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쥔장 칼럼·글

[풀무소식지 제215호]풀무에 거는 기대

by 안티고네 2015. 10. 29.

풀무에 거는 기대

내가 풀무학교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대학을 다니던 1970년대였다. 노평구 선생이 주관하시던 전국 무교회 성서집회를 그 때도 풀무학교에서 개최하곤 했다. 풀무학교의 오늘이 있기까지 설립자인 이찬갑, 주옥로 선생의 기여가 크다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고, 최근 들어 풀무학교의 시련기에 최태사 선생의 헌신적 지원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나의 주관적 시점에서 본다면,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풀무학교의 성격과 특징을 존재하게 만든 분은 역시 홍순명 선생이다. 그리고 홍순명 선생의 최대 후원자는 노평구 선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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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 책꽂이에는 홍순명 선생이 엮은 <교양국어> 1, 2, 3권이 꽂혀 있다. 대학생 시절 이 책을 읽고 감탄하던 기억이 지금도 남아있다. 방대한 독서량과 분명한 정신적 지향이 없다면 이토록 균형감 있는 읽을거리를 만들어낼 수 없을 것이다. 나는 2001년에 <김교신전집>을 출간한 부키출판사의 박윤우 사장에게 <교양국어>를 정식으로 재출간해줄 것을 여러 차례 부탁하기도 했다. 아울러 홍순명 선생의 기력이 정정하실 때 가능한 한 많은 책을 쓰시게 해서 기어이 책으로 많이 출간해 달라는 독촉도 여러 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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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해서 나온 책들 중 하나가 <들풀들이 들려주는 위대한 백성 이야기>(3, 부키)이다. 이 책은 2007년에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국출판문화상은 우리나라 출판계에서 최고의 권위와 전통을 가진 상이어서 홍순명 선생뿐만 아니라 책을 낸 부키에도 큰 명예였다. 나는 <기독교사상> 20041월호에 서평을 기고하기도 했다. 나는 이 책을 이렇게 평가했다.

이번에 홍순명 선생이 출간한 <들풀들이 들려주는 위대한 백성이야기>는 심청전, 흥부전, 선녀와 나무꾼(1), 홍길동전, 춘향전(2)을 새롭게 고쳐 쓴 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수많은 이본들이 사소한 차이는 있을지언정 하나같이 봉건적인 낡은 가치관을 담고 있어 의미 있는 차별성을 보기 어려운 반면, 홍순명 선생의 작품은 21세기의 새로운 세계관과 시대정신에 맞춰 새롭게 집필되었다는 점에서 기존의 이본들과는 사뭇 차원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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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다기보다는 실로 환골탈태라는 말이 적절할 정도이다. 재창조라고 말해도 지나침이 없다. 더욱이 홍순명 선생이 이 작품들에 불어 넣은 사상은 일개 백면서생이 탁자에 앉아 떠올린 것이 아니라, ‘위대한 평민을 모토로 40년 넘도록 충남 홍성의 풀무학교에서 온몸으로 부딪히며 얻어낸 실천적 교육철학에서 길어올려진 것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는 감히 홍순명 선생의 우리 고전 재창조 작업이 괴테의 <파우스트>에 필적할 정도로 한국문학사에서 현격한 차별성을 갖는 시도라고 평가하고 싶다.”

노평구 선생은 홍순명 선생을 무던히도 아끼셨다. 이따금 보석이 진흙에 묻혀있다면서 서울에 있으면 훌륭한 인문학자가 될 인물인데 아깝다고 탄식을 내뱉곤 하셨다. 순전히 나의 주관적 판단이지만, 노평구 선생은 홍순명 선생이 추구한 풀무 교육에 대해 전적으로 공감하시지는 않는 눈치였다. 영국의 이튼학교처럼 인문계 고교로서 나라를 이끌어갈 정예를 키워내는 학교를 더 원하셨던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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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1970년대 말 대학 졸업 즈음해서 노평구 선생께 풀무학교 교사로 가면 어떻겠는가 하고 의논을 드린 적이 있었다. 그 때 노평구 선생은 반대를 하시진 않았지만, 공부를 더 하는 게 좋지 않겠는가 하는 의사를 비치셨다. 나는 그 후 방황과 우여곡절 끝에 선생의 조언대로 공부를 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 후 대학에 자리를 잡았고, 1990년대 초에는 홍순명 선생의 부탁으로 한동안 풀무 학생들의 세계사 과목을 맡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학자로서 이룬 것이 아무 것도 없는, 방전보다 충전이 시급한 상황이어서 얼마 뒤에 도중하차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 때의 부채 의식이 지금도 남아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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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교 이래 풀무의 모토는 위대한 평민이다. ‘평민이란 무엇인가? 서양 역사에서 평민은 왕족이나 귀족이 아닌 보통사람을 일컫는다. 이들은 고대와 중세를 거치는 동안 피지배계급으로 억압받고 수탈당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제아무리 능력과 재주가 있어도 유리 천장때문에 실력에 상응하는 직분을 가질 수 없었다. (평민 출신으로 이스라엘 왕이 된 다윗은 예외적인 경우다.) 그러나 근대가 밝아오면서 이들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나폴레옹 시대에 널리 회자된 능력에 따른 출세(career open to talent)’가 시대 변화를 잘 보여준다. 세습적인 신분의 굴레를 벗어나 능력만 있다면 평민이라 할지라도 과거 지배계급이 맡던 직분을 맡아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었다. 그러므로 근대 이후의 세계 역사는 평민의 역사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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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무의 모토는 위대한 평민이다. 그러면 위대한평민이란 무엇일까? 노평구 선생이 평소 강조한 공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말씀이 여기에 적용된다고 본다. 지위가 높건 낮건, 공직에 복무하건 말건, 개개인의 삶이 공적인 차원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공적으로생각하고 행동하는 보통사람이야말로 위대한평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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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이 빛도 없이란 말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본분을 다하는 겸손한 삶을 표현하는 아름다운 표현이다. 그런데 이 말이 자신과 가정, 그리고 직업만을 생각하는 무기력하고 비겁한 삶을 둘러대는 핑계거리로 사용되는 경우도 종종 본다. (물론 나 자신도 여기서 예외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사적 영역에만 안주하는 소시민적 삶은 위대한 평민과는 거리가 멀다. 노평구 선생은 우리 사회를 향상시키지 못하는 신앙은 쓸모없는 신앙이라고 누누이 강조했다. 선생은 전체를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는 말씀도 종종했다. 평범한 삶을 살면서도 전체 사회의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위대한 평민이야말로 역사를 움직이는 진정한 영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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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풀무의 역사도 어언 반세기를 훌쩍 넘겼다. 평민이되 사회 전체를 바라보며 공적으로 살고자 애쓰는 인물들이 다양한 방면으로 진출해 각 분야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풀무, 그리고 역사를 바꾸는 지렛대 역할을 하는 풀무를 기대한다. 김교신 선생은 한 고장의 최대 산물은 시멘트나 감자 따위가 아니라 그 고장이 배출한 인물이라고 힘주어 강조했다. 풀무의 최대 산물 또한 인물이다.

박상익(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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