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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밀턴

문학(文學)과 인생(人生) --최 재 서 (崔載瑞)

by 안티고네 2017. 9. 4.

문학(文學)과 인생(人生)

최 재 서 (崔載瑞)

   

  인생 오십 고개에 올라서, 그 사이 한 일이 많은 것 같지만, 돌아다보면 실오라기만한 외길이 보일 둥 말 둥, 줄거리 잡아 이렇다 할 만한 아무 일도 없다. 나는 인생의 허무(虛無)와 무가치(無價値)를 느낀다. 나는 좀더 충실(忠實)하고, 좀더 가치(價値) 있는 생(生)을 체험(體驗)하고 싶다. 그럴 때에 나는 베에토벤의 교향악(交響樂)을 듣고, 혹은 밀턴의 시(詩)를 읽고, 혹은 셰익스피어의 희곡(戱曲)을 읽는다.  

   이 글을 읽어 줄 독자는 대개 이십 전의 청년들임을 나는 알고 있다. 여러분은 아직 인생을 회고(回顧)할 필요는 없다. 다만, 앞을 내다보며 기쁨과 슬픔을 다 같이 희망의 품안에 포옹(抱擁)하면서 전진(前進)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여러분이 앞으로 간혹 문학 작품(文學作品)을 읽어, 인생에 대해서 그 무엇을 반성(反省)하게 될 때에, 이 글이 약간의 도움이 될까 해서 붓을 든다.

   옛날부터 ‘시는 자연(自然)의 모방(模倣)’이라 일컬어 왔고, 또 ‘연극(演劇)은 인생을 거울에 비추어 보이는 일’이라고 말해 왔다. 비교적(比較的) 현대에 발달한 소설(小說)에 대해서도 같은 말이 자주 되풀이된다. 그만큼, 모든 문학 작품이 자연과 인생을 모방(模倣)하고 반영(反映)하여, 현실의 이모저모를 보여 준다.

   그러나, 이것은 문학의 일면이고 전면은 아니다. 어느 작품을 보아도, 거기에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그대로 나타나 있지는 않다. 마치 사진기(寫眞機)가 풍경(風景)이나 인물(人物)을 촬영(撮影)하듯이, 문학이 현실을 그대로 모사(模寫)하지는 않는다. 문학에서, 현실을 모사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도 아니며, 또 필요한 일도 아니다. 문학의 목적은 좀더 별다른 데 있다. 그것은 자연과 인생에서 소재(素材)를 선택해다가 그들의 모양을 다소 수정(修正)하고 혹은 다시 결합(結合)해서 한 예술품(藝術品)을 만들어 내는 일을 목적으로 삼는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문학 작품은, 현실적(現實的)이지만 현실 그 자체는 아니다. 작품 세계(作品世界)는 현실 세계(現實世界)와 따로 존재(存在)한다. 그렇다고 해서 독립(獨立)해 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인생을 떠나서 예술(藝術)이 독립할 수는 없다. 예술가(藝術家)는 그의 소재들을 인생 체험(人生體驗) 속에서 구해 올 뿐만 아니라, 만약 그가 진정(眞正)한 천재(天才)라면 그 소재들을 결합하고 조직(組織)하는 독특(獨特)한 방법과 원리까지도 자연에서 배워 온다. 그러니까, 예술 세계는 현실 세계를 기반(基盤)으로 해서만 성립된다. 예술이 현실과 동일하지도 않고 독립되어 있지도 않다면, 그 둘의 관계는 무엇일까? 그것은 병립(竝立)의 관계다. 현실 세계가 있고, 그 곁에 혹은 그 위에 예술 세계가 있다. 예술은 현실을 모방(模倣)하고 반영(反映)하면서도, 독자적(獨自的)인 원리 밑에서 자체의 세계를 창조(創造)하여 독특한 목적을 수행(遂行)한다.

   문학이 현실을 반영하는 한도(限度)에서는 기록(記錄)이지만, 새 세계를 창조하는 한도에서는 예술이다. 어떤 문학 작품이나 기록면(記錄面)과 예술면(藝術面)을 가진다. 이 두 면 중에서 우열(愚劣)을 가릴 수는 없다. 기록과 예술의 두 면을 구비(具備)함으로써만 작품은 완전하다. 예술적인 면은 다음 기회(機會)에 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기록적(記錄的)인 면만을 말하려 한다.

   문학을 현실의 기록으로서 볼 때에, 작품의 가치(價値)는 그 작품을 쓴 사람 자신이 얼마나 성실(誠實)하게 인생을 체험(體驗)했으며, 또 그 체험을 얼마나 진실(眞實)하고도 아름답게 표현했는가에 달려 있다. 자기 자신이 성실하게 인생을 실천(實踐)해 보지 못한 사람의 글이, 아무리 아름다운 문구를 늘어놓는다 할지라도 다른 사람에게 감동(感動)을 주지 못할 것은 뻔한 이치(理致)다. 어려운 현실 속에서 일평생 성실하게 진리(眞理)를 실천해 나가는 사람은 퍽 드물다. 진실한 생활 체험(生活體驗)을 예술적(藝術的)으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能力)을 가진 사람은 더욱 희귀(稀貴)하다. 우리는 밀턴에게서 그런 희귀한 실례(實例)를 본다.

   17세기 영국(英國)의 시인(詩人) 밀턴은 부유(富裕)한 집에서 태어나서 좋은 환경(環境) 속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음악에 이해가 깊었기 때문에, 어린 밀턴은 줄곧 음악적(音樂的)인 분위기(雰圍氣) 속에서 지냈다. 이것은 그가 장래(將來)에 시인이 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모른다. 시와 음악을 결합하는 일이 그의 소년 시절의 꿈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의 문학적 소질(素質)을 이해했기 때문에, 그를 학교에 보내지 않고, 집에서 가정 교사(家庭敎師)의 지도(指導)로 특별히 교육했다. 그는 열심(熱心)히 공부했다. 열 두 살 이후로 그는 자정(子正) 전에 자 본 일이 별로 없었다. 아직 조명(照明)이 불완전하던 그 시대에 어린 사람이 그렇게까지 밤 늦도록 공부했다는 것은 건강(健康)에 좋았을 리가 없었다. 그것은 그가 만년(晩年)에 실명(失明)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근면(勤勉)의 덕택(德澤)으로, 그는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문학을 비롯하여 철학(哲學), 천문학(天文學), 물리학(物理學) 등의 학문에 상당히 깊게 들어가 있었다.

   밀턴의 대학 시대는 순결(純潔)한 생활로 일관(一貫)되어 있었다. 그는 그가 믿는 퓨리터니즘을 실천(實踐)하고 있었다. 이 시대의 그의 생활 감정(生活感情)이 여러 편의 시 속에 남아 있다. 대학에 들어갈 때에 밀턴은 목사(牧師)가 될 예정(豫定)이었지만, 대학 재학 중에 문학으로 전향(轉向)했다. 그 당시 교회(敎會)들의 타락(墮落)을 분개(憤慨)했다는 것도 목사 지망(志望)을 단념(斷念)한 이유의 하나였다. 대학을 나온 뒤에, 그의 앞에 유망(有望)한 길이 있었지만, 그는 시골에 있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서, 독서(讀書)와 시 창작(詩創作)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의 장래를 염려(念慮)하는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가 문학에 대해서 얼마나 투철(透徹)한 신념(信念)과 열렬(熱烈)한 정신(精神)을 품고 있었던가를 알 수 있다.

   스물 아홉 살 되던 해에, 밀턴은 더욱 견문(見聞)을 넓히고자 이탈리아 여행을 떠났다. 그는 그 곳에서 여러 문인, 학자 들과 상종(相從)했고, 또 직접 이탈리아 말로 시를 발표하여 그들을 놀라게 했다. 그가, 갇히어 살던 과학자 갈릴레이와 만난 것도 이 때였다. 이 여행 중에 특별히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그가 영국을 대표할 만한 장편 서사시(長篇敍事時)를 쓰고자 결심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탓소의 서사시 ‘예루살렘의 해방’과 경쟁(競爭)해 볼 생각이었다. 전기(前記)의 서사시(敍事詩)는 16세기 말에 발표되어, 근세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국민시(國民詩)로서 온 유럽에 이름이 높았었다. 밀턴도 그런 애국적(愛國的)인 시를 써 보고 싶었다. 그래서 주제(主題)를 영국 역사(英國歷史)에 유명한 아아더 왕의 전설(傳說)에서 구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이탈리아 여행을 마치고 시칠리아 섬으로 떠나려 할 제, 본국(本國)에 내란(內亂)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있어, 그는 곧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오래 전부터 왕실(王室)과 의회(議會) 사이에 계속(繼續)해 오던 알력(軋轢)이 마침내 정면 충돌(正面衝突)을 일으켰다. 그 때의 심정을 밀턴은 다음과 같이 기록(記錄)하고 있다.

   “동포(同胞) 국민이 자유를 위해서 싸우고 있는데, 이렇게 쾌락(快樂)을 위해서 외국에 여행하고 있다는 것은 수치(羞恥)스러운 일이라 생각했다.”

   언제나 양심(良心)의 명령대로 움직이는 밀턴의 면목(面目)이 여기에 여실(如實)히 나타나 있다.

   본국에 돌아온 뒤에, 밀턴은 형세(形勢)를 살피면서 여전히 문학에 정진(精進)하고 있었다. 그 때에 그의 머리를 점령(占領)했던 문제는 여전히 장편시(長篇詩)의 창작이었다. 그 때의 그 포부(抱負)는 다음 말들에서 엿볼 수 있다.

   “고심 노력(苦心努力)하고 열심히 연구(硏究)하는 일은 나의 팔자라 생각하는데, 그 위에 또 강한 천품(天稟)이 결합된다면, 후세(後世) 사람들을 위해서, 만만히 죽어 없어지지 않을 작품을 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리하여, 그는 열심히 작품의 재료(材料)들을 모으고 있었다. 그 때의 계획(計劃)들을 적은 원고(原稿)가 99편 보존(保存)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성경(聖經)에 관한 것이 66편, 영국 역사에 관한 것이 33편이다. 마지막에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가 선택(選擇)되면서 실락원(失樂圓)이라는 제목이 결정된 것은 1642년이었다.

   바로 이 때에, 교회를 장로제(長老制)로 고쳐 종교(宗敎)와 정치(政治)를 철저(徹底)히 민주화(民主化)하려는 법안(法案)이 의회(議會)에 제출(提出)되어 국내(國內)가 물끓듯했다. 밀턴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팜플렛을 써 가지고 서재(書齋)에서 나왔다. 그 후 20년 동안, 그는 내란(內亂)에 직접 참가(參加)해서 투쟁(鬪爭)했다. 여러 해 연구해 오던 그는 장편시는 어찌 되었는가? 물론 포기(抛棄)되었다. 그렇게 알뜰한 그의 시였지만, 민족의 자유를 위해서는 서슴지 않고 붓을 꺾는 밀턴이었다. 내란 중에 그는 크롬웰 호민관(護民官) 밑에서 라틴 말 비서(秘書)로 있으면서, 국왕(國王) 차알즈 1세를 단두대(斷頭臺)로 보내라고 주장(主張)하는 글을 발표하여 온 유럽을 진동(震動)시켰다. 그는 그의 온갖 지력(知力)과 정력(精力)을 바쳐 자유 진영(自由陣營)을 위하여 싸웠다. 그러므로, 문학에서는 멀어졌었다.

   그러나, 영국의 왕실(王室)을 폐지(廢止)하고 공화국(共和國)을 만들려고 일으킨 내란은 밀턴과 그의 동지들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1660년에, 파리로 망명(亡命)했던 차알즈 2세가 다시 영국 왕으로 영접(迎接)되어, 영국은 왕정(王政)으로 복고(復古)했다. 혁명 투사(革命鬪士)들은 모두 붙잡혀서 처단(處斷)되었고, 밀턴도 투옥(投獄)되었으나 목숨만은 보존되었다. 그의 문학적(文學的) 재질(才質)을 아깝게 생각하는 국왕이 특별히 그를 사(赦)해 준 것이다.

   이 때에 밀턴의 나이 50, 그의 이상(理想)과 더불어 지위(地位)와 권세(權勢)를 잃고, 사면(四面)의 적(敵)들 속에서 고독(孤獨)과 빈궁(貧窮)에 빠졌다. 그의 가정 생활(家庭生活)도 특별히 불행했다. 첫번 결혼(結婚)에 실패했고, 둘째번 부인은 사망(死亡)했고, 그 자신은 완전히 시력(視力)을 잃어 맹인(盲人)이 되었다. 실락원에서 밀턴은 암담(暗澹)한 그 자신을,

   “고약한 시대 험(險)한 구설(口舌)을 만나, 암흑(暗黑)과 위험(危險)과 고독에 둘러싸여”

 

라고 읊고 있다. ‘실락원’은 이런 환경(環境) 속에서 시작되었다. 이 눈먼 늙은 시인이 한 구절 한 구절 구술(口述)하는 것을 그의 어린 딸이 받아쓰면, 그것을 낭독(朗讀)시키어 틀린 데를 고치고, 이리하여 12권 장편시를 읊어 나가는 장면(場面)을 참담(慘憺)하고도 엄숙(嚴肅)하였다. 무엇이 맹목(盲目)의 시인을 몰아서 시를 읊게 했던가? 그것은 그가 젊었을 제 약속(約束)했던, 만만히 죽어 없어지지 않을 만한 불후(不朽)의 작품을 후세에 남기겠다는 불붙는 열정(熱情)이었다.  

   밀턴은 이 작품 속에다 그의 지식(知識)과 학문(學問)과 사상(思想)과 신념(信念)뿐만 아니라, 그의 감정(感情), 특히 왕정 복고(王政復古) 이후에 그가 겪은 가지가지의 쓰라린 감정 ― 실망과 분만(憤懣), 권세(權勢)에 대한 반항(反抗)과, 아첨(阿諂)에 대한 멸시(蔑視), 하느님의 사명(使命)을 다하지 못한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反省)과 회한(悔恨)― 요컨대, 그의 인생 전체를 털어 넣었다. 뿐만 아니라, 밀턴은 이 한 편의 시를 쓰기 위해서 일생을 살고 싸우고 고민(苦悶)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결과, 실락원은 그가 예언(豫言)했던 대로 불후(不朽)의 작품이 되었다. 밀턴은 양서(良書)를 정의(定義)하여 ‘생명을 넘어 생명으로 길이 전하고자, 대가(大家)의 생명 고혈(膏血)을 향약(香藥)으로 처리(處理)하여 보존한 것’이라 말했는데, 이 말은 그대로 그 자신의 책의 성질을 설명한다.

   지식을 전하는 책은 지식이 발달함에 따라서 잊혀지지만, 진실한 사상과 보편적(普遍的)인 감정을 표현하는 문학은 그 생명이 영구하다. 다만, 그런 사상과 감정은 밀턴의 경우에서처럼 성실하고도 열렬(熱烈)한 인생 체험(人生體驗)에서만 우러나올 수 있다. 러스킨은 그러한 진리를 다음과 같이 웅변적(雄辯的)으로 말하고 있다.

   

  “책을 쓰는 사람은 ‘이것을 진실하고도 유익(有益)하다.’ 또는 ‘유익하고도 아름답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말해야 할 그 무엇을 가진다. 그가 알기로는, 과거에 아무도 그것을 말할 사람이 없었고 앞으로도 말할 사람이 없다. 그는 그것을 분명(分明)하고도 음악적(音樂的)으로, 적어도 분명하게 말해야 할 의무(義務)를 느낀다. 인생을 총 결산(總決算)하는 마당에서, 그것이야말로 그에게 명백한 사실이라 함을 그는 자각한다. 그것이야말로 그가 이 세상에 생을 받아 태양(太陽)의 혜택(惠澤)을 입음으로 인연(因緣)해서, 천재일우(千載一遇)로 알게 된 참다운 지식이며, 참다운 의견이었다 함을 자각(自覺)한다. 그는 그것을 영원히 기록(記錄)하고 싶다. 될 수만 있으면 바위에 새겨 두고 싶다. 이렇게 말하면서 ― ‘이것이 나의 최선(最善)이다. 그 나머지는 나도 남들처럼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미워했다. 나의 인생은 수증기(水蒸氣)처럼 사라지고, 이제 아무것도 없다. 그렇지만, 이것만은 나의 눈으로 보았고, 나의 마음으로 알았다. 나에게서 그 무엇이 가치 있다면, 이 책이야말로 당신들이 기억(記憶)해 줄 만한 가치 있는 나의 일부다.”  

 

인문계고등학교 국어Ⅲ / 문교부 / 1968년 1월 10일 초판 박음 / 1970년 1월 20일 펴냄 /68~76쪽 

 

인문계고등학교 국어3 / 문교부 / 1975년 2월 20일 초판 박음 / 1985년 3월 1일 펴냄 / 

258~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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