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쥔장 칼럼·글

[박상익]유진 제노비즈와 사회주의 지식인의 책임(1)

by 안티고네 2016. 12. 9.

유진 제노비즈와 사회주의 지식인의 책임(1)  

 

1. 역사가 제노비즈

유진 제노비즈(Eugene Dominick Genovese)는 윌리엄 애플먼 윌리엄즈(William Appleman Williams), 게이브리얼 콜코(Gabriel Kolko) 등과 함께 미국 신좌파 역사가들(New Left Historians) 중 최고의 학문적 수준에 이르렀다고 평가받는 역사학자이다.

네오 마르크스주의자로 자처하는 그는 브루클린 칼리지(Brooklyn College) 재학 시절인 1950년대 초부터 미국 남부사에 대한 독보적인 관점을 개진해 왔으며, 그로 인해 좌·우 두 진영으로부터 공격을 받곤 했다. 그러나 그는 특유의 논지를 심화·발전시키는 가운데 결코 자신의 입장을 포기하지 않는다.

오늘날 미국 사학계에서 그가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비중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리에게 거의 소개마저 되어 있지 않다. 아직 낯설기만 한 인물이다. 하지만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의 헤게모니 이론을 미국 남부사에 적용한 역사학자라고 하면 아마 조금은 더 친숙한 느낌이 들지도 모르겠다.

폭넓은 제노비즈의 학문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다. 여기서는 그의 인문학 일반, 특히 역사학 연구의 의의에 대한 그의 사회주의 지식인으로서의 견해를 살펴보고자 한다. 비록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제노비즈를 통해 우리는 네오 마르크스주의의 일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2. 신좌파에 대한 비판

제노비즈는 남부사를 다룬 그의 논문집 <赤과 黑>(In Red and Black)--여기서 赤은 마르크스를, 黑은 흑인 노예를 상징한다--첫 장에서 자신의 글이 모두가 학문적 성격을 지닌 것임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철저하게 정치 참여적인 성격을 함유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인문학, 특히 역사학 분야에서의 학문적 연구의 경우, 그것이 취하는 비판적 입장에 따라 우리 시대의 야만주의에 저항하여 휴머니티를 옹호하는데 기여한다고 말한다. 인문학에서의 학문 활동은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에 맞서 싸우는 사회주의 지식인으로서 응당 떠맡아야 할 중대한 임무라는 것이다.

제노비즈의 입장은 1960년대 미국사회를 들끓게 했던 신좌파의 활동에 대한 엄중한 자기 비판을 내포하는 것이었다. 그는 각별히 1960년대 말 신좌파 내부에서 일어난 일련의 논쟁에 주목하면서, 여기서 제기된 사회주의 지식인의 임무에 대한 신좌파 지식인들의 관점을 두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무고한 월남 어린이들이 미 공군의 네이팜 탄 폭격으로 무참하게 죽어 가는 상황에서, 한가히 연구실에 앉아 참혹한 현실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중세 유럽사 따위나 논구할 수 있느냐는 입장이다(Children-are-being-napalmed argument). 눈앞의 비참한 전쟁도 종식시키지 못하면서 하물며 사회주의 운동을 어떻게 수행할 수 있겠는가? 모든 전문 연구기관은 마땅히 정치화되어야 하며, 지식인과 대학생은 즉각 뛰쳐나가 시위에 가담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학문은 그 주제가 마땅히 "정치적 관련성(political relevance)"을 가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 입장은 고대사, 중세사, 또는 근대초기 연구자들로부터는 거의 동의를 얻지 못했지만, 현대사 전공자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이 입장이 첫 번째 입장과 다른 점이 있다면, 고대사, 중세사의 일부 선별된 주제, 그리고 근대사와 현대사만이 가까스로 연구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결국 두 입장은 모든 지식인이 정치적 행동주의자(political activist)가 되어야 하며 역사학은 만일 연구가 허용된다면 비근한 정치 현실과의 관련성을 갖는 분야에만 국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3. 정치적 행동주의의 허구성

제노비즈는 이러한 입장을 견지하는 급진주의자들을 니힐리스트, 몽상가(utopian)라고 규정한다. 그는 먼저 월남에서의 잔학 행위를 거론하며 정치적 행동주의를 유일한 대안으로 제시하는 급진주의자들의 주장에 내포된 허구성을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장구한 인류 역사상 월남전에서와 같은 잔학 행위가 저질러지지 않았던 때는 단 한 해도 없었으며, 미국사의 경우만 보더라도, 단 일년도 흑인에 대한 잔학 행위가 가해지지 않은 시기는 없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부당한 억압과 야만주의가 인류 역사를 통해 끊임없이 자행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월남전과 같은 눈앞의 특정 사안에만 집착하여 이의 해결책만을 모색하는 태도는 피상적이고 근시안적인 대증 요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는 비근한 정치 문제와 직접적인 관련성이 없는 역사학 연구의 무가치성을 주장하는 입장을 일컬어, 역사학에 직접적인 정치적 효용만을 기대하는 이른바 이데올로기적 역사학이라고 단정하고, 이것이 내포하는 위험성을 지적한다.

물론 사회주의자는 이른바 "순수학문(pure scholarship)"과 가치중립적 사회과학(value-free science)을 옹호하지는 않는다. 불가능한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적 성향의 배제가 어렵다고 해서 최대한의 객관성을 획득하기 위한 노력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20세기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스탈린주의 등장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데올로기적 역사학은 예외 없이 새로운 엘리트 계급, 압제자 계급의 시녀로 전락하고 말았다. 역사학적 진실과 객관성을 무시한 역사학자는 종국에는 자신이 비판했던 지배계급에게 봉사하거나 또는 기껏해야 변화의 물결을 타고 주도권 장악의 기회를 엿보는 새로운 착취 엘리트 계급의 이익에 기여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제노비즈는 말한다. 진실하고 객관적인 역사학이야말로 사회주의자의 이익에 부합하며, 반대로 거짓되고 학문적으로 빈약한 역사학은 사회주의의 적에게 도움을 준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