 급속도로 신체에 침투해 갑작스런 죽음을 유발한다.” 안타깝게도 당대 최고 수준의 의학적 조언은 더 많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현대 의학은 지저분한 사람일수록 질병에 걸릴 가능성이 높다고 말해준다.
11세기부터 약 500년간 물은 사람들에게 편안함과 청결을 제공했다. 그러나 이제 유럽 대륙 대부분에서 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해야 하는 적이 되었다. 그 후 2세기 동안은 유럽역사상 가장 불결한 시기의 하나로 꼽히게 되었다.
루이 14세(1643-1715 재위) 시절, 궁정 안의 모든 사람들은 태양왕 특유의 구취를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정부 몽테스팡 부인은 루이 14세의 입내를 자주 불평했고, 자구책으로 자기 몸에 향수를 엄청 뿌려댔다. 그러자 왕은 그녀의 향수 냄새에 진저리를 쳤다.
가난한 사람들은 몸을 샅샅이 씻을 만한 도구가 부족해서 못 씻었지만, 귀족들은 오히려 의사들로부터 몸을 구석구석 씻지 말라는 권고를 받았다. 당대 최고 수준 의사들은 인체의 분비물이 보호막을 형성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왕과 왕비는 가난한 농민과 마찬가지로 자주 목욕을 하지 않았다.
루이 14세가 열심히 뛰고 펜싱을 하고 춤을 추고 군사훈련에 참가한 뒤 침실에 돌아왔을 때는 땀에 흠뻑 젖은 채였을 것이다. 그러나 왕은 그렇게 땀을 흘렸어도 씻지 않았다. 대신 옷을 갈아입었다. 루이 14세가 스스로 “깨끗하다”고 말한 근거는 새 옷, 특히 세탁한 옷을 입었다는 것이다. 루이 14세와 그의 동생은 하루 세 차례나 옷을 갈아입었기 때문에 유난히 까다롭다는 평을 들었다. 17세기에는 깨끗한 아마포(린넨) 옷을 입는 것이 물로 몸을 씻는 것을 대신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그보다 더 낫고, 안전하고, 한결 믿을만하고, 과학적 근거에 입각한 행동으로 간주되었다.
현대인은 예전 사람들은 자주 씻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불결함에 몸서리친다. 그러나 성 베르나르두스가 말했듯이 모두가 악취를 풍기면 냄새가 나지 않는 법이다. 사람들의 몸에서 나는 냄새는 우리 조상들이 헤엄쳐 다니던 바다였다. 땀 냄새는 그들이 살았던 세계의 일부분이었다.
20년 전만 해도 비행기, 극장, 식당, 버스 같은 실내공간은 담배연기로 자욱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잘 느끼지 못했다. 우리의 코는 적응력이 있고, 환경이 가르치는 대로 작동한다. 현대의 시각으로 과거를 멋대로 판단하기 어려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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