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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번역

[교수신문] 인문학을 위하여

by 안티고네 2006. 10. 4.

칼럼지기가 공감하는 부분을 파란색으로 강조했습니다.

 

그 잘난 인문학 교수들의 지적 권위주의, 신물이 납니다.

 

 

 

[대학정론] 인문학을 위하여

2006년 10월 01일 (일) 07:24:13 박부권 논설위원 editor@kyosu.net
   
   
 

고려대 교수들의 인문학 위기선언에 이어 전국 80여개 대학 인문대 학장들이 인문학 발전을 위한 제언을 발표했다. 이 제언서는 위기를 초래한 책임이 인문학적 정신과 가치를 경시하는 사회구조의 변화와 이를 주도해 온 정부당국과 대학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인문학 진흥기금과 교육부총리 산하에 인문한국 위원회를 설치할 것, 국가 주요 정책위원회에 인문학자의 참여를 제도적으로 보장할 것, 그리고 인문학 발전 추진위원회를 구성할 것 등을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여기에 부응하여 교육부는 인문주간을 연중행사로 확대하고 지원예산을 늘리는 등 인문학 지원방안을 다각도로 모색할 것이라고 한다.


만약 제안서의 요구가 모두 관철된다면 인문학은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인문학적 지식이 상류계급의 표식이자 계층상승이동의 수단이 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리고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목표로 하는 보통사람들의 직장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위기선언으로 대학의 젊은이들과 일반 국민들이 인문학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일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다. 그러므로 제언서의 위기 진단과 처방에는 문제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40여년 전 런던대학의 퍼터스가 쓴 ‘윤리와 교육’은 실용성을 앞세워 미국의 “젖소대학”을 닮아가는 영국대학의 개혁풍토를 역전시키기 위한 인문학의 변론서이다. 블룸의 ‘미국정신의 종말’도 인문학을 옥죄어오는 천박한 것, 실용적인 것, 범용적인 것들에 대한 공격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반열에 선다. 인문학의 위기는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고 우리나라에만 나타나는 특별한 현상도 아니다.


인문학의 변론서들이 정교하게 제시하는 인문학의 옹호논리를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인문학은 보다 나은 인간의 삶과, 이상사회를 꿈꾸게 한다는 것만으로 그 존재가치가 충분하다고 본다. 인간다운 삶은 어떠한 삶인가. 이상적인 사회란 어떤 사회인가. 인문학은 이러한 대답 없는 질문에 끝없이 도전함으로써 우리를 상상과 새로운 창조의 세계로 인도한다.


그의 평생을 철학에 바치기로 결정했다는 소크라테스의 말에 칼리크레스는 비웃으며, 젊었을 때는 몰라도 나이가 들어서까지도 철학을 공부하겠다는 자는 매질을 당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대화 속에서 나는 인문학의 태생적 위기를 본다. 현실세계에 눈을 돌리는 젊은이들을 나무랄 수 없다. 그들에게도 인문학이 필요한 이상 인문학은 좀 더 친절하게 그들을 찾아 나설 수는 없는가. 소크라테스가 그랬던 것처럼.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10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