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력과는 무관, 기업에 피해 줄 수 있어 문제”‘FTA 전도사’ 최병일 교수가 보는 한EU FTA 번역 오류이현택 기자 mdfh@joongang.co.kr | 제213호 | 20110410 입력
최 교수는 국내의 대표적인 FTA 지지자다. ‘FTA 교수연구회’를 창설해 회장을 맡을 정도다. 서울대와 예일대(경제학 박사)를 졸업한 최 교수는 1989년 7월 통신개발연구원(현 KISDI) 연구위원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체신부 장관 자문관, 한·미통신협상·우루과이라운드 서비스협상·한·EC 통신협상 한국대표단으로 활동했다. 이하는 최 교수와의 일문일답. (※ 괄호 안은 편집자 주) -한·EU FTA 협정문 한글본에서 207개의 번역 오류가 발견됐다. 어떤 손해가 있을까. “법률과 같은 효력을 갖는 비준안이 잘못 입법화된다는 잘못이 있다. 비준안을 심의하는 국회의원이 협상이 잘됐는지, 경제 영향은 어떤지를 평가해야 하는데 이 판단이 왜곡될 수 있다. 국역본에 의존하는 한국 기업들에도 손해가 될 수 있다. ‘정부에서 번역한 국문 협정문을 보고 수입조건을 준수했는데 통관이 거부당했다’면 어쩔 건가. ‘영문 원본을 안 찾아본 귀사의 책임’이라고 할 것인가. 또 주권국가에서 제대로 된 자국어 번역본이 없다는 것은 국가 자존심의 문제다. 그러나 협상 자체에는 큰 문제가 없다. 한글본과 영문본 둘 다 정본이라고 해도, ‘협상 언어’인 영어로 된 협정문을 우선하는 게 국제관례다.” -협정문 번역 오류는 왜 발생하나. “두 가지 이유다. 하나는 공무원들의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무사안일주의와 행정편의주의, 다른 하나는 국내 문제를 경시하는 외교관들의 마인드 문제다.” -‘관행’의 의미는. “일단 ‘갈아 끼우기’가 있다. 상임위 일정을 고려해 미리 비준안을 제출한 뒤 의결 전까지 중간 중간 다시 검토하면서 틀린 부분을 갈아 끼워왔다. 편법이지만 비준안이 통과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관행으로 넘어갔었다. 사실 이번에도 국회에서 문제가 될 뻔했는데 ‘뭐 그런 거 가지고 나무라느냐’고 했다더라.” -외교관들이 국내 문제를 경시한다는 게 문제 아닌가. “한국 외교관들은 외국하고 협상을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번역이나 비준 같은 국내 문제의 중요성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협상을 잘했으니 통과시켜 달라는 식이다. 사실 이번 번역문 오류도 발견됐을 때 비준동의안을 즉시 철회하고 국무회의 의결을 다시 거쳤으면 될 것을 귀찮다는 이유로 그냥 하자고 해서 문제가 된 것 아닌가.” -협정문 번역 오류가 한국 외교관의 비전문성 때문에 발생한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인력 부족으로 발생한 문제다. 현재 우리 FTA 협상팀은 상대국과 협상을 타결하자마자 바로 협정문 번역에 들어간다. 타결 후 국·영문 협정문을 온라인에 올리는 데까지 딱 두 달 정도밖에 주어지지 않는다. 두 달 동안 1000페이지가 넘는 협정문을 협상팀 몇 명이 번역해야 한다. 협상팀이 할 일이 그것만도 아니다. 국회의 쉴 새 없는 질의와 각종 유언비어에도 대응해야 한다. 국민의 알 권리에 부응해야 한다는 분위기 아닌가.” (김현종 전 통상교섭본부장은 올해 초 발행한 ‘김현종, 한미FTA를 말하다’에서 “한·미FTA 특위에서 일부 국회의원들이 ‘Trade Minister Kim assured us that Korea would address these issues(김 본부장이-미국이 관심을 두는-이 이슈들을 검토하겠다고 했다)’는 문장을 ‘Trade Minister Kim assured us(김 본부장이 확인해 줬다)’라며 앞부분만 떼어내 읽어 나를 의도적으로 곤경에 빠뜨리려 했다”고 주장했다.) -외부에 번역 감수를 맡기면 될 일이 아니었나. “로펌에서 그런 일을 하기에는 액수가 터무니 없이 작다. 외부에는 검독 정도를 맡길 수 있을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형 로펌 관계자는 “실제로 정부에서 계약서나 공문 번역을 의뢰하는 것은 의뢰비가 너무 적어 막내 변호사가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라고 했다. 외교통상부는 2009년 11월 국내 한 대형 로펌과 FTA 법률자문 계약을 체결했지만, 이번 오역의 논란이 된 관세 양허 및 원산지에 관한 부분은 법률 검토를 맡기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에선 밀실 협상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행정부가 국민에게 알리지 않고 밀실 협상으로 독주해서 사건이 터졌다는 의혹이 있는데 말이 안 된다. 이미 협상이 끝난 뒤에 번역본을 별도로 만드는 과정에서 무사안일주의와 행정편의주의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도 협상장에 시민단체가 배석한전례가 없다.” -그래서 외교통상부에서 FTA 협정문 번역 담당자로 3명을 채용했다. 그러면 문제가 없을까. “채용했다고 3명만 번역하진 않을 거다. 한 번 일이 났으니 앞으로는 검독도 충실히 하고 이런 오류는 없지 않을까 싶다.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외교부 내에 협정문 번역조직을 만들어서 전담하게 해야 한다. 다음 협상에 바쁜 통상 전문가들이 번역까지 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힘들다.” -외국에서도 이런 논란이 있나. “외국에서는 번역을 꼼꼼히 보는 사람이 이렇게 많지는 않다. 선진국은 이슈가 첨예하지 않으면 정부를 믿어주는 편이지 않나. 하지만 우리는 일단 FTA나 개방을 심정적인 반대세력이 어떻게든 이슈로 만들고 저지하려고 기회만 노리던 차에, 정부 스스로 좋은 구실을 제공한 것이다.” (외교부 당국자는 “자국어 번역이 잘못돼 수정을 요청하는 나라가 제법 있다. 그런 경우 각서를 교환한다”고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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