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스와 김교신
1990년대 중반 김교신 기념 강연에서 발표했던 것으로 활자화 되지 않았던 원고입니다.
동족의 정치적 파멸
김교신 선생은 1901년에 태어나 1945년 4월에 작고했습니다. 1901년에서 1945년까지 만 44세의
길지 않은 생애였습니다. 선생이 살았던 시대는 우리 민족이 조선왕조의 몰락과 더불어 극심한 고초를 겪던 때였습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선생이 살아온 한 평생이 망국의 한이 서린 길고도 암울한 어둠의 세월이었음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선생이
태어난 것은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이 노골화되던 20세기 초였습니다. 500년을 이어오던 조선왕조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위태하게 꺼질듯 말 듯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선생이 태어난 시점 그 자체가 벌써 선생의 심상치 않은 인생행로를 예고하고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선생이 함흥
공립보통학교(咸興 公立農業學校)를 졸업한 것은 1919년이었습니다. 3.1운동이 일어나던 바로 그 해였습니다. 선생은 3.1 운동 시에는 집에서
여러 날 밤을 새워 태극기를 만들어 소학교와 예배당에 보냈다고 합니다. 이 일은 선생 집안에 큰 소동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선생은
바로 그 해에 일본으로 유학길을 떠났습니다. 선생의 일본 유학이 이러한 사건과 관계가 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어쨌든 선생은 그곳에서
무교회 신앙의 창시자인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문하에서 기독교 신앙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나서 선생은 식민지 조국으로 돌아와
1927년부터 <성서조선>이라는 월간잡지를 간행하면서 전도에 전념했습니다. 그러나 1942년에는 세칭 “성서조선 사건”으로 잡지는
폐간되고, 선생을 비롯한 13명이 만 일년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는 봉변을 겪게 됩니다. 잡지를 창간한지 15년만의
일이었습니다.
출옥한 이듬해인 1944년 7월 선생은 함경남도 흥남(興南)에 있는 일본질소회사에 입사하여 3,000여 한국노동자의
복리를 위해 힘쓰면서 해방을 고대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깝게도 해방을 석 달 반 남겨놓은 1945년 4월 25일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별세했습니다.
이상 선생의 생애를 간략하게 살펴보았습니다만, 이 자리에서는 선생의 생애와 관련하여, 기원전 8세기 북왕국 이스라엘
멸망 직전에 활동했던 구약시대의 예언자들을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특히 예언자 아모스는 이스라엘민족이 아시리아의 침략을 받아
멸망의 위기에 봉착했던 시점에 활약했던 인물로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김교신 선생과 예언자 아모스는 다같이 동족의 정치적 파멸이라는 비극적인
역사를 살아온 인물들인 것입니다.
아모스가 살던 시대는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이스라엘이 번영을 누리고 있던 때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왕국은 여로보암 2세(786-746)가 다스리고 있었는데, 이 시기는 이스라엘이 다윗과 솔로몬 시대 이래 최고의 번영을 구가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것은 실상 이스라엘이 마지막으로 맞이한 번영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번영은 얼마 못 가서 아시리아의
침략으로 인해 철저히 짓밟히게 되었고, 그 결과 이스라엘 왕국이라고 하는 국가의 정치적 실체는 서기전 721년 지상에서 영구히 소멸되고
말았습니다. 여로보암 2세가 죽은 지 25년만의 일이었습니다.
김교신 선생의 생애에서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이 짙은 그림자를
던져주고 있듯이, 아모스의 생애에는 아시리아라고 하는 침략 세력이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아모스를 말하기에 앞서,
이스라엘 역사에 관해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정치사 및 종교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을 둘만 꼽는다면, 그 첫째는
아무래도 <출애굽 및 가나안 정복>이라고 할 것입니다.
여기서 <출애굽> 및 <가나안 정복>은
외견상 두 사건이기는 하지만, 그 성격상 연속된 하나의 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두 번째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서기전 8세기에
있었던 <아시리아의 침략>입니다.
<출애굽 및 가나안 정복>이래로 이스라엘의 정치적 운명과 종교적 발전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것은 바로 <아시리아의 등장>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좀더 면밀하게 뜯어보면, <출애굽 및
가나안 정복>과 <아시리아의 침략>, 이 두 사건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해 제각기 다른 영향력을 끼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출애굽 및 가나안 정복>은 이스라엘의 정치와 종교에 대해 다같이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실제로 이 사건을
계기로 해서 이스라엘은 정치적인 면에서 민족적 아이덴티티 즉 정체성을 확립하였을 뿐만 아니라,나아가 종교민족으로서의 사명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반해서 <아시리아의 침입>은 정치적인 면에서 파괴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
의해 721년 영구히 멸망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토록 정치적으로는 파멸적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시리아는 이 시기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에 대해서는 실로 창조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기원전 8세기는 종종 히브리 예언의 황금시대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종교, 특히 예언사상이 이 시기에 이르러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묘하게 들릴지 모르나, 이러한 이스라엘 종교의
눈부신 발달에는 아시리아라고 하는 침략적 제국의 영향이 대단히 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아시리아 제국이 서남아시아 지방에서
어떤 비중을 점하고 있었는지에 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서기전 9세기초 이래로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일대의 정치정세가
평온을 유지하느냐, 아니면 아비규환의 전쟁상태에 돌입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아시리아의 손아귀에 달려 있었습니다.
여로보암 2세
때 북왕국 이스라엘이 번영을 누렸다고 앞서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만, 그와 같은 번영도 사실은 아시리아가 단 한차례(759년 레바논까지 접근)를
제외하고는,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지방에 약 20년 동안 일체 출몰하지 않았던 덕분이었습니다.
약 20년간에 걸친 평온함 때문에
이스라엘의 지배자와 백성은 환상을 품게 되었습니다. 여로보암 시대의 번영이 전적으로 아시리아 덕분인 줄을 망각하고, 그저 자기네가 잘나서인 줄로
착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환상은 721년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과 더불어 산산조각이 나게 됩니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그러면 아시리아 세력의 침입은 이스라엘의 종교발전에 어떤 영향을 주었습니까? 그 내용을 간략하게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아시리아의 침략은 이스라엘 민족의 세계관에 중대한 변화를 초래했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이스라엘 민족사의
출발은 <출애굽 및 가나안 정복>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출애굽 이래로 서기전 8세기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민족이
생각하고 있었던 세계란 남으로 이집트의 나일강과 북으로 유프라테스강 사이의 지역이 고작이었습니다. 이 좁은 지역이 이스라엘의 정치적
활동범위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와 신앙은, 그 모든 내용이 이 좁은 범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얻어진 것들이었습니다. 따라서, 당연한 일이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활동범위 역시 이 지역 안에 국한시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작은 세계의 바깥으로부터, 이제까지 경험한 어떤 세력과도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강력한 한 세력이 등장하여 팔레스타인을 호시탐탐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력은 이스라엘과 주변의 이방 민족들을 아무런 차별도 두지 않고, 그야말로 무차별하게 유린하려 하였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이 이방민족들과 똑같은 처지에 떨어지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선택된 백성으로 자부하던 이스라엘 민족의 자존심이
짓밟히게 된 것입니다.
결국 아시리아의 등장은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의 세계가 넓어졌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세계의 중심이 바뀌는 경험을 이스라엘은 하게 된 것입니다. 언뜻 보면 이스라엘 역사의 스케일이 더 커졌다는 정도의 의미 밖에 없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이스라엘 역사의 성격과 본질을 뒤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이 이제껏 역사 속에서
겪어왔던 어떤 세력보다도 막강하고 불가항력적인 한 세력과 마주치게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출애굽 이래로 유지되어왔던 그들의 전통적인 종교신앙 그
자체가 위축되고 말았습니다. 대제국 아시리아의 입장에서 볼 때, 이스라엘 종교란 가소롭기 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아시리아 인들이
보기에, 이스라엘 종교가 말하는 야훼 하나님은 팔레스타인의 다른 민족들이 숭배하던 이방신들과 하등 다를 바 없는 대수롭지 않은 존재로 비쳐졌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 때 받은 충격은, 근대 초의 유럽인들이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에 접하였을 때 받은 충격과 비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코페르니쿠스 이전의 천문학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하는 천동설이었습니다.
유럽인들은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지구를 창조하셨고, 이 지구 위에 사는 인간들을 지극히 사랑하신 나머지 독생자 그리스도를 보내어 하나님의 영원한 뜻을 이루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중세말에 이르기까지, 신앙적으로 보나 천문학적으로 보나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하는 사실은 움직일 수 없는 진리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시대가 바뀌고 코페니쿠스의 새로운 천문학이 등장하면서,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떠도는 여러 행성들 가운데 하나로
판명되었던 것입니다.
아시리아 침략 이전의 이스라엘 민족도 자기네가 창조주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 선택된 백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듯 자부심에 차있던 이스라엘이 이제 아시리아라고 하는 거대한 세력 앞에서, 그 동안 경멸해왔던 다른 이방 민족들과 똑같이 존망의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근대 초의 유럽인에게 있어서나, 아시리아의 위협에 직면한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나, 다같이 그들의
신앙에 새로운 내용을 불어넣지 않으면 그들의 종교는 기반을 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새로운 믿음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새로운 믿음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그 믿음은, “설사 새로운 세계, 미지의 세계가 발견된다 하더라도 그러한 발견은 결국 창조주의 권능이 얼마나
큰가를 깨닫게 만들 뿐”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러한 믿음이어야만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세계관과 우주관이 확대되어 인간의 시야가 새롭게
넓어짐에 따라, 신앙 역시 하나님의 권능에 걸맞도록 확대, 심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원전 8세기 구약 예언자들은 바로 그런
점에서 성공적인 인물들이었습니다. 예언자 아모스는, 하나님의 섭리가 우주만큼이나 보편적이어서 지상의 어떤 강한 세력보다도 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아시리아마저도 하나님의 도구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그토록 전능한 권능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아시리아 세력의 등장은 신앙의 위기를 초래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섭리가 얼마나 크고 위대한가를 일깨워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아모스의 신앙은 아시리아의 등장으로 오히려 한층 새로운 내용으로 충전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아모스의 이 신앙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민족의 정신적, 종교적 토대는 흔들림 없이 더욱 굳건하게 자리 잡을 수 있었습니다. 아모스는 이스라엘에게 영속적인 주춧돌을
놓아준 셈이었습니다.
최선의 처방은 진리의 확립
둘째로, 아시리아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단순한 정치적, 군사적 세력 이상의 존재였습니다. 고대세계에서 아시리아는
보편사상의 상징이었습니다.
보편사상 하면 대뜸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세계사를 읽은 사람이면 누구나 보편사상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서 로마제국을 떠올릴 것입니다. 로마제국은 고대의 지중해 세계를 통합하여 각양각색의 다양한 민족들을 단일한 법체계에 의하여 성공적으로
통치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역사상 보편성을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존재입니다.
물론 아시리아는 보편사상의 상징으로서는 로마만큼
완벽한 예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로마만큼은 못되었지만, 아시리아가 고대세계에서 상당한 정도 보편적 성격을 지닌 제국이었던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민족 역시 이런 점에서 아시리아로부터 영향을 받았던 것입니다.
아시리아 등장 이전까지의 역사는 이를테면
여러 개의 웅덩이 속에서 제각기 전개되어온 셈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비롯한 많은 민족들은 마치 웅덩이 속의 개구리들 모양 자기네가 살고 있는
세상이 세계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아시리아의 등장과 더불어, 바야흐로 역사는 거대한 대양이 되어 넘실거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전능한 주권을 깨닫기 위해서는 어떤 경우가 더 도움이 되겠습니까? 역시 작은 웅덩이로 나뉘어 살
때보다는 아시리아에 의해 역사가 하나의 바다로 통합되어 있을 때, 섭리의 보편성을 깨닫기가 용이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아시리아는 각양각색의 다양한 민족들을 군사적으로 정복하였을 뿐만 아니라,한 걸음 더 나아가 잡다한 민족종교들마저도 분쇄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유일신 종교가 들어설 자리가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이 새로운 상황 가운데서
이스라엘 종교의 내용을 확충시켜야 할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다한 것이 바로 아모스였습니다. 아모스는 대제국 아시리아의 침략위협에 접하여, 이스라엘
종교를 유일신 종교로 굳건하게 확립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종교가 세계종교로 비약할 수 있는 토대를 놓은
셈입니다.
이상에서 예언자 아모스가 외적의 침입이라고 하는 정치적 위기에 접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위하여 어떤 기여를 하였는지
살펴보았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아모스는 이스라엘 종교의 진리를 분명히 하고 신앙내용을 확충하는데 예언자로서의 생애를
걸었습니다.
미증유의 정치적 위기에 처하여 아모스가 가장 우선적으로 서두른 것은 이스라엘 종교의 진리를 분명히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예언자 아모스는 이스라엘이 정치적으로 망하게 된 원인도 궁극적으로는 신앙진리의 약화에 있다고 생각하였고,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민족을 살리기 위한
가장 궁극적인 처방 역시 신앙진리를 분명히 하는데 있었다고 보았습니다.
만일 아모스가 이스라엘 종교의 근본을 확고하게 세워놓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이스라엘은 고대세계에 수없이 등장했다가 이름만 남기고 사라져버린 다른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역사 속에서 사라져버리고 말았을지도
모릅니다.
김교신 선생은 열 여덟 살 나던 해에 3.1운동을 겪게 되었습니다. 선생 역시 이 당시에는 태극기를 그려 이웃에
나눠주기도 했습니다.<성서조선> 창간사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선생이 배를 타고 현해탄을 건너면서 “아무래도
나는 조선인이로구나”하며 연락선 갑판을 굴렀다는 것입니다. 식민지 청년으로서 민족적 자의식이 선생의 가슴을 채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선생은 우치무라 문하에서 기독교신앙을 배우면서, 기독교의 진리에 의해서만 민족이 바로 설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후 곧 시작한 일이 바로 <성서조선>의 창간이었습니다. 성서의 진리를 분명히
세우는 것만이 민족이 살 수 있는 가장 궁극적인 방도라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성서조선 사건”으로 잡지가 폐간되고 난 후 흥남의
질소회사에서도 선생이 한 일은 3,000명이나 되는 한국노동자들을 규합하여 민족운동에 나서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근면, 청결, 정직 등
도덕적 자각을 통해 이들을 기독교적 진리에 근접시키는데 선생의 주안점이 있었던 것입니다.
무교회 신앙은 전천후 신앙
유희세 선생님(전 고려대 수학과 교수)은 언젠가 무교회 신앙의 특징을 일컬어 “기독교의 게릴라부대”라고 말씀한 적이
있습니다.
“왜 게릴라 부대냐, 정규군이지” 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이 말씀이 무교회 신앙의 성격을 잘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릴라 부대는 정규군이 아닙니다. 따라서 전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식량도 자신이 스스로 조달해야만
합니다. 무기와 탄약도 필요하다면 스스로 입수해서 사용해야만 합니다. 심지어 본부와 통신이 두절되었을 경우에는 상황에 따라 스스로의 판단 하에
작전계획도 수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 속한 사람들은 교회라고 하는 작전 지역이 따로 정해져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은 헌금으로
충당이 됩니다. 무기와 탄약에 해당하는 성경 말씀은, 성직자가 따로 있어서 그로부터 정기적으로 공급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신앙 생활 역시
교회에서 지도하는 대로 성실하게 봉사하면 되는 것이지, 굳이 자신의 신앙 노선을 별도로 설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무교회
신앙은 따로 정해진 전선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가정생활을 하건, 사업을 하건, 농사를 짓건, 교육을 하건, 학문을 하건, 그 무엇을 하든 모든
곳, 모든 현장, 모든 현실이 전선입니다. 내가 서있는 그곳이, 그리고 내가 하는 그 일이 신앙적인 전선인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처럼 천막장사를 해서라도 제 밥벌이는 제가 하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 공부도 누가 가르치는 사람이 따로 있어서 그저 듣고
배우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읽고 공부하고 또 가르치기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서있는 삶의 현장에서 스스로 신앙적으로
사색하고 판단하여 방향을 모색하여야만 합니다.
실로 무교회 신앙이야말로 전천후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자신이 처한 모든 현실
속에서 신앙적으로 판단하고 결단한다는 점이 무교회의 중요한 특징인 것입니다.
그리스의 한 철학자는 “같은 강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매 순간 순간마다 강물은 상류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까닭에 같은 지점에 서있어도 그 발을 스쳐 지나가는 물은
순간순간 다른 물인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현실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합니다.
아시리아의 침략이라는 역사적 상황은 아모스에게는
새로이 부딪혀 온 도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언자는 이 새로운 역사적 도전에 직면하여,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하는 것으로 돌파구를
모색했습니다.
김교신 선생 역시 일제의 식민지배라고 하는 새로이 밀려온 상황 가운데서 성경의 진리를 분명하게 밝힘으로써 이를
극복하고자 했습니다. 예언자 아모스와 김교신 선생은 모두 인간적인 해결 방안을 물리치고 신앙적인 길을 택한 것입니다.
우리 역시
살아나가다 보면 매번 새로운 현실에 마주치게 됩니다. 학교에 다니다가, 취직하여 사회생활 하고, 결혼하고 자식 낳아 가정생활 하고……. 이 모든
현실이 다 새로운 도전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에게 부딪혀 오는 현실들은, 인간적 사고의 편에 설 것인가,
아니면 기독교의 편에 설 것인가, 둘 중의 한 길을 택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학문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인문, 사회과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오늘날 만만치 않은 도전에 직면해 있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현대 역사학은 인간현상을
파악함에 있어서 대체로 사회적, 경제적 시각에서 접근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기독교사를 연구하는 학자마저도 기독교를 그저 사회적
현상, 경제적 현상으로만 다루려고 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특히 기독교적 전통이 얕은 한국 학자들의 연구를 읽다보면 참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기독교적인 통찰이 빠져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안 믿는 사람과 차이점이 없는 것입니다.
유물적인 시대정신의 반영이겠거니
하고 넘겨버릴 수도 있겠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서양의 경우는 마르크스주의적인 학자의 경우에도 종교적인 깊은 안목을 구비하고 있음을 종종
보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한국은 기독교적인 정신 토양이 황무지와 다름없다고 봅니다.
한국의 기독교 신자가 천만 명을
넘어섰다고 말들 하지만, 한국의 기독교는 아직도 기독교 물을 덜 먹은 것입니다. 기독교의 껍데기는 들어와 있지만 그 내용이 들어차려면 아직
멀었다는 생각입니다.
예언자 아모스는 바로 이런 점에서 자신이 마주친 현실을 신앙의 눈으로 극복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김교신 선생 역시 자신이 처한 암울한 현실 가운데서 기독교적인 관점에 굳게 서서 이를 실천에 옮긴 인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자신들이 처한 현실 가운데서 신앙적인 진리를 더욱 분명히 하고 풍요롭게 함으로써 이의 해결을 도모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새로운 현실이 주어지고 기독교에 대한 도전의 물결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상황에 대해 기독교적인 안목과 통찰력을 가지고 대응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기독교는 시련에 굴복한 채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문제라고는 하나 결국은 사람 문제로 귀착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도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우리가 처한 현실, 우리가 마주친 삶의 현실 속에서, 인간적인 입장이 아닌 기독교적인 시각에 서서 바라보고 또 기독교적인 입장에 서서
대응하는 일입니다.
학문이든, 교육이든, 사회문제든 모든 것이 다 여기 해당됩니다. 사실 기독교는 2천년의 역사를 겪어오면서
헤아릴 수 없으리 만큼 많은 도전을 받아왔습니다. 이 도전은 물론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를 돌이켜 보면, 아이러니컬하게도,
기독교는 바로 그와 같은 도전에 의해 그 정신적 내용과 신앙적 진리를 더욱 확장시키고 분명히 했던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이러한
기독교의 풍부한 내용은 서양의 기독교 고전을 통해 접할 수 있습니다. 루터와 칼뱅의 신앙,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 단테, 밀턴의 문학, 파스칼의
신앙, 칸트, 키에르케고르의 철학 등 서양의 기독교 고전들은 바로 그러한 도전을 극복하고 신앙적 진리를 확장시킨 책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고전은 가장 훌륭한 성서주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성경 자체가 가장 위대한 고전인 것입니다. 김교신 선생과 무교회
신앙의 포인트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끝으로, 김교신 선생이 남긴 저작들 역시 한국 기독교가 낳은 귀중한 고전이라고
생각합니다.
무교회주의자 김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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