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효씨의 다른 책을 찾으러 도서관에 갔다가, 확 눈에 띄는 빨간 색의 표지 때문에 이 책을 발견했습니다. 서양사 관련 도서를 많이 번역하신 어느 교수님이 쓰셨는데, 표지에서부터 "대학원생들에게 번역 하청을 맡긴 교수가 떳떳이 활동하는 사회.." 라고 짧은 글로 한국 번역문화의 문제점을 확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책은 처음에 번역이 역사적으로 문명의 발전에 기여해온 배경, 한국 번역서의 역사적 흐름을 분석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유럽 사회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 이슬람과 그리스 책들을 번역한 서적들이 누적되면서라는 점이 설득력있게 전개되어 있습니다. 유럽 사회는 왠지 아주 태고적부터 발전되었지 않았을까 누구나 생각을 해 왔겠지만, 이슬람에 한참 뒤쳐진 거의 야만인 시절의 시기에 선구적인 번역가 집단들의 노력으로, 옛날에 축적된 지식들이 자국어 문화로 편입되면서 발전의 토대를 쌓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저도 지금까지는 번역을 그냥 시간을 절약시켜 주는 정도로 별것 아니게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양쪽언어를 모두 했던 유명한 문학가들도 모국어책에서 훨씬 느낌이 정확하게 와 닿고 정보의 양이 차이가 확실하다는 점에서 확실히 번역서가 있고 없고는 해당 국가의 문화에 들어갔는가 아닌가의 차이가 되어 버린다는 생각에 자연스럽게 끄덕이게 됩니다.
우리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탄 난쟁이와 같아서, 그 어깨로부터 거인들보다 더 멀리 많은 사물을 볼 수 있으니, 이는 우리의 시력이 예민하거나 우리의 재능이 출중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들의 거인다운 위대함에 의해 지탱되고 고양되기 때문이다. -- 52페이지 (사르트르의 베르베르의 말을 재인용)
그런 면에서, 번역서의 품질은 결국 그 문화의 깊이와 넓이를 결정하는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고, 지금같이 오히려 원문보다도 읽기 힘든 번역서가 판치는 상황은 분명히 문제가 심각합니다.
그러나, 번역을 해 보신 분들은 모두 알 수 있듯이, 한국 출판계의 상황은 별로 좋은 품질로 번역서가 나올 만한 상황이 아닙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번역해 봐야 시급으로 따지면 편의점 알바보다도 못한 보수가 나오는 상황에서 여간 재력이 있지 않고서는 번역을 제대로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삭제) 책이 나오는 것이 어찌보면 사회적으로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번역을 이처럼 하찮게 여기는 것은 우리의 학풍이 이 땅에 발을 딛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피할 수 없는 증거로 여겨진다. 이 땅에서 살면서 마치 자신이 미국 시민인 것처럼 행동하고, 한국 대학에서 월급을 받으면서도 마치 미국 대학의 교수인 것처럼 행동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안타깝게도 '주체'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찾아보기 힘들다. -- 207페이지
원서로 안 읽는 후배녀석들을 구박할 때,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기초학문 정도는 모국어로도 충분히 배울 수 있어서, 본인이 관심만 있다면 12살짜리 커미터, 13살짜리 SCI 논문 발표자가 될 수도 있는 환경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정부의 장기적인 지원, 학계의 번역에 대한 인식 재고, 도서관 문화의 개선 등 여러가지 해결책이 이 책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번역에 대한 생각을 제대로 정리할 수 있게 되어서 무척 다행입니다. ^^
저도 이제 파이썬 마을에서 답글 달 때, 영어로 된 매뉴얼에 링크 덜렁 달고 끝내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반성~)
4천5백만 국민들을 위한 지적 인프라를 구축하는데 투입되는 정부 1년 예산이 서울 강남의 아파트 1채 값이다. -- 224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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