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 제노비즈와 사회주의 지식인의 책임(2)
4. 사회주의와 인문학 연구
제노비즈는 사회주의 운동에서 지식인의 역할과 책임이 무엇인지 설명하기 위해 1960년대 반전운동의 철학적 기초를 분석한다. 그는 급진주의자들이 월남전에서의 미국의 행동에 대해 저항할 경우 그것은 단순한 반전시위의 의미만을 갖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그 운동은 자본주의 사회질서 그 자체에 대한 비판의 일환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급진주의자들은 미국의 국민문화가 점점 타락하고 있다고 보았으며, 월남에서의 야만주의는 그러한 타락과정의 한 부분이라고 간주했다.
국외에서의 제국주의적 만행은 국내에서의 도덕적 타락의 연장선성에 놓여져 있었다. 미국의 신좌파는 당시 통일된 체계적 이론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이러한 인식에 공감대를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제노비즈는 사회주의 지식인의 역할과 책임에 관한 문제 역시 그러한 틀 안에서 논의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신좌파는 부르주아적 사회질서가 점점 타락하고 있으며, 그 타락의 정도를 측정할 수 있는 유력한 척도 중 하나가 그 사회에서 인문학이 얼마만큼이나 노리개(plaything) 수준으로 격하되었는가를 확인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과연 현실적으로 미국을 포함한 서양 세계에서 인문학의 지위는 어디에 와 있는가? 한마디로 심각한 수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컨대 컬럼비아 대학교의 인문학 교수인 로버트 니스벳(Robert Nisbet)은 미국이 머지않아 인문학의 새로운 암흑시대(a new Dark Age)에 봉착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할 정도이다.
서양 사회에서 인문학이 놓인 심각한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정치적 관련성을 내세우며 학자로서의 일상적 업무인 연구활동을 위선으로 간주하는 역사학자는 실제로는 국민문화 타락의 선봉이 되는 셈이다.
제노비즈에 따르면, 인문학을 옹호하고 연구하는 일은 자본주의사회의 타락에 맞서 투쟁하는 전쟁의 최전선에 임하는 일이며, 인문학을 더 이상 훼손하는 자는 그 주장이 무엇이든 간에 이적행위를 하고 있는 셈이다.
만일 사회주의 지식인이 인문학을 하찮은 것으로, 좀더 나은 삶을 위한 투쟁에서 쓸모가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면 그것은 반동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제국주의로 인해 미국 국민에게 초래된 퇴폐적 영향은 더욱 신속하게 진행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급진주의자들이 그토록 경멸해 마지않는 학자의 일상적 연구 활동은 사실상 사회주의 지식인이 평생을 바쳐야 할 대사업인 셈이다.
제노비즈에 의하면, 사회주의 역사학자에게 주어진 최고의 임무는, 재능과 여건이 허락하는 한 탁월한 역사학자가 되어, 인류가 자신과 자연을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투쟁해 왔는가를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제시하고, 이로써 역사 속에서 발전되어 온 휴머니티의 가치를 옹호하고 이를 고양하는 일이다.
5. 세계관 형성을 위한 지적 노력
1960년대 신좌파는, 혁명 수행을 위한 사회적 "여건 성숙(ripeness)"의 개념이 부르주아 계급의 기만술책일 뿐이며, 따라서 촌각의 지체 없는 "즉각적 혁명(revolution here and now)"이 요청된다고 보았다. 바야흐로 혁명의 순간이 왔으니, 다른 모든 요소들은 혁명 과업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노비즈는 이들 자칭 혁명주의자들 가운데 자신의 구호를 믿는 자는 거의 없다고 신랄하게 꼬집는다. 만일 정말로 그 구호를 믿었다면 그들은 즉각 정치활동에 전념하기 위해 캠퍼스를 떠났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정년보장(tenure)이라고 하는 특권적 성역에 안주하면서 구호만을 남발한다. 행동하기보다는 말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묵시적인 혁명의 환상 속에 사는 이들 "만년 사춘기 소년들"―제노비즈의 표현이 신랄하다―에게는 전략, 전술 이외에 다른 지적 작업이 필요 없다. 그러나 정치현실 뿐만 아니라 국민문화 자체를 재형성하기 위한 길고도 험난한 투쟁의 필요성을 사회주의 지식인은 결코 이들 니힐리스트들의 논리에 양보할 수 없다.
사실 "먼저 행동을, 이론은 나중에(Action first, doctrine later.)"라는 슬로건은 무솔리니의 주장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제노비즈는 사회주의 지식인, 특히 대학에 몸담고 있는 지식인은 그가 소망하는 미래의 사회상에 부합하는 세계관을 정립하는 작업에 매진해야 한다고 타이른다. 지적 노력은 아무리 그것이 정치 투쟁과 거리가 먼 온건하고 사소한 것일지라도 관련성(relevance)을 갖는다는 설명이다.
이런 의미에서 국민문화를 수호하는 역사적 임무를 사회주의에 기대하면서, 정치적 행동주의의 미명 하에 문화적 노력을 포기한다는 것은 이율배반이라는 이야기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예외 없이 자신들이 적들보다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우월한 지위에 있다고 자임했다. 그러나 제노비즈는 그토록 자신만만한 사회주의가 지적 성취라는 점에서 너무나 빈약하다는 현실에 당혹스러워 한다.
사회주의 운동은 높은 수준의 철학과 프로그램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제노비즈의 지적에 따르면, 미국의 사회주의자들 중에는 그 당시 신좌파의 공격을 받고 있었던 우드워드(C. Vann Woodward)나 호프스태터(Richard Hofstadter)에 맞설만한 학자도 거의 없었을 뿐더러, 하물며 영국의 마르크스주의자인 힐(Christopher Hill), 홉스봄(Eric J. Hobsbawm), 톰슨(E. P. Thompson)의 학문적 수준에 도달한 학자는 전무하다는 것이 제노비즈의 지적이다.
그러므로 보수·자유주의 진영에 맞서 오직 사회주의 처방만이 현대 미국의 야만주의적 경향을 치유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려면, 사회주의 지식인은 정치적 행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식인으로서의 창조적인 작업에 의해 그들과 겨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대학은 당연히 비정치화되어야 할 것이다. 대학 및 구 부설 연구기관들은 바로 사회주의적 관점을 확산·심화시킬 이데올로기 대결의 무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노비즈는 보수·자유주의 진영과의 대결을 말하면서 결코 독선적·배타적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보수적 카톨릭 역사학자인 스티븐 톤서(Stephen Tonsor)가 대학의 위기에 관해 자신과 많은 공통된 견해를 갖고 있음을 발견하고 기뻐했으며, 사회주의자가 아닌 에릭 웨일(Eric Weil)과 플럼(J. H. Plumb)의 인문학 옹호론이 학식과 기량에 있어 자기보다 월등하다고 솔직하게 시인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과 이데올로기적으로 대립되는 진영이라 할지라도 지적 성취가 우수하기만 하다면 그것을 받아들일 용기가 있었다. 그는 심지어 사회주의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상대 진영의 우수한 지성을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6. 마르크스주의는 과정에 불과
제노비즈에 의하면, 미국 국민은 러시아 혁명이 스탈린주의로 타락하는 것을 보았고, 사회주의가 민주적 전통을 결여한 국가들에서만 득세하고 있는 것을 목격한 바 있다. 그러므로 미국의 사회주의는 기존의 사회주의가 보여준 구태의연한 비전만을 보여줄 경우 결코 국민의 공감대를 얻어낼 수 없다.
그러므로 제노비즈는 서양 문명의 자랑스러운 유산인 자유롭고 비판적인 사상적 전통을 살리고, 대립 진영의 정직한 반대자들이 제기한 지적 도전을 경의로써 수용하여, 국민과 국가 현실에 부합하는 토착적인 사회주의 이론을 발전시키고자 했다.
"마르크스주의 그 자체는 하나의 과정일 뿐 결코 종교적 교리일 수 없다"는 그의 말은, 변화를 거부하고 경직된 채 멸망하고 만 1980년대 말의 공산주의와는 판이하게 다른 지적 저력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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