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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번역

조선말 수업에 반발한 제일고보 수재들

by 안티고네 2018. 1. 24.

조선말 수업에 반발한 제일고보 수재들

도쿄고등사범학교東京高等師範學校 지리박물과를 졸업한 김교신(1901-45)은 1928년부터 양정중학 교사로 근무한다. 그는 1940년 3월 사직했다가 1940년 9월경 다시 교직에 복귀한다....

 

재취임한 학교는 서울의 제1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였다. 이 학교 교장 이와무라 도시오岩村俊雄가 길을 열어 주었다. 이와무라는 도쿄고등사범학교 지리박물과 출신으로서 김교신의 직계 동문 선배였다. 모처럼 재취임했지만 김교신은 불과 반년 만에 학교를 사임한다. 가장 큰 이유는 김교신이 일제의 동화 정책을 완강하게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는 조선 민족의 자존심을 끝까지 지키려 했다.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었는지는 김교신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당시는 공식적인 장소에서 조선말을 사용하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었다. 당연히 수업도 일본말로 해야만 했다. 그러나 김교신은 끝끝내 조선말로 수업을 진행했다. 당연히 교내에서도 문제가 되어 이와무라 교장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조선인 학생들 중에도 조선말 수업에 반발하는 자가 있었다. 누구보다도 조선인으로서의 자존심이 강했던 김교신은 분명한 태도로 동화 정책에 동조하는 학생들과 대치했다. 진정한 조선 사람으로서의 긍지를 지키기 위해서는 제1고보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와무라에게 더 이상 누를 끼칠 수도 없었다. 

제1고보 재직 당시 김교신에게 대들었던 조선인 학생들이 누구였을까 상상해 본다. 조선 최고의 수재들이 입학하는 제1고보 학생이니, 광복 후 이 나라의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엘리트로 성장했을 것이다. 아마 미국 유학을 다녀와서 영어도 곧잘 했을 것이다. ‘오렌지’가 아니라 ‘어린쥐’로 발음하는 게 정확한 영어 발음이라고 강조했을지도 모른다. 한국어의 열등함을 절감하면서 영어를 공용어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을지도 모르겠다.


광복 70년을 돌이켜보면 우리나라는 한국어를 부끄럽게 여기는 ‘수재들’이 주도해 왔다. 지금도 그들이 이 나라의 상층부에서 엘리트 기득권자로 행세하고 있다. 김교신이 그리던 조국 광복의 모습은 아니다. .....

박상익 <번역청을 설립하라>(유유)에서 발췌. #번역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