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역가를 꿈꾸는 젊은 인문학도들에게
아무리 풍토가 척박하고 조건이 나쁠지라도 절망은 금물이다. 덴마크의 철학자가 말했듯이, 그것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기 때문이다. ‘일을 하려 해도 여건이 허락지 않아서’라고 말하는 것은 핑계이다. 또 ‘때가 오면’이라고 말하는 것도 자기 임무를 도피하는 수작일 뿐이다. 이 책을 마무리 하면서 번역을 통한 텍스트 생산에 뜻을 품은 이 땅의 젊은 인문학도들에게 부디 용기를 잃지 말고 힘을 내라는 뜻에서 다음과 같은 격려의 말을 드리고 싶다.
1. 번역은 한국어 사용권에 존재하지 않는 텍스트를 존재하게 만드는 가치 있는 행위이다. 그것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일이다. 좋은 책 한 권을 번역한다는 것은, 한국사회라고 하는 거대한 동굴에 등불 하나를 밝히는 일과도 같다. 좋은 번역서 한 권이 국회의원 한 명의 4년 임기 의정 활동보다 더욱 큰 가치를 가질 수 있다는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이 일에 임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2. 번역가는 먼저 독립적 사고능력을 지닌 지식인이 되어야 한다. ‘이 땅에서’ 공부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학연, 지연, 정실에 의지하여 인생을 도모하려는 정신 자세로는 번역 작업을 수행해 나갈 수 없다. 오직 글쓰기 능력과 출판된 결과물에 의해서만 엄정한 평가를 받겠다는 자세로 철저한 직업 정신을 견지해야 한다. 관심 분야에 대한 꾸준한 독서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무식유죄無識有罪, 유식무죄有識無罪를 잊지 말자.
3. 번역가는 편집자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도움을 적극적으로 요청할 줄 알아야 한다. 독립적 사고를 하라는 것은 편집자의 적절한 도움마저 뿌리치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약점 없는 인간 없듯이 결점 없는 번역도 없다. (너 자신을 알라!) 편집자는 번역가의 한계를 극복하게 해 주는 최선의 동지이며, 번역 결과물의 수준을 끌어올려 주는 고마운 동료이다. 번역가의 평가는 오직 ‘결과물’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명심하자.
4. 쓰고 또 쓰고, 고쳐 쓰고 또 고쳐 쓰는, 이마에 땀 흘리는 수고를 마다하면 안 된다. 번역에는 왕도가 없다. 궁극적으로 정성이며 성의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다. 좋은 번역어를 찾기 위해 사전 찾기를 게을리 하지 말 일이다. 일단 번역한 문장은 읽고 또 읽으면서 문장의 흐름이 제대로 이어지는지, 접속사는 적절히 사용되었는지 부단히 검토하라. 문장의 리듬을 살리기 위해 소리를 내어 읽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5. 번역가는 기본적으로 독서인이어야 한다. 자신만의 개인 도서관을 만들어 관심 분야에 대한 책을 꾸준히 사 모으고 책읽기를 삶의 가장 소중한 부분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한다. 인문학이란 가장 근원적으로 보자면 결국 글 읽기와 글쓰기이다. 읽기(input) 없이는 쓰기(output)가 나올 수 없다. 공자는 호지자불여락지자好之者不如樂之者라고 했다.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같지 못하다”는 말이다. 좋아하는 것으로는 2퍼센트 부족하다. 책 읽기를 즐겨라.
6. 낭중지추囊中之錐란 말이 있다. 능력과 재능 있는 자는 언젠가는 인정받을 날이 오고야 만다. 번역가가 그 하는 일의 중요성에 비해 터무니없이 낮은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엄연한 현실이다. 아니, 번역 그 자체가 천덕꾸러기 대접을 받고 있다. 그러나 비관할 일만도 아니다. 한국 사회가 멸망하기로 작정을 하지 않은 이상 번역과 번역가에 대한 대우가 현 수준에서 머물 수는 없다. 한국은 망하지 않는다. 끝까지 정도正道를 걸어라. 합당한 대우를 받는 날이 올 것이다.
7. 인문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이라면 논문 작성 과정에서 자신이 연구하는 텍스트를 읽지만 말고 번역 역주 작업을 동시에 진행해 주기 바란다. 논문 쓰기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일이지만, 그렇게 해야만 논문의 차원을 뛰어넘어 본격적인 학술 단행본 출판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와 더불어 필경 논문의 수준도 더불어 올라갈 것이다. 이렇게 청년 인문학도들의 개인적인 노력이 집적될 경우 그들이 중견 학자로 성장한 후에는 우리 대학원의 학풍에도 조금씩 변화가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티끌 모아 태산이다!
박상익, <번역은 반역인가>(푸른역사, 2006)
'인문학·번역'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민청원/ 번역청을 설립하라 (0) | 2018.01.11 |
---|---|
[국민청원] 번역청을 설립하라 (0) | 2018.01.08 |
독서의 명언(표정훈 출판평론가 선정) (0) | 2017.06.09 |
열정 (0) | 2017.05.28 |
알파고와 번역청 (0) | 2017.05.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