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제국대학에서 ‘경성’제국대학으로
이충우·최종고 지음, <다시 보는 경성제국대학>(푸른사상, 2013)
경성제국대학(Keijo Imperial University)은 일제강점기인 1924년부터 해방을 맞은 1945년까지 존속했다. 일본인이 세우긴 했으나 한국 현대 학문의 초석을 놓은 교육기관이기도 했다. 법학의 유진오, 철학의 박종홍, 국문학의 이희승 등이 이 대학을 나와 해방 후 한국 학계에 기여했다.
경성제국대학은 일본인의 손으로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설립 배경을 보면 그들이 원해서라기보다는 3·1운동이란 우리 민족의 항쟁 때문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3·1운동은 우리 민족의 각성과 단결을 일깨웠고, 이 때 나타난 민족의식은 정치적 독립뿐만 아니라 문화, 교육 등 각 방면에서 나타났다. 민립대학운동도 그 일환이었다.
“우리가 나라를 도로 찾으려면 힘이 필요하고 이 힘은 배워서 길러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대학 하나 없다.” 이것이 3·1 만세운동 이후 뜻있는 선각자들이 품은 생각이다. 그들은 경향 각지를 다니며 대학 설립기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전국적으로 뜨거운 호응이 일었다. 정치성을 띠지 않았기 때문에 일제의 탄압도 심하지 않았다. 마침 3·1 운동 뒤 새로 부임한 사이토(齊藤 實) 총독은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식민지 정책을 바꾸고 있던 때였다.
그러나 총독부는 내심 당황했다. 조선 사람 손으로 대학을 만들어 조선 청년들을 교육하게 되면 독립운동의 중심이 될 것이 뻔한데 이를 두고 볼 수 없었다. 일제는 민립대학운동을 억압하는 동시에, 식민지에 나와 있는 일본 관리들의 자녀를 교육시키면서 조선인 청년들에게도 교육 기회를 제공한다는 명분을 쌓기 위해 경성제국대학을 설치한다. 일본인 학생을 대다수로 삼고, 조선인 학생은 약간 명을 뽑아 식민지 통치에 써먹자는 심산이었다.
실제로 경성제국대학 학생 수는 일본인이 3분의 2내지 4분의 3이었다. 의학부, 이공학부는 조선인이 3분의 1정도였지만, 법문학부는 4분의 1에 불과했다. 법문학부를 제한한 것은 조선인이 정치, 법률에 눈뜨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다. 조선인 학생들에게는 커트라인을 달리 적용해서, 상당히 높은 점수를 얻지 않으면 입학이 불가능했다. 당연히 조선 학생들의 실력은 발군(拔群)이었다. 일본 학생과 교수들은 지배민족과 피지배민족의 관계를 의식하면서도 조선 학생의 학문이 낫다 싶으면 꼼짝을 못했다. 특히 일본인과 조선인이 함께 경쟁한 예과 입학시험(1924)에서 수석 합격하고, 그 후 법문학부를 수석 졸업한 유진오에 대해서는 신주 모시듯 했다. 유진오는 1948년 제헌 국회에 참여하여 대한민국 헌법을 입안했고, 고려대 총장을 지냈다.
경성제국대학의 설립준비는 개교 2년 전(1922)부터 진행되었다. 총독부는 1923년 11월 제국대학 창립위원회를 발족시켰다. 대학 명칭은 처음에는 경성제국대학이 아니었다. 1924년 첫 입학생을 모집하는 원서교부 때만 해도 명칭이 조선제국대학이었다.
당초 조선제국대학으로 칭하려던 일제는 ‘조선제국대학’이라고 하면 조선이 식민지가 아니라 ‘하나의 제국’으로 인정해주는 꼴이 된다고 해서 서둘러 경성제국대학으로 명칭을 바꿨다. 첫 회 신입생 입학시험과 합격자 발표하는 시기 사이에 명칭이 바뀐 것이다. 명칭 문제는 일본 황실의 자문기관인 추밀원에서까지 논의가 됐을 정도로 중요 의제였다.
일제는 당초 조선을 일본 내의 한 지방으로 인정, 도쿄(東京), 교토(京都), 도호쿠(東北), 규슈(九州), 홋카이도(北海道) 제국대학에 이은 6번째의 ‘조선제국대학’으로 이름 지으려 했다. 그러나 ‘조선제국’ 문제가 대두되자 갑자기 ‘경성제국대학’으로 급선회한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추정을 할 수 있다. 해방 후 일본인이 물러간 후 경성제국대학 캠퍼스를 기반으로 서울대학교가 설립된다. ‘경성’제국대학의 이름을 이어받아 ‘서울’대학교가 된 것이다. 만일 일제가 설립 초기의 의도대로 ‘조선’제국대학이란 명칭을 관철시켰더라면 ‘한국’대학교가 되지 않았을까?
경성제국대학에는 고매한 인품을 지닌 교수도 많았다. 의학부 제1외과의 마츠이 곤페이(松井權平) 교수 같은 이는 태평양전쟁 시 단발령(대학생들의 삭발)을 내리고 국민복을 입힌 데 대해 “부질없는 짓이다. 일본은 결국 지고 만다”고 학생들 앞에 대놓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부속병원에서 조선인과 일본인 환자를 구분해서 진료하지 않았고, 그런 일이 발견되면 크게 나무랐다. 의학부 교수들은 사망할 때에 반드시 시신을 실험용으로 써달라고 유언했다. 이비인후과 고바야시(小林靜雄) 교수가 그랬고, 마츠이 곤페이 교수도 해방 전 해에 사망, 제자들에 의해 시체가 해부되었다. 제자들은 스승의 시신 해부를 지켜보면서 숙연한 마음으로 의도 확립(醫道 確立)을 다짐했다.
경성제대 총장의 권위는 대단했다. 이따금 조선 총독이 대학을 둘러보는 경우도 있었는데, 교수나 총장이 현관 앞에 도열하는 따위의 일은 전혀 없었다. 고등관 중 천황이 직접 임명장을 주는 최고 고등관을 ‘친임관’이라 불렀는데, 식민지 조선에서는 총독과 경성제국대학 총장 둘만이 친임관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대학총장을 국무총리와 동급으로 예우한 셈이다. 총독과 동급이라는 총장의 권위 덕분에, 전시의 비상상황에서도 학내에는 놀라울 정도의 자유와 자율이 확보되었다. 권력에 나부끼는 작금의 우리 대학이 부끄러워해야 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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