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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평구 선생

<노평구전집>민족의 정신연령 문제

by 안티고네 2002. 3. 19.

이번에 60, 70명의 사상자를 낸 구정(舊正) 서울역 참사에 대해서는 각 방면을 통해, 그리고 사회학자와 심리학자까지 동원되어 이의 원인과 대처 방안에 대한 많은 발언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설명에 만족하지 못한다.

나는 처음부터 이를 민족의 정신 연령 문제로 보았다. 만사를 정치나 환경 문제로만 생각하는 현대인들은 이에 불복할지 모르나, 나무에도 연륜(年輪)이 있는 법, 사람이 기계 아닌 이상 이 정신 연령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정신사가(精神史家)들에 의하면 괴테와 보통 사람의 정신의 차이는 사람과 원숭이의 차이와 같다고 한다. 전말 맥아더 장군은 일본인의 정신 연령을 열두 살 밖에 못된다고 규정한 적이 있지만, 과연 오늘날 우리 민족의 정신 연령은 몇 살이나 될 것인가?

2차 세계대전 때 영국에서 돌아온 분에 의하면 런던에서는 독일 비행기가 와도 전차 승객의 줄이 혼란되지 않더라고 했다. 실제로 2차대전 말기에 나 자신이 동경에서 목격했지만, 야간 폭격 중에도 군중의 혼란은 있었지만 군중 속에는 이를 결사적으로 제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과거 대서양에서 타이타닉 호가 침몰할 때 1500여 명의 승객들이 조용히 노약자와 여성들을 하선시키고 찬송가 “내 주를 가까이”를 부르며 죽음을 맞았는데, 이 와중에서 동양인 하나가 혼란을 일으키고 살아났다고 한다.

이번의 서울역 참변에서 공사(公私) 양면으로 드러난 무책임, 무질서, 혼란을 생각하면, 나는 이른바 4천년 우리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자라목 같이 기어들어간다. 아, 우리가 민족의 나이를 어디로 먹었는가? 미개(未開)란 카오스 곧 혼돈 무질서이며, 문명(文明)이란 코스모스 곧 질서를 의미한다. 정신의 진보란 외적인 데서 내적인 데로, 여기에서 다시 도덕적인 데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기주의로부터 공공(公共), 애타주의로, 방종으로부터 책임과 질서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 우리에게는 이런 측면이 아예 없다.

따라서 이번 참사는 결국 우리의 정신적 미개와 무능이 구체적으로 다시 한번 드러난 것이다. 아니, 이는 실로 이로 인한 민족 멸망을 경고한 일이라고 나는 감히 판단하는 바이다. 이런 정신으로 우리에게 정치, 학문, 종교 모두 자라날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민족의 도덕적인 자각, 종교적 신생을 기원할 뿐이다.

<진리와 독립> 제2호 (1960년 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