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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신 선생

김교신의 민족이상(수정증보)

by 안티고네 2015. 7. 16.

<김교신의 민족이상>(수정증보)

 

 

1928년부터 양정중학 교사로 근무한 김교신은 1940년 3월 복음 전도에 전념하기 위해 사임했다가 1940년 9월경 다시 교직에 복귀한다. 복직 배경에는 경제적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재취임한 학교는 서울의 제1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였다. 이 학교 교장 이와무라 도시오(岩村俊雄)가 길을 열어주었다. 이와무라는 도쿄고등사범학교 지리박물과 출신으로서 김교신의 동문 직계 선배였다. 모처럼 재취임했지만 김교신은 불과 반년 만에 학교를 사임한다. 가장 큰 이유는 김교신이 일제의 동화정책을 완강하게 거부했기 때문이다. 조선 민족의 자존심을 끝까지 지키려 했다.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었는지는 김교신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당시는 공식적인 장소에서 조선말을 사용하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었다. 당연히 수업도 일본말로 해야만 했다. 그러나 김교신은 끝끝내 조선말로 수업을 진행했다. 당연히 교내에서도 문제가 되어 이...와무라 교장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학생들 중에도 조선말 수업에 반발하는 자가 있었다. 누구보다도 조선인으로서의 자존심이 강했던 김교신은 분명한 태도로 동화정책에 동조하는 학생과 대치했다. 진정한 조선 사람으로서의 긍지를 지키기 위해서는 제1고보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와무라에게 더 이상 누를 끼칠 수도 없었다.

 

김교신은 1944년 7월부터 흥남 질소비료회사에서 근로계장으로 있으면서 조선인 근로자 3천여 명을 돌보던 때에도 일본어 상용(常用) 지침을 무시하고 조선말을 사용했다. 흥남 시절 김교신을 곁에서 돕다가 임종까지 병간호를 맡았던 의사 박춘서(朴春緖)는 1945년 3월 30일 일기에 “아침 정각 조회 시간에는 김 선생께서 우리말로 훈화를 하셔서 일어 상용인 이즈음에 다른 별천지를 느끼게 하였다”고 썼다. 별세하기 한 달 전까지도 그의 모국어 사랑은 흔들림이 없었다. '망하면 망하리라'의 심정이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제1고보 재직 당시 김교신에게 대들었던 조선인 학생들이 누구였을까 상상해본다. 조선 최고의 수재들이 입학하는 제1고보 학생이니 광복 후 이 나라의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엘리트로 성장했을 것이다. 아마 미국 유학을 다녀와서 영어도 곧잘 했을 것이다. ‘오렌지’가 아니라 ‘어린쥐’로 발음하는 게 정확한 영어 발음이라고 강조했을지도 모른다. 한국어의 열등함을 절감하면서 영어를 공용어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을지도 모르겠다.

 

광복 70년을 돌이켜보면 우리나라는 그와 같은 ‘수재들’이 주도해왔다. 지금도 그들이 이 나라의 상층부에서 기득권자로 행세하고 있다. 김교신이 그리던 조국의 모습은 아니다. 하지만 세상이 상식과 정도에서 멀리 벗어날수록 김교신의 삶은 더욱 빛을 발한다. 세상이 혼탁하고 염치없이 흘러갈수록 김교신이 실천으로써 보여준 올곧은 삶은 길이길이 후학들의 귀감이 되기 때문이다.

 

김교신은 일제의 침략에 유린당한 조국의 비참한 처지 가운데서 자칫 맹목적인 자학에 빠지기 쉬운 다감한 청년들이 우리의 지리와 역사를 통해 민족적 긍지와 포부를 가져줄 것을 소망했다. 『성서조선』 제62호(1934년 3월)에 ‘조선지리소고(朝鮮地理小考)’란 논문을 쓴 것도 이러한 동기에서였다. 그는 이 글 가운데서 조선 지리를 지정학적인 면에서 고찰한다. 그리고 “조선 역사에 영일(寧日)이 없는 이유는 한반도가 동양 정국의 중심임을 여실히 증거한다.”고 주장하고,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동양의 범백(凡百) 고난도 이 땅에 집중되었거니와, 동양에서 산출해야 할 바 무슨 고귀한 사상, 동반구의 반만년의 총량을 대용광로에 달이어(煎) 낸 정수(精髓)는 필연코 이 반도에서 찾아보리라.” 김교신전집 1권, 64쪽.

 

식민지 조선의 한 구성원으로서 비루한 현실에 굴복하지 않는 것은 물론, 민족의 미래에 대한 이상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는 분명 최재서를 비롯한 대부분의 지식인‧기독교인과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김교신은 일생, 교사시절은 물론, 후일 흥남 공장에 근무할 때까지도 늘 서재에는 대형 한국지도를 걸어놓고 생활했다. 김교신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들은, 김교신이 늘 지도를 보면서 무언가를 골똘히 계획하고 있는 것 같았다고 증언한다.

 

20세기 전반 이 땅에는 ‘지정학적 숙명론’이 팽배해 있었다. 우리나라는 극동의 변방, 강대국사이에 놓인 반도라는 지리적 조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외세에 끊임없이 시달리고 나라를 빼앗길 수밖에 없다는 체념적 생각이다. 강자에 의해 강요된 식민사관의 일종이다. 이완용, 윤치호, 최재서 등 허다한 관료, 지식인들이 이 숙명론을 받아들이고 일제의 지배에 순응했다. 그러나 김교신은 격렬한 반론을 제기한다. 그에 의하면 한반도는 극동의 심장이며, 동양이 산출해야 할 가장 고귀한 사상을 키워낼 터전이다. 한반도는 ‘어쩔 수 없이 당해야 하는’ 숙명론의 근거이기는커녕, 우리 민족이 웅비할 기회의 땅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