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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번역

[박상익]<출판저널>2006년 9월호 이 달의 책 후보(3권)

by 안티고네 2006. 8. 16.

2006년 9월호 이 달의 책 후보(3권)

 

 

 

 


《최고의 고전 번역을 찾아서》
교수신문 엮음|생각의 나무|360쪽|값 18,000원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지 어언 500여년이 흘렀다. 하지만 정작 한글이 우리 사회에서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의 식민 지배를 벗어던진 후의 일이다. 그러나 해방된 후에도 일본어를 통해 학문을 배운 1세대 학자들이 우리 학계의 주류를 형성했고, 한글 독서보다 일본어 독서가 더 자유로운 그들에게 외국고전의 한글 번역은 관심 밖의 일이었다.

 

그 후 미국 등지에서 서양학문을 익힌 세대가 등장했지만 그들 역시 번역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서양 학자에게 배운 그들은 한국에 와서도 서양 학자들이 하던 방식대로 하면 그만이었다. 예컨대 영미의 학자에게 로크나 홉스는 연구대상이지 번역대상은 아닌 것이다. 따라서 미국인 교수에게 배우고 돌아온 학자는 로크, 홉스에 대한 논문은 써도 번역은 전혀 관심 밖이다.

 

문제는 서양학문이 서양인에게는 ‘내 것’이지만 우리에게는 ‘남의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서양인들은 ‘남의 것’인 외국학(중국학 등)을 연구할 때 일차적으로 해당 텍스트를 번역하는 것으로 연구의 물꼬를 튼다는 점이다. 실제로 오늘날 미국, 독일 등의 주요 대학 동양학 석, 박사 논문은 절반 이상이 번역으로 채워지고 있다.

 

비유하자면 그들이 ‘자신들의 대지’에 발을 딛고 ‘모국어의 깃발’을 휘날리는 동안 우리는 ‘주체(identity)’에 대한 하등의 성찰 없이 ‘성조기’를 휘둘러댄 셈이다. ‘기지촌 지식인’이란 이를 두고 말함일 것이다. 이렇게 굳어진 학계의 관행 탓일까. 우리 선조들이 남긴 한적(漢籍) 가운데 아직도 70퍼센트 가량이 번역 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 번역을 등한시한 결과 일본과 서양 각국에 비해 우리 모국어의 콘텐츠는 상대적으로 나날이 빈약해지고 있다. 극소수 엘리트를 제외한 대부분 국민이 외국의 고급 지식에서 차단된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우리의 과거로부터도 상당 부분 단절되어 있는 것이다.

 

황폐한 여건 속에서 『교수신문』이 큰일을 해냈다. ‘고전번역비평’이란 이름으로 주요 고전 번역서에 대한 평가 작업을 기획해 2005년 4월부터 연재했고, 그 1차분을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엮어낸 것이다. 과문의 탓인지 모르나 우리나라 교수 사회가 번역 문제에 이토록 큰 관심을 기울인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이 작업은 21세기 초 한국 문화사에서 대단히 의미 있는 사건으로 기록되리라 전망한다. 물론 제비 한 마리로 봄이 올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책을 출발점 삼아 ‘모국어 콘텐츠에 기여하는 학문’의 전통이 우리 학계에도 조금씩 뿌리내리기를 기대해본다.

 

 

 

 

 

 


《경성기담》
전봉관 지음|살림|348쪽|값 12,000원

 

윤택영 후작은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인이다. 순종이 즉위하기 전 그는 딸을 세자비로 간택되도록 하기 위해 요즘 화폐단위로 5백억 원(당시 50만 원)에 해당하는 거액을 로비 자금으로 쏟아 부었다. 문제는 그 돈이 모두 빌린 돈이라는 데 있었다. 이 어마어마한 빚 때문에 그는 남은 일생 동안 ‘채무왕’ ‘부채왕’ ‘차금대왕’ ‘대채왕(大債王)’ 등의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빚이 원체 많으면 배포도 커지나보다. 채권을 집행하러 온 집달리에게 그는 이렇게 우겼다. “본인 재산은 3천만 원(당시 3백 원)밖에 없어.” 신기한 것은 전 재산이 3천만 원밖에 없다던 윤택영이 그 후로도 하루에 수천만 원씩을 쓰고 다녔다는 것이다. 빚쟁이에게 줄 수 있는 돈은 3천만 원밖에 없었지만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위해 쓸 돈은 마르지 않고 샘솟았던 것이다.

 

문득 어느 전직 대통령이 생각난다. 그는 뇌물죄 추징금을 환수하기 위한 재판에서 29만 1천 원이 든 예금통장을 제출하고 “측근과 자녀의 도움으로 생활하고 있다”고 강변했다. 씀씀이가 큰 것으로 소문난 그가 법정에 제출한 재산 내용은 생활보호대상자 수준이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측근을 대동하고 지방 또는 해외여행을 하고 골프장 나들이를 즐겼다. 그래도 3천만 원을 신고한 윤택영 후작이 조금은 더 양심적이었다고나 할까.

 

전봉관 교수가 『황금광시대』에 이어 또 역작을 출간했다. 전작이 1930년대의 ‘골드러시’를 다루었다면, 이번 작품은 일제 강점기 4건의 살인사건과 6건의 대형 스캔들을 담고 있다. 이 책은, 일제 강점기 신문과 잡지에서 보도된 기이한 사건들을 추적하고 있다. 4건의 살인 사건은 조선인이 조선인을 살인한 사건(죽첨정 ‘단두유아’ 사건), 조선인이 일본인을 살해한 사건(안동 가와카미 순사 살해 사건), 일본인이 조선인을 살해한 사건(부산 마리아 참살 사건), 그리고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희대의 연쇄 살인 사건(살인마교 백백교 사건) 등이다.

 

사건 하나하나가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역사는 이국(異國)이다. 불과 70년전 이 땅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낯설고 기이하기만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우리에게 인간성은 불변이라는 교훈을 던져준다. 예나 지금이나 모든 범죄의 배후에는 돈과 여자가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흥미 있는 이야기 하나. 일제 시대에는 간통죄가 부인의 부정(不貞)에만 적용되었다고 한다. 남편이 바람을 피워도 간통죄로 고발할 법적 근거가 없었다는 말이다. 남편을 간통죄 처벌대상으로 올리는 문제가 1930년 일본 의회에서 한 차례 논의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첩을 둔 의원들의 ‘조직적 반발’로 입법화 되지는 않았다. 남편과 부인 모두 간통죄의 처벌대상이 된 것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다. 형법 제정 당시 남편을 처벌 대상으로 추가한 간통죄는 국회의원 재석원수(110명)의 과반수(56표)에서 겨우 한 표가 많은 57표의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남자들이란…….

 

 

 

 

 

 

 

《한국사회 권력이동》
박길성,한준 외 지음/굿인포메이션/280쪽/값14,800원

 

사석에서 대통령 욕을 했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던 세월이 엊그제 같은데, 이젠 대통령 욕을 하지 않으면 술자리에 끼기 어려울 정도로 세상이 급변했다. 권위주의를 해체하면서 존경과 신뢰가 내포된 권위를 실종시킨 것이 노무현 정부 내내 큰 부담으로 이어지고 있다. 권위주의라는 과거의 틀을 깨는 과정에서 오히려 사회질서에 꼭 필요한 합리적 권위마저도 훼손되는 상황이다. 노무현 정부는 구래의 권위를 거부하고 과거의 권위주의를 해체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새로운 권위를 만들어내는 데는 실패한 셈이다.

 

노무현 정부의 출범과 함께 한국 사회가 요동치고 있다. 해방 이후 20세기말까지 수평적 권력교체가 거의 없었던 한국 사회였다. 그러다가 2002년 대선과 참여정부의 등장으로 정치세력의 교체뿐만 아니라 사회세력간의 헤게모니 쟁투가 폭발하면서, 권력이동 담론이 언론계와 학계에서 활발히 오가고 있다. 이 책은 기존의 권력이동 담론이 지나치게 정치적이고 당파적이었다고 보고 권력이동의 개념, 토대, 그리고 지형에 대한 논의를 바탕으로 오늘날 가장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몇몇 분야를 집중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우리 사회의 이념 대립을 흔히들 ‘보수’와 ‘진보’의 대립으로 간주하지만 현실적으로 주된 대립의 축은 ‘보수’와 ‘중도’인 경우가 많다. 여기에는 필경 냉전 체제 붕괴 후 새롭게 등장한 ‘세계화’의 물결이 중요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진보의 설 자리가 매우 협소해진 것이다. 물론 그것은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다. 어쨌거나 서유럽 각국이 20세기에 역사적으로 경험했던 ‘제대로 된 진보정책’을 실천에 옮길 겨를도 없이 중도 노선으로 빨려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한국의 진보 세력은 불운하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권력이동의 축으로서 ‘이념’은 불완전한 것일 수밖에 없다. 보수와 중도의 대립은 전면적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중도적 이념은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중도의 입장은 보수와 진보 사이를 오락가락 한다. 실제로 노무현 정부의 진보주의적 ‘명목’ 뒤에는 보수주의의 ‘실제’가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녔고, 이런 의미에서 ‘왼쪽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한다’는 항간의 비아냥거림에는 일말의 진실이 담겨있는 것이다.

 

편집자의 말대로 이 책이 ‘권력이동의 눈으로 한국의 사회변동을 해석하려는 첫 시도’라는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일반 독자들이 돈 주고 사서 읽을 것을 기대하고 책을 만드는 사람들이, 어떻게 기존의 전문 학술지에서나 볼 수 있는 진부하고 구태의연한 ‘논문식 글쓰기’를 시종일관 견지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글쓰기’라는 차원에서 볼 때 이 책의 필자들 중 상당수는 ‘권력이동’에 완강히 저항하는 보수 지식인으로 분류해야 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